* * *
눈을 뜨자 213개의 촛불이 살랑거렸다.
영주는 가부좌를 튼 채로 그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혜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 더 놓을까요? 하루밖에 안 됐는데…….”
“아니. 친구가 번뇌가 많나 보다.”
영주의 손이 혜소의 머 리를 쓰다듬었다.
“가서물한잔만가져와줄래?”
“네.”
혜소는 금세 물을 떠 왔다.
넘칠 듯 찰랑이게 담았지만, 영주가 마시는 양은 아주 조금이었다그 혜소는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거사님.”
“응?”
“왜 항상 조금만 드세요? 물도, 밥도…….”
“주술은 어려워야 주술이니까.”
영주는 딱 한 모금만 마시고 혜소에게 잔을 넘겼다.
그의 앞에는 항상 물그릇이 놓여 있었5?. 산골짝의 개울가에서 길어온 물. 여름에도 시원하고, 겨울에는 뼛속까지 아릴 정도로 차가운 개울이었다.
혜소는 그 물그릇을 보며 물었다.
“그 물은못먹어요?”
“먹는 물 아니야.”
“그럼요?”
“불 끄는 물이야.”
영주는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혜소는 잔을 가져다 놓고 다시 영주의 곁에 앉았다. 마음에 궁금증이 가득했지만, 영주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주는 그런 혜소의 마음을 알았는지,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혜소야.”
“네.”
“삶에는 방향이 있다.”
혜소는 잠자코 들었다.
“소위 운명이라고 부르지. 사람의 운명은 제각기 방향이 달라서, 누구는 오른쪽으로 가고 누구는 왼쪽으로 가기도 한다.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멀리 앉은뱅이 탁자에 놓인 시계의 바늘 소리가, 혜소의 귀에는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 운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
“그럼 번뇌도 의미가 없나요?”
혜소는 나이답지 않은 눈빛을 지었다. 영주의 고개가 살짝 흔들렸다.
“사람은 불가능한 일을 바라게 되어 있어.”
쉬운 일일수록 갈망하지 않으며.
“그리고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게 주술이지.”
어려운 일일수록 큰 품이 든다.
그것이 주술의 철칙.
혜소가 그 말을 듣고 물었다.
“그럼 저도 거사님처 럼 고행을 하면 주술 쓸 수 있어요?”
“바라는 게 뭔데?”
“거사님이랑 둘이서 계속 사는 거요.”
말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영주는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금 그러고 있잖아.”
그런 후 다시 침묵에 잠겨 들었다.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주술이라는 것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 * *
“너 뭐 하냐?”
상호는 낚시용품이 담긴 가방을 등에 멘 채로 눈을 끔뻑 였다.
태화는 검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파란 체크무늬 남방 아래에는 하얀 면티. 그리고 검은 치마를 배 위까지 올려 입었다. 머리에는 생일날 줬던 야구모자를 쓴 채였다.
그녀는 지금 항구에 서서 바다를 향해 합장을 하고 있었다. 두 눈을 꼭 감고서.
“말 걸지 마세요. 주술 거는 중이에요.”
“무슨 주술?”
“말 걸지 말라니까요.”
태화는 핀잔을 주고는 손뼉을 치다가 손바닥을 빙글빙글 비 볐다.
“아수라 발발타…….”
풍어제라도 하나 보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배 탈 시간이야. 슬슬 끝내.”
“오케이. 됐어요.”
태화는 팔을 내리고 배를 향해 달려가다가 빙글 돌아 상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와요!”
“얌마, 쌤을 멕이 냐……. 못 뛰는 거 알잖아.”
“헹~. 나 잡아 봐라~. 메롱~.”
태화가 혀를 내밀고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상호는 터덜터덜 걸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일찍 나온 덕분에 아침 먹은 직후에 섬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섬까지는 대략 한 시간 반. 섬과 육지 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배가 그 섬만 들르는 게 아니라 여 러 섬을 거 쳤다가 들르는 것이 었다.
상호와 태화가 가려는 섬의 배편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 타고 있는 이 배.
그만큼 사람 없고 한적한 섬이 었다.
상호는 갑판에 서서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화가 또 바다를 향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비는 거야?”
“참치요.”
“참치는 멀리 따뜻한 바다까지 나가야 있대.”
“제가 잘 설득해서 데려올게요.”
“……죽으러 오는 건데. 설득이 될까?”
“시도는 해 봐야죠.”
“그래.”
상호는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 렸다.
날씨가 참 좋았다. 바다의 표면은 구름의 모양이 비칠 것처럼 잔잔했다. 가끔씩 짠 내를 품은 산들바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을답게 높은 하늘에 태양이 점점 쨍쨍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은 어떻게 하냐? 가서 못 먹을 수도 있는데……. 배에서 과자라도 좀 사 갈까?”
“물고기 잡으면 회쳐 먹죠. 쌤 칼 잘 쓰잖아요.”
“산짐승은 많이 잡아 봤지만……. 물고기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럼 제가 구울게요.”
그렇게 둘이 대화를 하는데, 옆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끼어들었다.
“오문도 가요?”
중년 남자의 시선은 상호의 낚시용품에 꽂혀 있었다.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산제도 갑니다.”
“아, 산제도…….”
남자는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도전을 좋아하시네.”
“도전이요?”
“아, 모르는 거예요? 산제도는 고기 안 잡혀서 명소 된 곳인데.”
장소를 고른 곳은 태화다. 상호는 그 말을 듣고 태화를 돌아보았다.
태화는 여전히 기도 중이었지만, 못 들었을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요?”
“거기 가면 십중팔구는 고기 대신 세월을 낚는다고, 그래서 뭍은 별명이 강태공 섬이에요. 섬 전체를 돌아다녀도 포인트가 없어. 이거 원. 같은 곳에 가면 말동무나했을텐데…….”
남자는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섰다.
고기 안 잡히는 섬. 그것도 남해안의 군도 사이, 오가는 배편은 하나뿐인 외딴 섬.
그제서야 상호의 귀에 태화가 증얼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태풍오게해주세요태풍오게해주세요태풍오게해주세요 …….”
상호는 불안한 눈빛으로 화창한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수평선 어디를 둘러봐도 먹구름 한 점 없다. 하지만 뭔가 위험한 기운이 허공을 맴도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시바, 없던 태풍이 갑자기 생기지는 않겠지. 다 멀리서 올라오는 건데…….’
왠지 아까보다 물결이 살짝 거세진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 탓이리라.
상호는 말없이 태화의 곁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오늘 안에 학교로 돌아가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