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501)

* * *

“그건 뭐예요?”

태화가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다가 물었다.

상호의 손에는 명절 선물세트가 세 박스 들려 있었다. 한우, 통조림. 과일.

“친구집에 보내려고.”

지윤의 가족들에게 주려는 것이 었다. 뭘로 살지 고민하다가 애들도 많으니 그냥 다 사 버 렸다.

태화가 한우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 하지만 아직 삐진 척을 할 셈인지,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상호는 태화를 돌아보았다.

“놀러 가쟀지? 어디로놀러 가게?”

“낚시하러요.”

“……낚시?”

너무 의외인 대답에 그는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너 그런 취미도 있었어?”

“왜요? 내가 낚시하면 안 돼요?”

“아니, 그건 아닌데…….”

태화는 빨대를 잡고 낚싯대처 럼 휙 잡아챘다.

“손맛이 얼마나 좋은데요. 쌤 낚시 해 봤어요?”

“아니. 한번도안해봤어.”

“그럼 이번 기회에 배워 봐요.”

“그래서 낚시터는 어디로 갈 건데?”

“섬이요.”

“……섬까지?”

배를 타고 가자는 말인가.

상호는 한 가지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태화야.”

“네.”

“너는 낚시 해 봤어?”

“네.”

“9월엔 뭐가 잡히는데?”

태화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긴 고민 끝에 해낸 대답은.

“참치요.”

“…….”

상호는 한참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많이 잡아, 참치……. 가면 잡아 줄 거지?”

“네. 꼭잡아드릴게요.”

“믿는다.”

둘은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근데 쌤 차는 어디 갔어요?”

“……멀리 떠났어.”

* * *

다음 날. 추석 연휴의 첫날.

아침부터 교정엔 차들이 바쁘게 들락날락거렸다. 명절에 아이들을 데려가는 부모들이었다.

상호도 보따리를 싸서 이화관 앞에 서 있었다.

머지않아 지윤이 달려 나오며 손을 흔들었다.

“쌤! 쌤!”

“어, 그래. 지윤아.”

“주이소. 제가들겠심더.”

“하나만 들어 줘.”

상호는 지윤에게 보따리를 하나 내밀었다.

“택시 타고 가자. 고기 때문에 빨리 가야 돼서.”

“쌤 차는 어 디 갔는디예?”

“부숴먹었어.”

“엥.”

둘은 교문을 나서서 택시를 잡았다.

뒷좌석에서 지윤이 보따리를 슬쩍 들춰보더니 조수석에 앉은 상호에게 물었다.

“쌤 어디 또 가십니꺼?”

“아니. 왜?”

“그럼 이게 다 저희 집으로 갑니꺼?”

“응.”

“왜 이렇게 많이 사셨슴니꺼. 이러면 어무이가 다 알지 않습니꺼. 쌤이랑 지가 어떤 사이인지…….”

당황한 상호는 자신을 향하는 택시기사의 시선을 흘려 넘기고 대답했다.

“형수한테 드리는 거지, 내가 선생이라서가 아니라……. 그랬으면 나빛이한테도 줬겠지.”

“근디 어무이는 쌤이 맘에 안 드나 봅니더.”

“……그래?”

“저번에 오셨을 때 있잖아예.”

지윤이 뒤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때 어무이랑 수영복 사러 갔었거든예. 근디 어무이 표정이 안 좋았습니더.”

“그거야 뭐, 딸이 남자랑 놀러 간다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그리고 눈하고 다리는 우야다가 저래 됐는지 자꾸 물어보시데예. 지는 잘 모르고 헌터니까 몬스터 때문 아니겠냐 했는디, 그 말 듣고는 계속 말이 없드라구예.”

상호는 성철을 떠올렸다.

“……헌터를싫어하시나보네.”

“남자 헌터를 싫어하는 거지예.”

지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저거 드리고 오늘 점수 좀 따이소.”

“무슨 점수를 따…….”

상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어무이~ 야들아~.”

지윤이 보따리를 든 채로 문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방에서 지윤의 동생들이 화닥닥 일어나 달려왔다.

“언니~, 형부~.”

“누나~, 매형~.”

“삼촌이다, 얘들아. 삼촌…….”

현관에 들어선 상호도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지영과 지성을 안아 들었다. 지훈과 지예는 눈인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명절에 가게를 쉬는지 정애도 방에서 걸어 나왔다. 정애는 상호를 보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선생님.”

“예, 어머님. 잠시 들렀습니다. 명절 선물도 드릴 겸 해서.”

상호가 보따리를 가리 키자 정애가 난색을 표했다.

“뭘 이런 걸 사오세요. 선생님한테 선물을 받기는 좀…….”

“그냥 받으세요.”

아이들 앞이라 성철의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었다.

지영과 지성이 보따리를 풀어헤치자 아이스팩을 넣은 한우 선물 세트가 나타났다.

“엄마! 이거 바바!”

“고기! 비싼거!”

두 아이는 고기에 대고 큰절을 했다.

정애는 당황해서 아이들의 엉덩이를 두드렸고, 지윤은 낄낄거리며 보따리들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얘들이 정말……! 손님 앞에서 장난치지 말랬지!”

“야들 뭐 하노. 쌤도 빨리 들어오이소.”

“응.”

상호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애에게 혼이 난 지영과 지성은 훌쩍이며 상호를 올려다보더니 이번에는 그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세배~ 네배~ 다섯배~.”

“여섯배~ 오백배~ 오만배~.”

상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얘들아, 추석에는 세배하는 거 아니야…….”

“몰라! 세배 받아!”

“받아!”

지영과 지성은 쉬지 않고 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애는 아이들을 말리기를 포기하고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황한 상호는 아이들을 멈추기 위해 지갑을 꺼 냈다.

“그래, 그래. 용돈 줄게……. 만원이면 돼?”

“오만배 했으니까 만원 곱하기 오만!”

“지갑줘!”

지영이 지갑을 덥석 잡았다.

날강도 기질 어 디 안 갔구나. 상호는 식 겁하며 지갑을 잡아당겼다.

“안 돼, 지영아…….”

“지갑 조! 카드 조!”

“인생엔 돈보다 중요한 게 많아, 지영아……. 돈 많으면 어따 쓰게?”

“건물살꺼야!”

“그건 내 지갑 가져 가도 못 사…….”

지갑을 꼭 잡고 버티던 지영은 지갑에서 삐죽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하고 쏙 빼갔다.

“아싸! 카드다, 카드! ……어?”

지영이 가져간 것은 체크카드가 아니라 헌터 면허증이었다.

지영은 면허증에 찍힌 상호의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나 이고 가질래.”

“……응?”

“이고 이제 내꼬야.”

상호는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지영이 면허증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일단 지갑부터 주머니에 챙겼다.

“지영아, 그건 팔아도 돈 안 줘. 쓸데없는 거야.”

“그럼 나 조.”

“안돼…….”

“나 조오오오!”

지영은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 팔다리를 구르며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상호는 혜소를 떠올리며 염주를 굴렸다. 비슷한 나이대인데 어쩜 이렇게 정신연령이 다를 수 있는지.

상호의 선물을 정리하던 지윤이 소란을 듣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하이고, 지영아. 떼 좀 그만 쓰라. 으이?”

“언니이! 삼촌이 나 이거 안 조!”

“문디 그러는데?”

지윤은 지영의 손에 들린 헌터증을 보고는 홱 낚아챘다.

“별것도 아닌 걸로 이리 떼를 쓰나. 압수다, 압수. 고기 묵고 싶으면 조용히 하그라이.”

“히이잉…….”

지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울상을 지었다그

상호는 지윤이 도와주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그녀가 주머니에 헌터증을 챙기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윤아?”

“쌤은 어른이 되어 가꼬 이거 하나 못 줍니꺼. 쌤도 압수입니더. 추석 끝나면 돌려줄 텡게 그리 알고 있어예.”

“지윤아……?“

순식간에 동생들과 같은 취급을 당해버 렸다.

지윤은 피식 웃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녀의 대화가 상호의 귀에 들려왔다.

“어무이, 이거 다쌤이산겁니더.”

“알아.”

“좋지 않습니꺼? 와 칭찬 한마디가 없어예.”

“……받는다고 막 좋아하면 안 돼. 엄마 같은 사람은 특히.”

“애들이 뭘 안다고 그럽니꺼. 지도 그런 거 신경 안 쓰는디.”

“하늘이 듣고 땅이 들으니까.”

“아부지가들어도 뭐라 안 할 긴디예. 아부지 친구잖습니꺼.”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 거야. 지윤이 너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마. 헤픈 취급 받는다.”

“꼰대 같은 소리 마이소. 내는 아부지 딸이라 그런 거 모릅니더.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예.”

“그래서.”

정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선생님이 좋니?”

상호는 지영의 등을 토닥이며 모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목이 타서 마른침이 자꾸 넘어갔다.

지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졸라좋습니더.”

대드는 말투였다.

따귀라도 맞는 건 아닐까. 상호는 숨을 죽이며 마음을 졸였다.

한참을 기다리자 정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좋다면 어쩔수없지.”

그 말에 지윤이 웃었다.

상호는 지영에게 비행기를 태워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하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이씨……, 분위기 보니까 그냥 빨리 튀어야겠다.’

저번에 효은과 예경의 일 관련해서 조언 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하려 했는데, 이대로 갔다가는 딸 훔쳐 가는 후레자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지영을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섰다. 지영이 그의 바짓단을 잡고 칭얼거렸다.

“삼촌 어디 가?”

“집 가야지.”

“집 여기야.”

“여기는 지영이 집이고, 삼촌은 삼촌 집 가야지.”

“그니까 여기가 삼촌 집이라고.”

지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방을 향해 빽 소리 쳤다.

“언니! 삼촌 도망쳐!”

“뭐?!”

지윤이 쏜살같이 뛰쳐나와 상호의 검을 뺏으려고 달려들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내공을 뻗어 아이들을 살살 밀어냈다.

“지윤아, 쌤 간다. 헌터증 잊지 말고 꼭 챙겨와…….”

“으달 가입니꺼! 고기를 사왔으면 묵고 가야 할 거 아입니꺼! 글고 세희 사진 지도 봤어예. 뿌린트해서 교장실에 붙여뿔기 전에 곱게 자고 가이소!”

“쌤 태화랑 약속 있어서 그래. 내일도 늦으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

“고기랑은 상관없잖아예! 지금 가삐면 헌터증으로 사채 땡겨 버릴랍니더. 처신 잘 하시라고예.”

법 밖에 사는 사람들이야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지금은 지윤이 무서웠다. 문제는 정애가 훨씬 더 무섭다는 것.

결국 상호는 현관을 나섰다.

“고기 맛있게 먹고, 지윤아. 지영이, 지성이도 잘 있어. 삼촌 갈게.”

“……학교에서 봐예.”

지윤이 눈을 치뜨며 중얼거렸다.

상호는 문을 닫으며 한숨을 쉬 었다. 안도의 한숨이라기 에는 좀 많이 무거 웠다.

‘2학년 되면 좀 나아지려나? 애들도 언젠간 철이 들겠지……. 근데 점점 더 심해진다던데…… 에이, 모르겠다, 나는…….’

세희도 그렇고, 태화도 그렇고, 지윤도 그렇고. 갈수록 아이들이 무서워진다.

그는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으러 도로변으로 향했다.

〈섬으로>

상호는 창밖으로 스쳐 지 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집중하면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건물이 보였다가 숲이 보이고, 가끔은 산과 개울이 보이고. 투명한 남색 하늘의 달은 땅으로점점 떨어져 갔다.

이른 새벽의 열차 안.

상호의 옆에는 태화가 기대어 자고 있었다.

“쿠아…….”

뿔이 상호의 뺨을 쿡쿡 찔렀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예정이라 일찍 출발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남해까지 가서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가, 해가 지기 전에 배를 타고 다시 뭍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낚시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두?. 도구야 배 타기 전에 빌리면 되겠지만, 잡은 고기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섬에 식당이 있으려나…….’

그런 고민을 하는데 태화가 몸을 조금 뒤척이더니 뭐라 웅얼거 리기 시작했다.

“쌤….

“응?”

상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깬 줄 알았는데 잠꼬대인 모양이었다. 태화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쌤 손 개쩔어…….”

“꼬리 터진다……. 흐히히…….”

태화의 꼬리는 그녀 스스로의 허벅지 아래에 깔려 있었다.

저 꼬리는 폭탄 도화선인가. 상호는 살며시 꼬리를 잡아당겨 허벅지 아래에서 빼내 주었다.

그러자 태화가 경기를 일으키며 눈을 번쩍 떴다.

“뜨흡!”

우스꽝스러운 외마디를 내뱉으며.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손등으로 쓱 닦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쌤.”

“응.”

“만졌죠.”

“……응.“

“책임져.”

“뭐를…….”

살랑거 리는 꼬리가 상호의 손으로 쏙 들어왔다.

“시계 반대 방향.”

“……그거 뭐 유행어냐?”

“옛날 영화에서 나오던데. 다 보진 않았지만요.”

태화는 눈웃음을 치며 그의 손안에서 꼬리를 팔딱거 렸다.

그 눈빛에 못 이긴 상호가 한숨을 쉬며 꼬리를 문지르자, 태화가 다리를 비비 꼬았다.

“아 씨 …… 잠 다 잤네. 벌떡 벌 떡 거 리네.”

“……뭐가벌떡거려?”

“꼬리요.”

“……그래.”

상호의 다른 손에서는 염주가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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