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501)

* * *

“네 말대로네.”

예경이 씩 웃었다.

“가족이 동반입대하면 뭍여준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설명을들었으니까요.”

상호는 주머니 에 손을 넣은 채로 툴툴거 렸다.

둘은 병영식당 앞에 줄을 선 채였다. 배고파 죽겠는데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친구랑 동반입대했었거든요.”

“친구는 어디 있는데?”

그녀의 물음에 상호는 말없이 자신의 오른눈을 가리켰다.

예경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상호가 나보다 고참이네.”

“뭔 소리예요. 누난 내 선생님인데.”

상호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다리를 건들거 렸다.

이 씨벌놈의 줄은 대체 언제 줄어드나,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상호는 앞쪽에 쑥 끼어들은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씨발련이 새치기를…….’

참 특이하게 생긴 소녀 였다. 아주 밝은 회색 머 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썹, 눈동자.

그 눈동자는 상호를 보자마자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딱걸렸어, 새끼야.’

상호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하얗던 뺨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니, 새치기가 쪽팔린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소녀가 알아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소녀는 줄에서 비키지 않았다. 그저 이따금씩 상호를 흘끔거리며, 또 가끔씩 볼을 붉히며. 말없이 가만히 멍하니, 눈을 마주쳐 오기만 했다.

하지만 배가 고픈 상호에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아니 새치기를 들켜놓고는 뭘 뻔뻔하게 계속 눈을 마주쳐?’

빡이 돌아버린 상호는 소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뒤에서 예경이 불렀던 것 같지만 그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소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딱두마디를했다.

“야이 씨발련아. 뭘 자꾸 꼬라봐?”

* * *

“……내가 그랬다고?”

당황한 상호에게 효은이 쏘아붙였다.

“그래, 새끼야. 넌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어.”

“아니…… 니가 뭔가 잘못을 했겠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머리채를 잡고 욕을 박았다고? ……잠깐만, 기억났다. 야. 너 그때 새치기했었잖아!”

“새치기 좀 할 수도 있지.”

효은이 토라지며 몸을 홱 돌렸다. 그러면서 이불을 잡아당긴 탓에 세희와 상호의 몸이 이불 밖으로 나왔다.

상호는 이를 갈며 이불을 잡아당겼다.

“야이씨…… 너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진짜 하나도, 하나도 변한 게 없냐! 세희 덮게 이불 내놔.”

“그때 욕한 거 사과해.”

“아오, 언제적 일인데 그거를 가지고 아직도 꽁해서…….”

상호는 세희가 베고 있는 오른팔 대신 왼손을 뻗어, 가운데에 누운 민정을 넘어 효은의 뺨을 살짝 집었다.

세희의 숨이 목 주변을 간지럽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미안해.”

“말로만?”

“그래서 손으로 하잖아.”

“흥.”

효은이 그의 손을 잡아채서 아래로 이끌었다.

“시계 방향.”

“꺼져!”

상호는 손을 흔들어 효은의 손을 떼어내고 다시 똑바로 누웠다. 그런 후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는데, 민정이 갑자기 키득거렸다.

“그러고 보면 둘이 처음엔 남매인 줄 알았지.”

“뭐야, 왜 웃어.”

“아니, 그것 때문에 진짜깜짝 놀랐었거든. 우리 수호부대에 가면 항상 너희 둘이 먼저 씻었잖아. 예경이랑 너랑.”

“……그랬지.”

상호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보급을 위해 최전방 막사에 가면 그와 예경이 제일 먼저 씻으러 달려갔다. 이유는 당연히 사랑에 미쳐서.

민정은 그걸 아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내가 간식 챙겨서 둘이 있는 방에 갔는데…… 둘이 껴안고 뽀뽀를 하고 있는 거야. 침상에 누워서…….”

민정이 웃었다.

“진짜깜짝 놀랐어. 친남매끼리 그러는 줄 알고.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못 하고 꼭꼭 숨기다가…… 나중에야 알았지. 둘이 어떤 사이인지.”

강상호라는 이름으로는 동반입 대를 할 수 없었으니까.

그 때문에 한동안은 백상호로 지냈다. 저승부대에 들어간 후에도 얼마 동안은.

세희가 중얼거 렸다.

“수호부대……?”

아마 어 디선가 들어 본 모양이 었다. 상호는 세희를 내 려다보았다.

“들어 본 적 있어?”

“그런 것 같은데…….”

“교장선생님 있던 부대야.”

그 말에 세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선생님 교장선생님 이랑 아는 사이셨어요?”

“얼굴만. 그때는 이야기는 한 번도 못 했고…….”

상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세희에게는 그 모든 이야기가 정말로 신기한 모양이 었다.

세희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보챘다.

“그래서 그 다음은요? 교생 선생님이랑 만난 후는요?”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오늘은 이만 자자.”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새벽 두 시였다.

“내일도 또 걸어야 돼. 일찍 일어나게 그만 자자.”

“네…….”

세희는 상호가 이불을 덮어주자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 우리도 자야겠다.”

민정도 그의 팔에 머리를 뉘였다. 위팔에 세희. 손목에 민정.

그리고 효은은 그의 손을 밑으로 슬슬 잡아끌며 속삭였다.

“시계 방향.”

“……잠이나처자.”

상호도 곧 눈을 감았다.

* * *

한참 잘 자고 있는데 무언가가 품속에서 뒤척였다. 상호는 눈을 떴다.

아직 한밤중이었다.

“잠이 안 와?”

세희가 살짝 고개를 끄덕 였다.

“어떡하지…….”

상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세희의 볼을 쓰다듬었다.

세희가 상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가 살며시 떼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른스러운 세희에게는 최대한의 어 리광이 었다.

‘어쩜 이리도 예쁘냐…….’

불을 켜지 않아도 빛나는 눈동자.

상호는 무심코 세희의 이마에 입을 맞줬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아이들은 마음을 쉽게 오해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세희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멍하니 상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호는 애써 별것 아닌 척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자.”

세희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네.”

둘은 그렇게 다시 잠에 들었다.

* * *

아침이 되어 일어나보니 세희는 아직 자고 있었고, 효은은 누워서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민정이 씻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효은과 눈을 마주쳤다.

“왜.”

“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묻는다. 결혼한다 만다 한 사이인데도 눈만 마주치면 싸움이 나는 건 여전했다.

효은이 물었다.

“애랑같이 자니까좋던?”

“뭘 좋고 자시고가 있어.”

상호는 살짝 세희의 머리를 받치고 팔을 빼냈다.

간밤에 연락이 온 게 있나 해서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태화에게서 전화와 문자가 수십 통이 와 있었다.

‘뭐여.’

상호는 깜짝 놀라 메세지 앱을 켰다.

-뭐야

-왜 전화 안받는데

-쌤도 나 버리려고?

‘얘가 이젠 말을 놓네

상호는 당혹스러워하며 메세지를 아래로 내리며 계속 읽었다. 위로 갈수록 더 일찍 보낸 내용이었다.

-쌤 어딨어요? 이거 뭐예요?

-또 나만 놔두고 세희랑 놀러 갔어요?

-왜 저만 미워해요? 왜? 왜? 왜…

그 위에 이미지 파일이 하나 있었다. 같은 메세지 앱을 캡쳐한 이미지였다. 세희와 태화의 문자 내용.

거기에는 또 세희가 태화에게 보낸 이미지 파일이 보였다.

그의 팔을 베고 누운 세희가 브이를 하는 사진.

화룡점정은 그 밑에 같이 캡쳐된 세희의 메세지였다.

-ㅋ

‘세희야…….’

상호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안 이 럴 것 같은 애가 어째서.

태화에게서 온 마지막 메세지는 두 시간 전이었다. 밤새 잠도 안 자고 문자만 보낸 모양이었다.

‘지금 전화하는 게 맞나……?’

일단은 문자를 보내는 게 맞겠다. 상호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태화야

그러자 순식간에 답장이 도착했다. 또 다른 이미지 파일이었다.

4명이 있는 단체 메세지 방에 태화가 세희의 사진을 올린 것이었다.

이어서 태화의 문자가 도착했다.

-ㅋ

4명.

상호는 그 숫자를 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좆됐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나빛과 지윤의 문자와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 1초도 쉬지 않고 알림이 떴다.

상호는 아이들 중 어느 누구의 연락도 받을 자신이 없어서.

그냥 전화를 꺼 버렸다.

‘모르겠다. 죽으면 죽는 거지…….’

그는 뇌를 정지시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 * *

“하아…… 드디어 도착했네.”

민정이 멀리에 솟은 학회 건물을 발견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온갖 마법과 교통수단을 이용해 도착한 집.

상호와 세희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호의 등에 업힌 효은만은 멀쩡한 얼굴로 딱히 기뻐하지 않았다.

민정이 상호를 돌아보았다.

“상호랑 세희…… 학교로 돌아갈 거지?”

“그래야지.”

상호는 고개를 끄덕 였다.

“세희 옷도 못 갈아입 었으니까.”

“차 빌려줄까? 누나 차 탈 일 별로 없어.”

“아냐. 그냥 좀 걸을게.”

“많이 걸었는데도?”

“응. 얘나좀데려가줘.”

상호는 민정에게 효은을 넘겼다.

민정의 비행 마법으로 허공에 둥실 뜬 효은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애랑 뭐 하러 가게?”

“그냥 산책좀하려고그런다.”

상호는 혀를 쯧 차고 효은의 볼에 입을 맞줬다.

“갈게. 주말에 보자.”

“입.”

“아오…….”

입에 살짝 키스를 한 상호는 효은과 민정에게 손을 흔들며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둘의 주변에 마나의 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세희는 좀 걷다가 효은과 민정이 공간이동으로 떠난 것을 확인하고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따로 가실 데가 있으신 거예요?”

“아니…….”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학교 가면 죽을 것 같아서……. 세희야, 태화한테 사진 보냈지?”

“아, 네.”

세희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 핸드폰을 꺼 내 들었다.

“답장 왔네요. 죽여버린다고.”

“왜 그랬어?”

“이런 기회 잘 없으니까요.”

상호는 끝없이 쏟아지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세희의 손을 잡고 거리로 향했다.

“좀만 걷다가 들어가자. 애들 점심 먹을 때쯤에 몰래…….”

“네.”

세희는 빙긋 웃으며 그의 팔에 달라붙었다.

〈추석>

“변명은그게 끝?”

태화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덜 데였죠? 우리들 전화 씹으면 어떻게 되는지.”

대형마트의 의류 코너였다. 추석쯤에 바람막이를 사주겠다던 약속을 지키러 나온 것이었다.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아니, 그때는 자고 있었다니까…….”

“그니까 세희랑 잤다는 이야기잖아.”

“원래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니까. 내 실수긴 한데……. 그리고 태화야, 나는 괜찮지만 어른들한테 반말하지 말고 

“나한테는 팔베개 한 번 안 해줬잖아!”

진열대에서 바람막이를 고르던 태화가 발을 구르며 빽 소리쳤다. 상호는 당황하며 태화에게 다가서서 남들의 시선을 막았다.

“남들 다 듣는다, 인마. 조용히 해.”

“자기는 왜 세희만 예뻐해? 왜 다 걔가 먼저 가져가?”

“뭘 자기야! 혼난다. 그리고 그래서 이렇게 너만 옷 사주고 있잖아.”

“어차피 세희가 눈웃음 한 번 살랑~ 치면 홀딱 넘어가서 다 사줄 거잖아? 나는 떼써야 겨우 받는데, 걔는 가만히 있어도 다 받아가잖아?”

“맡겨 놨어? 너 자꾸 그러면 세희만 사준다?”

말이 꼭 쌍둥이 자매를 다루는 듯했다. 그것도 어 린 자매.

하지만 태화는 애가 아니었다. 상호의 말을 들은 태화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바람막이를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그러세요.”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아니……!’

단단히 삐져 버렸다. 상호는 당황하며 태화가 던진 바람막이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물건. 검은 바탕에 위쪽이 붉었다.

‘맘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이거라도 사 줘야지. 에휴…….’

사 주는 건 사 주는 건데. 토라진 건 또 어떻게 달랠까.

그렇다고 한도 끝도 없이 다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태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통화는 연결이 됐다.

“태화야.”

[…….]

물론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 었다.

“솔직히 쌤이 잘못한 거는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떳떳하지만…… 그래도 태화 네가속상해하면 쌤도 속상하다. 화풀어. 응?”

[……치.]

“어떻게하면화풀어줄거야?”

[그럼 내일 나랑놀러 가요.]

내일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문제는 내일 일정이 있다는 것.

“내일은 좀 힘들고…… 추석 당일날 가자. 괜찮지?”

[또세희랑뭐해요?]

“아냐. 다른 일이야.”

뭐만 하면 그쪽부터 의심하는구나.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지금어디야?”

[……밖이요.]

“쌤 살 거 더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네.]

통화가 끊기자 상호는 계산대로 향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