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호의 차는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아스팔트도 없는 흙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계속 들어가다 보니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상호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면 되겠다.”
빽빽하지 않고 적당히 트인 숲이었다. 길이 난 모양을 보니 개벽 전에는 산책하기 좋은 명소로 이름깨나 날렸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곳곳에 보이는 부러진 나무가. 더 이상 한가로이 거날 수는 없는 곳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세희야. 내리자. 누나, 갔다올게.”
“나는?”
효은이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얼굴을 내밀었다.
“난 인사 안 해?”
“……갔다 올게.”
“인사 안 해?”
그녀가 쭉 내민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양손으로 효은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줬다.
“됐어?”
“됐겠냐?”
효은은 창밖까지 몸을 일으켜 상호를 덥석 끌어안고 입가를 아주 침 범벅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호는 기겁하며 그녀를 떼어내고 손수건을 꺼냈다.
“야이씨, 드럽게!”
“뭐? 드러워? 내 침이 더러워?”
“니 행동이 드러워. 넌 대체 왜 이렇게 내 얼굴에 침을 묻히는 거야? 어릴 때는 침을 뱉더니 커서는 아주 핥아 먹네, 어휴
“너도그랬잖아.”
“내가 언제?”
“얼굴 말고, 이 새끼야.”
효은이 눈을 치켜떴다.
상호는 할 말을 잃고 돌아섰다.
“세희야, 가자…….”
아직 심통이 나 있는 세희는 새침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단둘이 된 상호가 그녀의 뺨을 집으며 장난치자 곧 마음이 풀려서는 곁에 꼭 뭍어 걸었다.
상호는 안심하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한 대로, 천색창염에는 정해진 초식이 별로 없어. 기를 다루는 방식이 있지.”
“정해진 자세가 없다는 뜻이에요?”
“응. 자세도 맘대로, 검로도 맘대로. 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큰 틀만 있을 뿐이야.”
둘은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었다. 초가을 숲의 싱그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맞잡은 손에서는 내공이 흘렀다.
“이게 정리를 한 적이 없어서 뭐부터 가르쳐줘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은…… 전투에서 주로 사용하는순서대로 가르쳐 줄게.”
“네.”
“첫 번째는 염마격락이라고 불렀던 기술이야.”
내공의 전달을 마친 상호는 세희에게서 살짝 물러났다. 지금 세희의 몸에는 으급 무예가만큼의 내공이 들어 있었다.
“설명을 해줄 테니까 천천히 따라해 봐. 이 염마격락이라는 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사용하는 기술이야. 주로 헬기에서 공중강습을 할 때 썼어.”
세희의 몸이 살짝 떠올랐다. 상호가 내공으로 들어 올린 것이었다.
“먼저 검을 거꾸로 잡아 봐. 검신이 아래로 오게.”
세희는 그 말대로 했다.
상호는 세희의 자세를 살짝 고쳐 주면서 좀 더 높이 띄워 올렸다.
“칼끝을 발 사이에 끼워. 그 사이로 튀어나오게. 그리고 오른손은 코등이를 눌러. 손아귀가 손잡이에 닿게. 옳지. 왼손은 손잡이 끝을 누르는 거야. 그러면 왼손을 당기면서 오른손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검이 반대로 잡히면서 오른손이 위에 와 바로 잡히겠지?”
세희가 상호의 말대로 검을 바로 잡았다가 다시 칼을 내려 발 사이에 끼웠다.
“그 자세로 떨어지는 거야. 그럼 내공이 어디 있어야겠어?”
“칼끝이요.”
“그래. 왜 그런 자세로 떨어질까?”
“떨어진 다음에 싸우는 건 낭비니까…… 떨어지면서 공격하면 시간도 아끼고 기습도 되니까요.”
“거기에 떨어지는 힘까지 이용할수 있지.”
상호는 세희를 더 높이 띄워 올렸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대화도 잘 안 들릴 정도였다.
“칼끝에 내공을 집중해. 다리 강화하는 것도 잊지 말고.”
“네.”
세희의 칼에 하늘색 강기가 물결쳤다.
내공은 많아도 강기는 아직 액형. 물론 저 나이에 이 정도 강기를 뽑는 것도 상당한 실력이었다.
상호는 그 강기를 올려다보았다.
예경의 것과 꼭 같은 색깔이 었다.
“그대로 떨어지면서, 착지 직전에 칼끝의 내공을 땅에 폭발시키는 거야. 잘못 해도 되니까부담 없이 해봐.”
그가 내공을 거두자 세희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희는 침착하게 자세를 유지했지만, 방향은 살짝 틀어졌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머 리를 긁적였다.
‘아, 깜빡했다……, 천근추를 안 가르쳐 줬구나.’
천색창염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기초적인 기공을 신경 쓰지 못했다. 천근추가 병행되어야 제 위력이 나오는데.
그래도 실전이 아니니까, 세희가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세희의 칼끝이 땅에 닿았다.
파아악
칼이 땅을 파고드는 동시에 흙이 비산했다.
작은 충격파가 터져 나가며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세희의 주변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나뭇잎들 사이로 세희가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제대로 된 거예요?”
“응. 그렇게 하면 돼.”
상호는 검을 뽑았다.
“시범 한 번 보여줄게. 초강기로 하면 어떻게 되는지.”
저 혼자 공중에 떠오른 검이 검푸른 불꽃에 흽싸였다.
상호는 검을 떨어뜨리기 전에 세희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가까이 와. 위험하니까.”
세희는 상호에게 딱 뭍어 섰다.
상호는 자신과 세희의 몸에 호신강기를 펼쳤다. 같은 심법을 배워서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다룰 수 있었다.
그는 아예 품에 안겨들려고 하는 세희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위력을눈으로 봐야지.”
“앗, 아차…….”
세희는 당황하며 뒤로 돌아 검을 마주했다. 상호는 세희에게 씌운 호신강기를 확인하고 검을 떨어트렸다.
한순간이었다.
검푸른 빛 한 줄기가 반짝이더니.
꽈르릉’
천둥 소리와 함께 천지가 뒤집혔다. 흙이 위로. 나무가 아래로.
굽이치는 토사의 파도가 둘을 휩쓸고 해를 가렸다. 충격은 잠깐이었지만 땅은 눈을 몇 번 깜빡일 동안이나 너울거렸다.
이윽고 파도가 멈추고 흙먼지까지 다 가라앉았을 때.
둘의 눈앞에는 거대한 구덩이와 박살이 난 일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희는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끔뻑거 렸다.
“……선생님.”
“응?”
“두 분은…….“
상호는 세희의 볼을 문질 렀다.
“걱정 안 해도 돼. 보통 사람들이 아니 니까.”
효은은 이제 보통 사람이지만, 민정은 엄연히 그와 같은 수준의 강자. 이미 거대한 마나의 움직임을 느꼈을 테고. 느끼지 못했더라도 어지간한 무예가보다 빠른순발력으로 방어 마법을 펼쳤을 터 였다.
겨우 이런 기술에 당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 었다.
“자, 오늘은 염마격락만 배우고, 이제 운기조식…….”
핸드폰 벨소리가 상호의 말을 끊었다.
꺼내 보니 민정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어, 누나.”
[상호야…….]
민정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상호는 깜짝 놀라 차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뭐야, 누나. 괜찮아?”
[상호야, 누나 깜짝 놀랐어…….]
“아, 그냥 놀란 거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효은이도 괜찮지?”
[응. 효은이는 괜찮은데…….]
말을 질질 끄는 것이 어째 불안했다.
“괜찮은데 뭐? 시원하게 말을 해 봐.”
[네 차…….]
상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민정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효은이만 신경 쓰느라……. 네 차를 못 지켰어…….]
눈앞이 캄캄했지만, 상호는 간신히 대답했다.
“아냐, 누나……. 누나가 뭔 잘못이 있어. 내가 부순 거지…….”
[우리 어떡해……? 여기서 집까지 공간이동하기는 너무 먼데…….]
“나도 몰라…….”
택시도 없고 버스도 없는 곳인데. 상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전화에 대고 말했다.
“일단 와 봐. 아직 차 안에 있어?”
[응……. 흙에 파묻혔어…….]
“그쪽으로 갈게. 나올 수 있으면 나오고.”
[응…….]
민정이 전화를 끊었다.
상호는 자신의 차가 있던 방향으로 걷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세희를 돌아보았다.
“세희야.”
“네.”
“오늘…… 외박해야 될 것 같다.”
“네.”
세희는 태연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 려 좋다는 표정이 었다’.
상호는 한숨을 푹푹 쉬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잘됐지 뭐…… 이제 애들 편히 타게 큰 차 사야지…….’
〈외박>
멀리 온 김에 수업은 해야 했다.
상호는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세희를 지켜보다가, 멀찍이서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효은과 눈이 마주쳤다.
효은과 민정은 반파된 차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뭐야, 왜.”
상호가 다가가자 효은은 그가 코앞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저 애, 언니랑같은무공이야?”
아까 강기 수련을 시킬 때 색깔을 본 모양이 었다.
“응.”
“지윤이도 무예가잖아. 걔도 그거야?”
“아니, 지윤이는 성철이 형 무공 찾아서 가르쳐 줬지.”
“그럼 언니 무공은 저 애만?”
“응.”
그 대답에 효은은 물끄러미 세희를 쳐 다보았다.
“어지간히도맘에 들었나봐?”
상호는 당황해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제자로서 말하는 거지? 당연히 마음에 들지. 착하고 성실하고…… 가끔 무서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제일 열심히 하는 아이니까.”
“아니 뭐라는 거야. 여자로서 마음에 드냐고.”
“맞을래?”
아니길 바랐는데 진짜 그쪽일 줄이야. 상호는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효은은 뻔뻔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 었다.
“아니야? 네가 진짜 그냥 선생과 제자로서 그 소중한 무공을 물려준 거야? 세상에 언니랑 너밖에 모르는 그 무공을?”
“그럼안되냐?”
“그럴 거면 그냥 남들한테도 공개하지 그래? 그편이 더 개발하기 쉽잖아. 사실은 저 애랑 평생 볼 생각하고 알려준 거 아냐?”
효은의 말이 맞았다.
평생 볼 생각으로 알려줬다. 하지만 그만큼 아끼는 제자여서이 지 남녀로서 사랑할 생각은 아니었다.
상호는 가만히 고개를 저 었다.
“그냥 제자야. 사제관계일 뿐이라고.”
“사제끼리 관계하려는 게 아니고? 그게 네 취향이잖아.”
“야이씨…….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너 지금 내가 세희한테 어떻게 해보려는 거란 소리야?”
상호가 화를 내려는 기색이 보이자 효은은 시선을 피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니, 난 딱히 상관없는데, 네 마음을 똑바로 하라는 소리야.”
“무슨 마음을?”
“저 애랑 말할 때 눈에서 꿀이 떨어지드만.”
“니가 잘못 본 거야.”
“언니랑말할때처럼.”
효은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상호의 속이 울컥 들끓었다.
“내가너는그렇게안봤어?”
“응. 너 나 볼 때는 안 그랬는데.”
“질투하는 거야? 저 어린애를?”
“응. 니가 날 안 보잖아.”
“지금 보고 있잖아. 내가 널 안 본다고?”
상호는 양손으로 효은의 얼굴을 감쌌다. 눈빛이 뜨겁게 이글거 렸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 럼.
효은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따졌다.
“너 민정이 언니랑 했다며, 이 새끼야.”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상호는 찍소리도 못하고 오0패를 당했다.
“……죄송합니다.”
“언니가 좋은 거 해 줬더라? 근데 뭐? 효은이는 이런 거 못 한다고 좋아했다면서?”
“그런 적은 없어, 누나가 그렇게 말했지…….”
대체 왜 말한 걸까. 상호가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보자 옆에서 듣던 민정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상호 네가 그랬잖아. 가촉끼린 비밀 없는 거라고.”
“아니, 누나가 먼저 비 밀로 하자고 했잖아!”
“생각이 바뀌었어. 그냥 효은이랑 나눠 갖기로.”
“뭘 나눠? 미쳤어?”
“이미 효은이랑 이야기 끝났어.”
민정은 보닛에서 일어나 상호를 향해 다가왔다.
“우린 다 가족이니까, 그냥 집 넓은 거 사서 같이 살자더라. 나도 효은이도 돈 많으니까.”
“아니 시 바…… 돈은 이제 나도 많아! 그게 문제가 아니 라고.”
“요일도 다 정했어. 일화목요일이 효은이, 월수금요일이 나. 토요일은 일요일 전날이니까 특별히 둘이서…….’
“……둘이 나 놀리는 거지?”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효은과 민정에게서 뒷걸음질쳤다. 이제는 효은까지 일어나서 그에게 걸어오며 물었다.
“세희 저거 끝나려면 얼마나 걸려?”
“두 시간…….”
“두 시간이면 너 40번 하잖아.”
“내가 무슨 3분카레냐?”
보이지 않는 힘 이 옥죄어 왔지만. 상호도 이 번에는 손에 강기를 두르고 손날로 민정의 마나를 끊어 냈다.
그래도 둘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왔다.
“야이씨…… 저리 안 꺼져! 누나는 또 뭘 하러 오는 거야. 뭘 어쩌려고!”
“잠깐이면 괜찮지 않을까, 상호야?”
“애가 저기 있잖아……! 나중에. 나증에 누나 집 가면 많이 해 줄게. 응? ……야, 닌 씨발 귓구멍이 막혔냐!”
“싫으면 때려. 때리라고. 때리라니까? 못 치잖아, 븅신.”
효은과 민정은 상호를 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