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501)

* * *

2교시는 성의 문화에 대한 수업이 었다. 강사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자, 지금부터는 학생들한텐 증요한 이야기예요. 지금 남자친구 있는 사람?”

태화의 손이 위로 번쩍 올라갔다.

그러자 세히가 혀를 차며 그 손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태화가 눈을 부라렸다.

“왜! 니가 뭘 알아!”

“23살에 안대 쓴 남자잖아. 남친 아니잖아.”

“아니거든? 존잘에 복근빵빵하고 여자 패고 욕하는 나쁜남자거든? 내 남자 맞거든?”

“그래? 그럼 그 남잔 너 가져. 난 착하고, 배려심 많고, 뭐든 다 가르쳐주면서 만날 때마다 웃어주는 남자 가질 테니까.”

“들었죠? 쌤 들었죠? 세희한텐 아무것도 해주지 마요, 이제.”

태화가 의기양양해하며 상호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상호는 세희와 태화에게서 슬금슬금 떨어지며 말했다.

“난 니들이 누구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가 다가앉은 곳은 나빛의 바로 옆이었다. 나빛이 빙긋 웃었다.

“여자한테 수갑 채우고 목줄 채우는 남자 말하는 거 아니 에요?”

그걸 여기서 말하면 어떡하냐. 상호는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목줄은 내가 했다고!’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TV 옆에 선 강사도 대충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곤란한 듯 웃었다.

“어쨌든…… 요즘은 청소년들도 일찍 사랑을 하죠? 하지만 사랑에는 책임이 따라야 해요. 제일 먼저 정신적으로 성숙해야 하고, 금전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죠. 그러니까 어른이 되기 전에는 자제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피임은 꼭 해야 해요. 모든 준비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럼 돈 많은 남자 만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태화가 손을 들고 물었다. 굳이 상호 쪽을 돌아보며.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인마, 애는 너한테 생기는 거잖아. 남자가 도망치면 어떻게 해…….”

“흠……. 일단 생기 기만 하면 절대 안 도망칠 것 같은데.”

무서운 소리를 서슴없이 한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상호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 리며 태화에게 앞이나 보라고 손짓했다.

강사가 말을 이 었다.

“피임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제일 먼저 반영구적이냐 일시적이냐로 나눌 수 있고, 여자가 하느냐 남자가 하느냐로 나누기도…….”

TV에 여 러 가지 피 임 방법 이 떴다. 지윤이 그중 하나를 보고 눈을 끔뻑 였다.

“어, 저거 봤는디.”

“응? 어디서?”

나빛이 묻자 지윤이 술술 대답했다.

“어릴 때 부모님 침대 서랍에서. 근디 지금 보니까 싸구려였는갑다. 넷째가 그때쯤에 생겼응게…….”

“그러면…… 원래는 셋째까지만 생각하셨던 거야?”

“모르제. 근디 아마 그랬을기다. 그때도 잘 살진 않았고. 근디 어무이 아부지가 그런 데까지 돈을 안 쓰진 않았을 긴데…… 아부지가 쫌 쎄게 했나뿌다.”

어쩌다 보니 성철의 정력까지 알게 되었다. 상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강사의 말을 경청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지만.

수업 이 끝나자 강사가 노트북과 TV의 연결을 끊으며 말했다.

“교육은 여기까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말이 남았어요.”

“잘 들어.”

상호는 태화의 등을 살짝 쳤다.

강사가 말을 이 었다.

“이 모든 교육은 결국 여러분의 행복을 위한 거예요. 인생은 길게 봐야 해요. 잠깐의 쾌락에 눈이 멀어 인생의 행복을 뒤로하면…… 후회하게 되는 거죠.”

강사는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이 잠깐의 쾌락에 집증하는 사람은…… 어느 날 실수해서 아이가 생기면, 두 가지로 나뉘어요. 하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아이를 책임지는 사람, 다른 하나는 또 인생을 길게 보지 못하고 잠깐의 쾌락을 위해 아이를 버리는 사람. 금전적인 사정이 되지 않아 정말 어쩔 수 없이 아이와 이별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그 또한준비를 하지 않고 선택을 한 결과죠.”

세희와 태화의 기척이 조용해졌다.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강사의 말을 듣기만 했다.

상호는 눈을 감았다.

‘태화는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

그에게는 태화의 어머니가 찍은 태화의 사진첩이 있다. 그 사진들 중 하나는 태화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인형 속에 넣어 생일 선물로 주었고.

하지만 세희는 부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버린 아이를 잊지 못하고 다시 찾는 부모도 있어요. 그나마 다행이죠. 하지만 슬프게도, 그렇지 않은 부모 또한 많아요. 그저 자기 편한 대로 살려고, 잠깐의 쾌락만 좇으며, 인생은 생각하지 않죠. 그런 사람은 사실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게 되는 거예요. 찾아와도 느끼지 못하고.”

강사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여러분은 되도록이면 준비를 다 하고 선택하세요. 실수한 사람들이라고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분명 힘겨운 길이니까.”

강사가 노트북을 챙기고 문으로 걸어갔다. 상호는 아이들과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강사는 손을 흔들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태화가 벌떡 일어나 상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 예습 끝! 실습 시작!”

“얌마, 지금까지 뭐 들었어!”

상호는 식겁하며 태화의 뿔을 잡았다. 태화가 그의 가슴팍을 향해 뿔을 억지로 밀어붙였다.

“맨날 그랬잖아요! 쉬지 않고 연습! 언제나 실전처럼!”

“야이씨…… 뿔 뽀개버 린다! 저 리 안 가!”

“그럼 실습 말고 복습! 교보재 확인!”

“교보재는 뭔 놈의 교보재……

상호는 떼를 쓰는 태화를 옆으로 던져버리려다가, 세희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안심했다.

‘그래, 답 없는 문제로 고민하지 말아…….’

세희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알 방법은 없겠지만.

별안간 태화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확 타올랐다.

“내가 쌤 말고 누구한테 배워요! 빨리 교보재 내놔요!”

“내가 물건이냐! 선생님은 교보재가 아니야!”

“아니야! 쌤은 교보재야아아!”

“아오……

〈지키지 못했다>

“이겼다~!”

나빛은 잔뜩 신이 나서는 가슴 앞에 모인 주먹을 앞뒤로 흔들고, 허공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등에서는 사람 팔 정도 길이의 황금빛 날개가 방정맞게 파닥거렸다.

그 아래 땅에는 세희가 쓰러져 있었다.

“끄응…….”

땅에 교차된 채로 박힌 성창들이 세희의 팔. 다리,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었다. 총 열 개. 이제는 창날도 생기고 복잡한 장식도 생겨서 효은의 성창과 완전히 모양이 같았다.

날아갈 듯이, 아니 실제로 날면서 기뻐하던 나빛은 곧 정신을 차리고 성창을 거뒀다.

“미안해, 세희야……. 널 이기니까 너무 기뻐서…….”

“아냐. 뭘 미안해. 이기면 좋은 게 당연하지.”

세희가 땅에 내려온 나빛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빛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날개를 만들고, 성창을 늘리고. 이제는 세희를 손쉽게 이길 정도로 강해졌다. 그런 나빛의 변화가 상호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마 효은이 천사화에서 벗어난 만큼 다른 이들의 천사화가 가속되는 것이리라. 하나 다행인 점은, 성창 몇천 개를 다루는 효은에 비하면 나빛의 성력은 아직 민망할 정도로 보잘것 없다는 것이 었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보다는 훨씬 강했다. 1학년 1등인 세희를 찍어누를 정도로.

세희는 충격이 컸는지 검을 칼집에 거꾸로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칼날의 방향을 반대로 해서.

“세희야. 칼뒤집어야지.”

“네? 앗…….”

상호의 말에 세희가 정신을 차리고 검을 바르게 집어넣었다.

터덜터덜 다가오는 걸음에서는 상실감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상호는 가까이 다가온 세희와 나빛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해줄 게 별로 없다. 이제 나빛이가 너무 세네.”

나빛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 었고, 세희는 더 풀이 죽었다.

“나빛이는동체시력 계속훈련하고, 세희는…… 경공 연습 많이 해. 제일 기초적이고, 제일 중요한부분이니까. 다음. 태화. 지윤.”

세희는 스탠드에 앉아 넋이 빠진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나빛이 끌어안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세희야~ 미안해…… 미안해

“됐다니까…….”

세희도 나빛에게 머리를 기대고 중얼거렸지만, 손은 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상호는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 렸다.

‘가만히 놔두면 또 밤까지 수련하겠네…….’

* * *

역시나였다.

밤에 나와 보니 세희가 이를 악물고 운동장을 질주하고 있었다. 하얀 뺨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상호는 멀찍이서 검을 짚고 서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저러다또쓰러질라…….’

보다 못한 그는 운동장을 향해 다가갔다.

“세희야.”

신나게 달리던 세희의 발이 우뚝 멈줬다. 세희는 상호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다가 곧 후다닥 달려왔다.

“네.”

“쉬자. 쉬면서 단전 수련하자.”

이럴 줄 알고 마실 물과 수건을 가져왔다. 상호는 수건에 물을 적셔 세희의 얼굴과 목을 닦았다.

“경공 수련이야? 그러면 이렇게 오래 달리지 말고 짧게 왔다갔다를 하지 그랬어.”

“네. 그런데 더 오래 수련할 수 있게 지구력을 기르고 싶어서…….”

“얼마나 했어?”

“저녁 먹고 지금까지요.”

지금은 9시 반. 저녁은 7시 전에 먹었을 테니 두 시간 동안 뛰기만 했다는 소리였다.

상호는 혀를 내두르며 스탠드를 가리켰다.

“가서 앉자.”

자리에 앉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손에서 손으로 내공이 흘렀다.

‘제법 많이 들어가네.’

세희의 단전은 그동안 점점 커져서, 이제는 으급 무예가에 맞먹는 크기가 되었다.

다만 그것은 그릇일 뿐. 그녀가 품은 내공은 평범한 아이들의 평균을 겨우 따라잡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예전에 상호가 내공을 약간 나눠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준비가 되었다.

“세희야.”

“네.”

“주말에 시간 있어?”

“네.”

“주말에 저기 강원도 좀 같이 가자. 동쪽 끝자락으로.”

그 말에 세희가 눈을 끔뻑였다. 상호는 설명을 너무 안 했다는 것을 깨닫고 부연했다.

“그쪽은 마나가 좀 많거든. 거기서 운기조식도 하고, 사람 없는 곳에서 초식도 좀 가르쳐주고 하게. 이런 데서 가르치긴 위험하니까.”

세희가 눈을 반짝였다.

“둘이 가요?”

“응. 둘이 가자.”

상호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가 지금 세희와 가려는 곳은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곳이라, 아이들을 여럿 데려가면 따로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또 세희에게 천색창염에 대해서 알려주기도힘들어진다.

세희의 눈은 이제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는 데 오래 걸리겠네요?”

“좀 걸리지. 그래서 아침 일찍 가려고.”

“운기조식도 오래 걸리겠네요?”

“그렇겠지.”

“그럼 하루종일 같이 있는 거네요?”

“그……렇겠지.”

상호는 볼을 긁적였고, 세희는 빙긋 웃었다.

“그럼 좋아요.”

그리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서 학생과 이러고 있으니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도 떨어지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오늘은 옛날이야기 안 해주세요?”

“응? 아, 그래. 그게…… 어디까지 말했더라?”

“스승님 이 랑 몬스터 잡으러 돌아다녔다고 하셨어요.”

“아, 맞아. 그때가 이제 이계전쟁이 터지기 직전이었거든. 그땐 무슨 몬스터들이 돌아다녔냐면 

* * *

주말.

상호는 운전석 차창 밖을 쳐다보며 능청을 부렸다.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지어내며.

“이야~ 단풍 많네. 세희야. 단풍 좀 봐라.”

“뭘 많아. 븅신아. 아직 물도 안 들었구만.”

조수석에서 효은이 핀잔을 주었다.

그 말대로 창밖의 산에는 붉거나 누른 나무가 하나도 없었다. 아직 9월 초밖에 안 되어서 그런 듯했다.

상호는 끽소리도 못하고 쭈그러들어서 가만히 차를 몰았다. 백미러에 비친 뒷좌석에 세희와 민정이 보였다.

세희는 그녀답지 않게 뾰로통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미안하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 며 속으로 빌었다. 선약이 있다는 걸 깜빡했다.

사실 제자랑 데이트를 할 것도 아닌데 미안해하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화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자꾸 졸아들었다.

옆에서 효은이 물었다.

“갑자기 강원도는 왜 가는 거 야?”

“세희 운기조식 시키 려고.”

“거기 가면 뭐가 달라져?”

“마나가 많으니까.”

하지만 세희 때문만은 아니 었다. 상호는 백미 러로 민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차를 모는 도로는 동해고속도로. 이대로 직진하면 다혜가 몬스터에게 공격당했던 곳이 나온다.

민정에게는 이미 다 알려줬다. 다혜의 일, 영주의 말.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민정은 일단 현장에 가 봐야 알 것 같다고만 대답했다.

그래서 거기로 가는 중이었다.

민정은 상호와 눈을 마주치고는 세희에게 휴게소에서 산 호두과자를 내밀 었다.

“세희야, 자.”

“괜찮아요.”

“너 그렇게 말라서 어떡해. 이런 거라도 자주 먹어.”

“다이어트중이에요.”

상호는 당황해서 백미러로 세희를 쳐다보았다.

“세희야, 더 찌우기로 선생님이랑 약속…….”

“약속했었어요?”

그래서 넌 약속 지켰냐, 대충 그런 뜻이었다. 상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없이 차를 몰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호가 찾던 곳이 나타났다. 우그러진 표지판, 박살 난 가드레일과 펜스. 그리고 굴러다니는 화물차의 파편.

상호는 효은과 세희를 돌아보며 차 문을 열 었다.

“둘은 여기 있어. 누나.”

민정이 그를 따라 내렸다.

둘은 도로를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흔적이 별로 없네.”

민정이 중얼거 렸다.

상호는『‘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흐를 정도로 쏟아지던 피. 걸레짝이 되어 여기저기 널려 있던 육편.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1년이 다 되었으니, 썩거나 지나가던 들짐승들이 주워 먹었을 것이다.

“마법으로 탐지되는 것도 없어?”

“응.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나 봐.”

“……일찍 왔어야했나?”

상호는 양손으로 머 리를 감싸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를 민정이 다가와 살포시 끌어안았다.

“한두 명이 아니 었잖아. 뒤섞여서 일찍 왔어도 못 찾았을 거야. 그리고 살아 있다면서.”

“난 그 인간 말 안 믿어. 뭔가…… 뭔가 답이 있지 않을까 해서 와본 것뿐이야.”

“나도 영주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야.”

민정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나도 안 잊었어. 내 친구 죽은 거…….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할사람은 아니야.”

“……잘 모르겠어.”

상호는 깊은 한을 담아 나직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알았어. 여긴 더 있어 봤자 의미 없겠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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