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501)

* * *

“다녀왔습니다.”

혜소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절처럼 생긴 건물이지만 절은 아니었다. 오방색으로 칠해진 기둥과 천장의 문양, 그리고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살을 댄 창호들.

문풍지를 바른 문짝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서 들어와.”

젊은 남자 목소리 였다. 혜소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운 방에 한 청년이 높은 단을 앞둔 채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혜소처럼 회색 장삼을 입었고, 완전히 밀어버린 혜소와는 달리 아주 짧은 머리카락을 남겨 두었다.

“잘 갔다 왔니?”

목소리는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혜소는 방긋 웃었다.

“네.”

“고맙다. 추웠을 텐데. 들어가서 쉬어. 불 때워 놨다.”

“네, 거사님.”

혜소는 곱게 대답하며 영주가 마주한 단을 쳐다보았다. 단에는 촛불이 아주 많이 놓여 있었다.

대충 200개 남짓. 일일이 세어 본 적은 없지만 위치는 외우고 있었다. 아마 하나가 늘어난 것 같았다.

“거사님.”

“응.”

“하나가 늘었나요?”

“혜소는 참 눈이 좋구나.”

미동도 없이 대답하는 영주의 앞에는 깨끗한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 리였다.

“염주는잘전해 줬니?”

“네.”

“버리진않았어?”

“손목에 차셨어요. 별로 내키는 기색은 아니셨지만…….”

“차긴 찼구나. 다행이네.”

영주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혜소는 골방으로 걸어 가다가 아까 상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거사님.”

“응?”

“그분께서는…… 왜 거사님을 미워하시는 거예요?”

“때가 되면 알 거야.”

자주 하는 말이 었다.

혜소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영주가 좋은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오늘 만났던 사람도 따뜻한 사람이 었지만. 영주는 훨씬 더 좋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굳게 믿었다.

“두 분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죠?”

“……역시 눈이 좋아. 혜소는.”

영주는 나지막이 중얼거 렸다.

“조금.”

“조금 오해가 있는 거죠?”

“응.”

혜소에겐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들어가 있을게요, 거사님.”

“응, 쉬어라.”

혜소는 그 말을 남기고 골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남겨진 영주는 멍하니 211개의 촛불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미동도 없。].

5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그교육>

살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거짓인지 참인지는 모르고, 설령 참이라 해도 걷는 속도가 일반인과 다름없는 그의 몸으로는 찾아다닐 수도 없었다.

건흠에게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중요한 내용을 무당새끼가 알려줬네 도사새끼가 알려줬네 했다가는 죽빵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부탁할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 찾는 거 도와달라고?]

“응.”

상호는 침대에 누운 채로 뻔뻔하게 대답했다.

“노는 헌터 많잖아. 좀 풀어 봐.”

[헌터가 다 내 꼬붕이냐? 임마,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힘들지…….]

“정령사들 시키면 되는 거 아냐? 사람 잘 찾지 않아?”

[그래도 어딨는지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찾는 거는…… 정 령들도 파업하겠다, 야.]

전화 너머에서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여유가 생기면 도와주겠다만…… 당장은 힘들어. 태풍 피해 때문에 정령사들도 바쁘고……. 내가 아는 정령사들한테 한번 부탁은 해 볼게. 근데 그거를 영주가 말해줬다고?]

“어.”

[만났어?]

“아니. 돌보는 애가 있는 모양이던데. 그 애가 날 보러 왔더라고.”

[그래……? 흠.]

영주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도현은 그래도 영주와사이가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 역시 주술사는 쉬이 믿지 않았다.

[뭐 사람 살리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주겠지만…… 1년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 그런 말을 들어도…… 확률로만 따지면. 무리지. 너도 알고 있지?]

“알지.”

[그리고 또 다르게 생각해서,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살아 있다면…… 이미 안전한 곳에 있다는 소리 아니겠냐.]

“그랬으면 학교로 돌아왔을 거 아냐.”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영주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둘 중 하나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거나, 길을 잃고 아르게스 깊이 들어가서 헤매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두려운 이야기 였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감쌌다.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무서웠다. 움직일 수 없는데도 1년 동안 먹고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은.

감금을 당했거나.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뜻.

“그 말대로라면…… 그 사건이 일어났던 주변을 찾아다니는 건 의미가 없겠네.”

[그렇겠지.]

도현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았어. 현실적으로 힘들겠네. 그래도…… 뭔가 방법이 생각나면 좀 도와줘.”

[그래. 교사 일은 잘 하고 있냐?]

“나야 뭐 늘 잘 하지. 형은…….”

그 말을 하다가 민정이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알아서 잘 하겠지, 뭐.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해.”

[내가 할 말을 왜 네가 해? 그래도…… 알았다, 인마. 잘 지내.]

도현이 통화를 끊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하고 싶은데 할 수는 없는 이 무력감.

‘……지금 애들한테나 집중하자.’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다음날.

출근해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설미가 자기 자리의 의자를 어딘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아, 상호 씨 왔어?”

설미가 의자를 잠시 내 려놓았다.

“오늘 외부강사 오잖아. 성교육.”

“그건 아는데…….”

“교사도 들어야 돼. 그래야 평소에 애들이 물어봐도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배울 거 아냐. 특히 상호 씨 같은 남선생은 더더욱.”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상호는 교무실로 들어가 자신의 의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다른 한 손으로 검을 짚으며 교실로 향하는데 한숨이 푹푹 나왔다.

‘교무실에서 쉬는 줄 알았는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들 넷이 이미 등교해 있었다. 아이들이 그의 손에 들린 의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기 머입니꺼?”

“선생님도교육 들으세요?”

“쌤이 실습 해주는 거예요?”

“……태화야.”

상호는 의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쌤이 소원이 하나 있다.”

“네? 뭔데요?”

“오늘 하루만 조용히 해주면 안 될까?”

“그럼 쌤은 뭐 해줄 건데요?”

“소원권 줄게.”

“에이, 그러면안들어줘요.”

소원권을 뿌려댔더니 이제 하나쯤은 버려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당황하며 다시 말했다.

“두 개. 두 개 줄게.”

“에이, 개수가 문제가 아니라요. 맨날 소원 말하면 그건 안된다~, 그건 안된다~, 이러면서 자꾸 빼잖아요.”

“……그러면 뭘 해줘.”

“단둘이 섬 가서 1박 2일.”

태화가 씩 웃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켰다.

‘병가를쓸까…….’

“또 도망칠 생각하죠?”

태화가 정곡을 찔렀다.

상호는 그 말에 살짝 오기가 솟아서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어른이 되어가지고 애한테 지고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태화가 어떤 곤란한 질문을 하든 올바르게 알려주면 된다.

“뭘 도망쳐, 인마. 됐어. 너 맘대로 해 봐. 기껏 소원권 하나주려고 했더니…….”

“그럼 가운데 앉으세요. 멀리 가지 말고.”

태화는 책상의 오른쪽을 두드렸다. 나빛이 있는 방향이었다.

상호는 의자를 띄워 태화와 나빛 사이에 놓았다.

‘할테면해보라지, 뭐.’

* * *

성교육은 1교시와 2교시. 1교시에는 성의 과학, 2교시에는 성의 문화.

교실 앞에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강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노트북이 연결된 TV로 해부도를 띄우며.

“이 포피는 나이가 들면 저절로 분리가 돼요. 다만 소수의 경우에는 나이가 들어도 분리가 되지 않는데, 과거에 이를 수술로 해결하던 방식이 흔히 고래를 잡는다고도 표현하는…….”

“쌤도 포경 했어요?”

태화가 상호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거 남한테 묻지 마.”

“왜요? 강사쌤이 시작할 때 그랬잖아요. 성을 무조건적으로 터부시하는 건 잘못된 거라고.”

“그런 건 성이고 자시고가 아니라 프라이버시야, 인마. 철 좀 들어.”

“치, 나보다영어못하면서.”

“얌마…….”

너도 중학교 때 공부 안 하지 않았냐, 그리 말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수업 시간이었다.

상호는 말을 끊고 강사의 말에 집중했다.

“여기에 오랫동안 배출되지 못한 정자가 쌓이면, 남자의 몸은 이걸 어떻게든 배출시키기 위해 잘 때 뇌에 성적 자극을 보내게 되는데…….”

“쌤도 몽정 했어요?”

이번 질문은 그래도 대답할 만했다. 상호는 작게 중얼거 렸다.

“그걸 안 해본 남자는 없어.”

신체구조 상 한 번쯤은 하게 되어 있다. 기억을 못 하는 사람이 있을 뿐.

그런데 태화의 질문은 끊이질 않았다.

“꿈에 누구 나왔는데요?”

“……기억안나.”

“요즘도 해요?”

“아니.”

“왜요?”

“왜요는 뭐가 왜요야! 수업이나 들어.”

이유야 당연히 주말마다 효은을 만나기 때문이었지만. 당연히 때려죽여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상호의 옆에서는 나빛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TV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

“어, 응, 나빛아. 왜?”

“학이라면서요…….”

그를 돌아보는 나빛의 눈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응?”

“학이 물어다준다면서요…….”

상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 그거는그러니까…….”

“거짓말하셨어요…….”

“그게, 어, 그, 비유지. 비유. 예로부터 학이라고 하면 소원과 정결하고 드높은 기상을…….”

자신이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지어내기에 바빴다. 나빛은 허둥대는 상호를 보며 코를 훌쩍였다.

“선생님도 저 놀리시는 거죠……?”

“내, 내가 나빛이널왜놀려.”

“다른 애들처럼 저 바보라고 놀리는 거죠? 놀리면 재밌어요? 나는 그런 사람 싫어요…….”

“뭐? 다른 애들이 놀려? 야, 너희들 나빛이 놀렸어? 너희 혼날래?! ……앗, 죄송합니다, 강사님. 수업 계속해 주세요.”

무안해진 상호는 괜스레 아이들에게 화를 내다가 더 무안해져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 태화가 또 물었다.

“쌤 것도 저렇게 생겼어요?”

상호는 무심코 TV를 보며 모양을 비교했다가, 곧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더 숙여 책상에 머 리를 박았다.

‘내년엔…… 병가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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