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501)

* * *

상호는 아이를 교무실로 데려와 의자에 앉혔다.

담요를 덮어 주고 차를 타서 가져다주는데, 마침 들어서던 설미가 그와 아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상호씨. 누구야?”

“몰라요. 누구 찾아왔다는데.”

상호는 그리 대답하고 다시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이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뭐여, 왜 이래.’

그는 멍청히 눈을 끔뻑이다가 물었다.

“그래서 누구 찾아왔어?”

아이의 짧은 검지가 상호의 얼굴을 향했다.

상호는 당황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

“네. 상호 아저씨.”

아이는 차를 홀짝이며 웃었다.

이 아이를 전에 본 적이 있던가.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생각나지가 않았다. 분명 예닐곱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전쟁 후엔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폐인처럼 살았으니 누군가를 만날 일도 없었고, 만났다면 분명히 기억이 날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모르겠다. 상호는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우리가 본 적이 있던가?”

“아니요. 거사님이 부탁하셨어요.”

“거사님?”

스님도 아니고 도사님도 아니고 거사님이라니. 어리둥절해하는 상호에게 아이가 그 이름을 전했다.

“함자가 손 영자 주자 되세요.”

그 말에 상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람 좋던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눈가는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몸은 아무런 기운도 내뿜지 않고 고요하고 평온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살기가 뱀처럼 꿈틀거 리고 있었다.

“아…….”

그 살기를 정면에서 마주한 아이는 당황하며 몸을 흠칫했다. 손에 든 종이컵에서 뜨거운 차가 살짝 흘러넘쳤다.

“앗.”

손을 살짝 데 인 아이 가 종이 컵을 놓쳤다. 상호는 정 신을 차리고 재빠르게 종이 컵을 잡았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괜찮아?”

“네……, 네.”

아이는 잘못이 없다.

상호는 살짝 붉어진 아이 의 손을 내 려다보다가 정수기로 가서 손수건에 차가운 물을 적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아이의 손에 손수건을 댔다.

“미안하다. 안 그래도 얼굴 험상궂은데 인상까지 써서…….”

“괜찮아요.”

아이는 다시 헤헤 웃었다.

지윤의 동생들보다 고작 한두 살 많을 뿐인데도. 아이는 참 어른스러웠다. 아침에 본 태화보다 훨씬 더.

‘나이는 세 배가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비교가 되냐…….’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이에겐 잘못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야기를 꺼내려니 살심이 또 솟았다.

“그…… 사람이 뭘 시켰는데?”

그가 묻자 아이는 장삼을 걷고 복대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얀 한지가 세로로 길게 접혀 있었다.

총 여섯 개.

“이게 뭐야?”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하셨어요.”

“……내 질문을 알고 미리 썼다고?”

“네.”

아이가 고개를 끄덕 였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선생들은 일찍 교실에 갔거나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섯 개보다 많이 물어보면 어쩌려고.”

“그럴 리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

상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제일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한지의 끝부분에는 알 수 없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아이는 그 한자를 알아보는 듯이 하나를 골라 내밀 었다.

“펴 보세요.”

펴 보니 세로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미안하다.

‘지랄.’

상호는 한지를 찢었다.

남은 답변은 다섯 장. 남은 질문의 개수는 상호 자신도 모른다.

굳이 대화로 하지 않고 이러는 이유는 뻔했다. 전화를 했으면 전화를 부숴버렸을 테고, 직접 만났으면 머리통을 부숴버렸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왔어?”

아이는 이어서 또 한 장을 내밀었다.

-전해 줄 선물이 있다.

“선물?”

상호가 중얼거리자 아이가 복대에서 또 무언가를 꺼냈다.

염주였다.

검은 염주알들 가운데 하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쓰는방법 알려드릴게요.”

아이가 염주를 건넸지만, 상호는 당황하며 밀어냈다. 영주가 주는 물건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필요 없어. 이게 뭔 줄 알고…….”

“제가만든거예요.”

아이는 한사코 그의 손에 염주를 쥐여주었다.

“구슬이 18개예요.”

그리고 염주를 돌려 하얀 알이 엄지 아래에 오도록 했다.

“이 하얀 알의 바로 위부터. 하나, 둘, 셋. 이렇게 108번을 세는 거예요.”

“……

“네. 그렇게 108번을 제대로 셌다면 엄지에 하얀 알이 있을 테고……. 만약 아니라면, 제대로 안 센 거죠.”

“그래서 이걸 어디다 쓰는데?”

“번뇌가올때요.”

아이는 평생에 고민 한 번 안 해 본 듯이 맑게 웃었다.

“머지않아 큰 번뇌들이 닥쳐올 거예요. 그때마다 굴리세요. 굴려서 하얀 알이 엄지 아래 오지 않으면, 마음이 혼탁하단 뜻이니까 꾹 참으면서 다시 잘 생각해 보시고…… 하얀 알이 엄지 아래에 왔다면, 그때는 마음 따라 행하시면 돼요.”

상호는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요즘 힘든 일이 많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영주가 주는 물건은 받기 싫었다.

“이거에 저주가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실분은 아니에요.”

아이의 눈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상호는 영주를 알았다.

이 아이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얘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거사님이라고 부르는 그 인간은…… 세상을 자기 맘대로 이용하는 인간이야.”

“알아요. 주술사이신 거. 하지만 정말 저주 따위는 쓰지 않으시는…….”

“말 그대로의 뜻이야.”

말 그대로, 세상을 이용하는 인간.

상호는 목소리를 낮추며 아이의 양어깨를 잡았다.

“자기 목적대로, 자기는 희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제멋대로 희생시키는, 그런 인간이라고.”

“그런 분 아니세요.”

아이는 당돌하게 눈을 치떴다.

상호의 한쪽 눈에 슬픈 빛이 깃들었다.

“그런 분께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어.”

아이는 그 슬픈 눈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번 볼까? 그 잘난 거사님께서 무슨 말을 할지.”

상호는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 죽인 거야?”

아이는 흔들리는 눈으로 한지에 적힌 한자를 읽 었다.

이윽고 아이가 한지를 뽑아 내밀었다. 상호는 거칠게 그 한지를 폈다.

-어쩔 수 없었다.

맥이 탁 풀리면서, 동시에 또 다른 화가 솟구쳤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화를 낼 수도 없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그 한지도 찢어 버렸다.

남은 답변은 세 개.

하지만 상호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됐다, 얘야. 돌아가. 더 묻고 싶은 게 없어.”

“선물…… 더 있어요.”

“필요 없어.”

“뭔가…… 지금 제일 궁금한 거라도 없으세요? 거사님에 대한 게 아니 라도…….”

아이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이 아이도 영주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상호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물었다.

“내가 지금 제일 궁금해할 만한 게 뭔데?”

아이가 한지를 건넸다.

-그 아이.

그아이라니.

눈앞에 있는 아이를 뜻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상호는 세희, 태화. 나빛, 지윤을 떠올리고 턱에 힘을 주었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는 걸까.

“……그 아이가 뭐.”

?살°} 있다.

한지의 내용을 본 상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벼락을 맞은 듯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상호는 손을 떨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남은 한지는 한 장. 상호는 더 물을 것도 없이 마지막 한지를 집어 들었다.

-어딨는지는 몰라.

“이 씨발!”

상호는 버럭 소리치며 한지를 구겨서 집어던졌다. 교무실의 모두가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뭐, 뭐야. 강 선생이 욕한 거야?”

“상호 씨, 애한테 지금…….”

“……죄송합니다.”

상호는 일어나서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방금 읽은 내용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다혜.

‘어떻게…….’

어떻게 살아 있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온갖 의문들이 머릿속을 휩쓸었지만, 그의 표정은 곧 차갑게 식어 들었다.

주술사는 믿을 수 없으니까.

‘내가 다혜를 찾아 돌아다니도록 만드는 게 그놈 목적일지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도.

혹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이.

전부 영주의 간계일 수 있다.

‘하지만만약사실이라면…….’

상호는 입술을 깨물며 허공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민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 었다.

“놀래켜서 미안.”

다시 부드러워진 손길이 아이의 머 리를 쓰다듬었다.

“손은 괜찮아?”

“네.”

아이는 손수건을 살짝 들었다. 다행히 화상을 입지는 않은 듯했다.

슬슬 조례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조례는 통째로 땡땡이를 쳤지만, 수업은 뺄 수 없었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선생님이라 수업을 해야 해. 이만 일어날게. 근데 너는 대체 어디서 여기까지 혼자 왔어? 그것도 하필 이런 날에…….”

아이는 그저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담요를 척척 개어 놓고 종이컵을 버린 후, 키만한 우산을 집고 아장아장 걸어 상호와 함께 교무실을 나섰다.

교실로 향하려던 상호는 마음을 바꿔 아이를 교문까지라도 배웅해주기로 했다.

본관 현관에 선 둘은 우산을 폈다. 아이가 상호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그거, 꼭 하고 다니세요.”

상호는 주머니에 든 염주를 꺼냈다.

아이는 얼굴 한가득 기대감을 품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담스러운 눈빛을 반짝이며.

“……알았다, 알았어.”

결국은 손목에 염주를 차게 되었다.

그는 아이와 함께 교문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발을 멈줬다.

“얘야.”

“네.”

“이름은?”

아이는 씩 웃었다.

“혜소요. 혜소.”

“성이 혜씨야?”

“아니요, 성은 몰라요.”

상호는 그 뜻을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교문에 다다른 둘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상호가 먼저 인사를 했다.

“살펴 가. 일 있으면 또 와도 돼. 근데 그 사람 소식은 되도록이면 들고 오지 말고.”

혜소는 곤란한 듯 웃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약간의 비와 거센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날아가진 않을까 걱정이네. 올 때는 대체 어떻게 왔대…….’

사실 차를 태워다 주고 싶었다. 어린 혜소가 잘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이기도 했지만, 주된 이유는 영주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어서였다. 알아내서 죽기 직 전까지 패 거 나 죽을 때까지 패 려고.

하지만 수업은 해야 했다.

언제나 아이들이 먼저니까.

상호는 저 멀리에 혜소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본관으로 걸어갔다.

깊은 한을 담아 한숨을 내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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