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501)

* * *

이튿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굴리고, 굴리고, 굴리고. 그의 반 아이들에게는 평소보다 약간 더 힘든 정도였지만, 외국에서 온 아이들에게는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제일 튼튼해 보이는 아비게일도 시차 때문인지 일끽 골골댔다.

셋째 날이 밝아 아이들이 가는 날이 되어도, 상호는 아이들을 굴렸다.

오전의 운동장에서는 지윤이 나디아를 공중에 집어 던지고 있었다.

“꺄아악!”

“아따. 높게도 난다.”

안 그래도 작고 가벼운데, 제일 힘이 센 지윤이 던지니 무슨 인형처럼 공중을 날았다.

상호의 옆에서는 방금 싸우고 들어온 세희와 이츠키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매점 같이 갑니까?”

“너 집 언제 가는데?”

“점심 먹고 공항 간다고 했습니다.”

“그럼 빨리 먹고 갈까.”

말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오후가 되면 헤어지는 게 섭섭했을까. 그새 많이 친해진 모양이 었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오늘 이 순간까지도 나빛과 나디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련은 이쯤할까.’

상호는 운동장을 향해 외 쳤다.

“됐다. 그만하고 들어와.”

“예.”

지윤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나디아를 낚아채 한 바퀴 빙글 돌렸다가 땅에 세워주었다.

나디아의 눈이 팽글팽글 돌았다.

“우우……웩…….”

“엄살이 심하구마이. 돌아가믄 수련 열심히 하그라.”

지윤이 낄낄거리며 나디아의 옷을 털었다.

둘이 스탠드에 앉자 상호는 뒤를 돌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충분히 많이 대련했다. 그치?”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네.”

“고생했어. 이제 쉬면서 너희끼리 하고 싶은 이야기 해.”

슬슬 헤어질 시간이니 그동안만이라도 같이 놀라는 뜻이 었다. 그런데 나디아가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그녀의 검지가 자신의 안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눈왜이렇게 됐냐고?”

“네!”

헤어지는 마당이 되어서야 묻는다. 하긴 그럴 만큼 바쁘게 굴리긴 했다.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기도 했고. 상호는 안대를 살짝 들었다. 이제는 슬슬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몬스터한테 당한 건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남겨놨어.”

“다리는 왜 그렇습니까?”

이츠키가물었다.

상호는 외국 아이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병이야.”

“왜못고칩니까?”

이츠키가 캐묻자 지윤이 끼어들었다.

“궁금하나?”

“궁금합니다.”

“궁금하믄 내년에 유학 오그라. 우리 쌤 실력 확실하니께.”

세희와 나빛도 거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가르치셔.”

“밥도 많이 사주시고, 주말에도 챙겨주셔. 가끔 전화를 잘 안 받으시긴 하지만…… 헤헤.”

“……크흠.”

아무런 예고 없이 날아온 공격이 상호의 가슴을 찔렀다.

“흐음…….”

아이들의 말에 이츠키는 세희와 세희의 검을 흘끔하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뭐, 생각해 보겠습니다.”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얘들이 아주 영업을 하네

유학이란 말에 나디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 눈빛의 뜻은 명백했지만, 상호는 그녀들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국가는 헌터를 나라의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인재들을 외국으로 유출하는 일은 국가에서 곱게 보지 않을 터였다. 비록 잠시간의 유학일지라도.

한국과 교류가 많은 일본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지만, 러시아는 사실상 택도 없었다. 심지어 군에 소속된 군인이기까지 하다면.

그래서 상호는 일부러 나디아와 눈을 마주치 지 않았다.

“뭐 유학 오고 말고는 너희 자유지만…… 중요한 결정이니까, 알아서 생각 잘해.”

“네!”

나디아의 대답이 제일 컸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 왔다. 상호는 아이들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밥 알아서 먹어.”

“쌤은요?”

“나는 교무실 간다.”

그렇게 말하고 본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저거 잡아.”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를 붙들었다. 외국 아이 한국 아이 너나할 것 없이.

당황한 상호는 팔다리를 버둥거 렸지만, 아이들은 무슨 관짝 들듯이 그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야, 얘들아……?”

“쌤이 제일 안 놀아 줬잖아요. 우리한테만 시키고.”

“정들든 말든 잘 놀으라 뭐라카더니, 정작 쌤이 정들기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 아입니꺼. 우리가 먼 호구인 줄 아십니꺼. 딱 대이소.”

“딱 대요. 헤헤…….”

나빛이 그의 검을 뺏으며 웃었다.

사실 아이들의 말이 맞았다. 쓸데없이 정들기 싫어서 일부러 필요한 말만 하고, 마지막 날이 되어서나 겨우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허락할 정도로 거리감을 뒀던 건데.

태화가 아이들을 재촉했다.

“자~ 들고가자~, 들고가자~.”

오른쪽에 세 명, 왼쪽에 세 명. 제일 키가 작은 나디아는 상호를 들지 못했다.

나빛이 나디아에게 상호의 검을 건넸다.

“이거.”

그리고 윙크를 했다.

“뭔지 알지?”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나디아는, 곧 그 뜻을 알아듣고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三 상호는 자신을 든 아이들의 앞쪽으로 걸어가는 나디아를 보고 진땀을 흘렸다.

‘뭔 짓을 하려고…….’

나디아는 그의 검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쳐 들더니, 천천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

러시아어 라서 뜻은 모르겠지만 장송곡이 란 것만은 확실했다.

어안이 벙벙한 상호의 가슴팍에 나빛의 손이 올라와 황금빛 꽃을 하나 놓고 갔다.

성력으로 만든 꽃.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나빛이 이제 성력 잘 다루는구나…….’

상호는 반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시선은 느껴졌고,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쟤네 뭐해?”

“앗, 강쌤 죽었다.”

아이들이 그를 보고 깔깔거 리자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상호는 머리 바로 옆에서 그를 들고 있는 세희에게 속삭였다.

“세희야.”

“네.”

“선생님들 보면 내려줘. 특히 교장선생님이나, 임 선생님이나…….”

“지금 보고 계신데요.”

상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럼 지금 내려주면 안 될까? 선생님 쪽팔려 죽을 것 같아…….”

“저희는괜찮아요.”

“아니, 선생님이…….”

“괜찮아요.”

세희는 빙긋 웃었고,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웃는다면야. 몇 번이고 당해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산 채로 운구를 당했다. 전교생과 교직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급식소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 * *

“잘 가!”

“빠이~.”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의 교정에는 외국 학생들을 배웅하기 위해 전교생들이 나와 있었다. 다들 아쉬워하는 표정이 었다. 버스에서도 손 몇 개가 나와 그들을 향해 흔들렸다.

버스들이 줄지어 교문을 나갔다.

상호는 나빛을 내 려다보았다.

“나빛아.”

“네.”

“나디아랑 이야기 좀 해 봤어?”

“아니요, 대신에…….”

나빛이 헤실헤실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메일 교환했어요. 아비게일도 같이.”

“연락 자주 할 거야?”

“네!”

아이들끼리는 이야기를 안 했어도, 만날 기약이 없어도 친해질 수 있는 걸까.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빛의 머 리를 쓰다듬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세희는? 아까 보니까 이츠키랑 많이 친해진 것 같던데.”

세희는 뚱한 표정이 었다.

“필요 없대요.”

“……필요가 없어?”

“네. 제가 이메일 주려고 하니까 필요 없다면서 그냥 가버렸어요.”

옆에서 듣던 태화가 한마디 했다.

“니가 그럼 그렇지 뭐. 맘에 안들었던 거지. 괜히 친구 없는 게 아니라니까?”

세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넌 친구 많아?”

“너보단 많지. 난 중학교 친구들하고 계속 연락하는데~.”

“나도 하거든?”

“뻥치시네. 너 핸드폰 하루종일 한 번도 안 울리잖아.”

“문, 문자로 다 하고 있어, 바보야. 알지도 못하면서…….”

“응~, 니 친구 나밖에 없어~.”

지윤이 둘의 등짝을 후려 쳤다.

“가스나들 또 부부쌈 시작했나. 마, 세희야. 이년이 어제 니 뒷담깠다. 자기 버리고 일본년이랑놀러 다닌다꼬.”

그 말에 태화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야이씨, 그걸 왜 말해!”

“세희 니 바람피니까 무신 소낙비 처맞은 똥개마냥 추~욱 처져서 앵겨붙었다 아이가. 그래놓고 이제 이츠키 가니까 신나 가지고 니 친구가 나밖에 없네 이 지랄하는 기라. 참내, 뭔 별것도 아닌 걸로 질투는 오지게 해싸갖고…….”

“……아악! 이제 오지윤 너랑 말 안 해!”

“하지 마라 임마. 내가 말 안 하믄 며칠 있다가 니가 알아서 또 축~ 처져가꼬 미안하네 잘못했네 그러겠제. 다 알고 있다. 뻔하제 뭐.”

“아아아악! 짜증나악!”

태화가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태화의 등을 두드렸다.

“들어가자, 얘들아. 오후 수업 해야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짚으며 걸어가는 그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내년에 진짜로 애들이 유학을 온다면.

‘외국 애들 신경 쓰기 힘든데…… 그래도 오면 가르쳐야지 뭐, 어쩌겠어…….’

그는 고개를 흔들어 그 고민을 털어내고 다시 넷이 된 아이들과 함께 본관으로 향했다.

이제 다시 수업을 해야 할 시간이 었다.

〈사죄>

어느덧 9월.

“꺄하~ 태~풍이다~!”

태화가 공중을 날아다니며 꺅꺅 소리를 질렀다. 등굣길부터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전혀 기분 좋은 날씨가 아닌데도.

흐린 하늘에 비가 조금씩 내리고, 점점 거칠어지는 바람은 태풍이 나라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예고했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태화를 향해 소리 쳤다.

“번개 맞는다, 태화야. 내려와.”

“나는 신이다! 나는 바람을 조종할 수 있다!”

“얌마, 치마 입고 날아다니지 말라고!”

태화는 하늘을 향해 양팔을 치 켜들다가 상호의 윽박을 듣고 땅으로 내려왔다.

붉은 아랫입술이 삐쭉 내밀어졌다.

“변태.”

“니가 날 변태로 만드는 거야.”

“앗, 그 말 진짜 변태 같은데.”

“하…….”

상호는 우산을 태화 쪽으로 기울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태풍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신났냐. 고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차피 이번 거 일본으로 간대요.”

“일본에는 이츠키 있잖아.”

“그러니까요.”

태화가 씩 웃었다.

상호는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그냥 본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근데 쌤. 태풍 이쪽으로 오면 그때도 수업 해요?”

“학교는 쉬겠지만 수련은 시킬 거야. 태풍 온다고 못 싸우는 거 아니잖아.”

“엑……, 그러면 나빛이만 좋은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지 뭐. 차 타고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에이, 태풍 오면 쌤 집으로 도망가야겠다.”

“너 근데 안 춥냐?”

태화는 하복을 입고 있었다.

아직 여름이 다 가지는 않았지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공기가 쌀쌀했다.

“감기 걸려. 뭐라도걸치고다녀.”

“바람막이 사주세요.”

“없어?”

“네.”

“추석에사다줄게. 세희랑…….”

입맛을 다시던 상호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한 아이가 교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 학생이 아니라 완전히 꼬마 아이.

회색 장삼을 입었는데 머리를 빡빡 밀기도 했고 너무 어려서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여섯 살은 되었을까.

태화도 그 아이를 본 모양이 었다.

“앗, 빡빡이다.”

“얌마. 애한테 그러지 마.”

“우씨, 빡빡이가욕이예요?”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상호는 핀잔을 주고 본관을 턱짓했다.

“먼저 교실 가. 쌤은 저 애랑 이야기하고 들어갈게.”

“넹.”

태화는 검은 연기를 날리며 사라졌다.

아이는 자기 키만한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상호는 그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제서야 그 아이도 아장아장 걸어 그에게 다가왔다. 나이 다운 웃음을 지으며 .

아이는 합장을 하고 허 리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응. 어쩐 일로왔니?”

“만날 분이 있…….”

“잠깐만.”

상호는 아이가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말을 끊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