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501)

* * *

도미니크는 상호에게 학생을 맡겼고, 다른 외국 선생들도 그 대결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실력 차이가 났기 때문에.

그렇게 상호는 목각인형으로 외국 아이들의 실력을 확인했다.

“됐다. 그만해.”

“……네.”

아비게일이 검을 거뒀다. 그녀의 발치에는 떨어진 불똥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마법과 겸을 동시에 쓰는 무예가.

미국에서는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라는 모양이었다. 쓸 수 있는 건 뭐든 사용한다는 풍조 때문일까.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로 뒤를 가리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잘 봤다. 다음, 이츠…….”

“선생님은 일부러 그렇습니까? 자꾸 그러면 저도 선생님 이름 부릅니다. 선생님 이름 뭐라고 하셨습니까?”

“……상호. 강상호.”

“상호 님은 이름으로 불리면 기분 좋습니까?”

“알았다, 미안해. 사카시타……. 어쨌든 너도 나와서 대련 한 번 보여주자.”

그러자 이츠키가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마네킹 이랑은 못 싸웁니 다.”

상호의 눈이 끔뻑 였다.

“……왜?”

“저는 사람 아니 면 못 싸웁니다.”

“그럼 몬스터랑은?”

“어쨌든 살아 있는 게 아니면 못 싸웁니다.”

이츠키는 주변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이츠키의 손가락이 세희를 향했다.

“이 친구랑 하는 게 좋겠습니다.”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이유가 뭘까.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학생용 보호마법 목걸이 두 개를 꺼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그가 허락하자 세희와 이츠키가 각각 목걸이를 받아들고 앞으로 나왔다.

검은 교복과 하얀 교복이 바람에 나부꼈다. 둘이 차고 있는 검은 모양이 비슷했다. 아비게일의 세이버와 나디아의 롱소드보다는.

이츠키가 먼저 검을 뽑았다.

“……응?”

상호는 이츠키의 검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칼날에 노란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붉은 글씨로 무언가가잔뜩 쓰인 것을 보니 아마 부적 같았다.

주술사. 그것도 정령을 쓰지 않는 쪽.

이츠키는 검에서 부적 한 장을 떼어 세희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부적은 기이할 정도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다가 허공에서 우뚝 멈줬다.

“이건 허락못해주겠는데.”

이츠키는 상호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선생님이 직접 상대해 주십니까?”

“그래야겠다.”

상호는 검을 짚으며 세희에게 다가갔다. 교대하기 위해.

하지만 세희는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해볼래요.”

자존심이 강한 세희였지만. 상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나와.”

그는 주술사를 믿지 않았다.

결국 세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스탠드에 앉은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상호가 검을 뽑자 이츠키 가 말했다.

“딱히 위험한 기술은 없습니다.”

“그래? 근데 우리 애들이 강한 주술사를 상대해본 적이 없어서.”

초보 주술사는 헌터 유형 중 최약체. 그 최약체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것이 정령을 쓰지 않고 저주로 싸우는 저주술사였다.

하지만 그것은 초보일 때 한정이고, 어느 정도 숙련도가 쌓이고 나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져서 가장 껄끄럽고, 귀찮고, 악랄하며 강력한 상대가 된다.

“일단은 내가 먼저 확인해 봐야겠어. 이해해 줘.”

“저는좋습니다.”

이츠키가 성큼성큼 걸어가 허공에 뜬 부적을 잡았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응.”

상호는 검을 치 켜들었고, 이츠키는 다시 부적을 날렸다.

상호가 만약 전력을 다하려 한다면 부적을 피하거나, 내공을 뻗어 잡거나, 검의 옆면으로 부적을 부드럽게 밀어서 흘려넘겼을 터였다. 부적을 찢는 게 저주를 발동시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츠키의 실력을 보려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부적을 맞았다.

“……흠.”

시야가 일시에 검게 물들었다.

청각 역시 맛이 가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후각과 미각, 그리고 촉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나의 감각도.

상호는 이츠키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도 1학년 수준은 아니구만.’

그의 검이 이츠키의 검을 가볍게 쳐냈다.

이츠키가 부적을 던졌다. 그 부적에는 마나가 깃들지 않은 탓에 정확히 감지가 되지 않았지만, 팔을 휘두른 궤적은 알 수 있었다. 상호는 그 정보를 토대로 부적의 위치를 계산해 검을 휘둘렀다.

부적은 찢어지거나 베이지 않고 그대로 그의 검에 밀려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세희였다면 어렵지 않게 피했겠지.’

하지만 단 하나라도 맞는다면 지금 세희의 수준으로는 파훼가 힘들 터였다.

그 하나를 맞느냐, 피하느냐가 관건.

‘그나저나 이 저주는 언제 풀리냐…….’

뭐 언젠가는 풀릴 것이고, 얼른 풀리지 않아도 이츠키를 상대하는 데에는 딱히 지장이 없었다. 상호는 날아드는 이츠키의 검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잡았다.

눈도 안 보이고 귀도 들리지 않지만, 칼끝으로 이츠키의 당황이 느껴졌다.

검술은 지극히 평범한 수준. 내공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게 다야? 부적이라도 몇 개 더 던져 봐.”

그 말에 이츠키는 그에게 잡힌 검에서 부적을 떼어 던졌다. 부적이 그의 몸 곳곳에 부딪혔다.

팔이 마비되고, 숨이 턱 막히고, 손에 땀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상호가 내공을 한 번 돌리자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슬슬 처음 맞았던 저주도 풀릴 때가 되었는지 시력이 점차 되돌아왔다.

‘이 정도면 애들한테 위험하지는 않겠네.’

상호는 이츠키의 검을 놓으며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안 웃어도 웃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 당황이 가득했다.

“뭘 놀래. 내가 선생님인데 당연히 너보다 강해야지. 어쨌든 뭐, 강하긴 하네. 애들이랑싸우면 도움이 되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집어넣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그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딱 두 명의 반응이 달랐다. 세희, 그리고 의외로 태화.

세희는 당장이라도 이츠키와 싸워보고 싶은 듯 검을 만지작거렸고, 태화는 평소와는 달리 남의 전투에 관심을 보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마 이츠키가주술을 쓰는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 었다.

악마 융합체는 주술에도 재능이 있으니 .

상호는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츠키를 향해 말했다.

“자, 들어가. 사카시타. 다음은 나디아.”

* * *

“우와…….”

나디아와 목각인형 의 전투가 끝나자 태화가 눈을 깜빡이 며 중얼거 렸다.

“개약해.”

“너 혼난다, 진짜.”

상호는 위협적으로 혀를 차며 목각인형에게서 내공을 거두었다. 목각인형은 줄 풀린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태화의 말이 맞았다.

나디아는 약했다. 아주 많이.

성력으로 만든 방어막을 방패 삼고, 성력을 두른 검과 함께 사용하는데, 예현여고에 있었다면 한 200등 언저리쯤에서 놀았을 실력이었다. 검술은 세희와 비교가불가능하고, 성 력도 나빛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 애들한텐 도움이 안 되겠다.’

그래도 엄연히 배우러 온 학생이니, 도움이 안 된다고 버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 가까웠다.

상호는 목각인형을 들쳐 메 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들어가자, 얘들아.”

〈주술사와 이교도>

상호가 급식소 앞에 줄을 서는데, 마침 도미니크와 니콜라이, 이시무라가 바로 뒤에 줄을 섰다.

통역사는 어디로 갔는지 그 셋뿐이었다. 붙임성 좋은 이시무라가 도미니크와 니콜라이에게 계속 무어라 말을 했다. 모양을 보니 영어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어도 할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 시무라가 상호를 보고 씩 웃었다.

“같이 먹지요, 강 선생님.”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배식을 받고 자리에 앉으니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상호는 외국 선생들을 한 번씩 흘끔하고 물었다.

“다들 저희 반에 온 학생들 담임이십 니까?”

이시무라가 다른 둘에게 묻고는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니라고 하네요. 담임은 아니고 교수라고.”

“이시무라선생님은?”

“저는담임입니다.”

어쨌든 다들 학생을 가르치긴 한다는 소리 였다. 상호는 도미 니크를 바라보았다.

“아비게일은 평소에 어떤 학생입니까?”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라네요. 착하고, 약 안 하고.”

약을 하는 학생이 얼마나 많으면 학생을 설명하는데도 약을 안 한단 말이 나오는가. 상호는 살짝 당황하다가 이번엔 이시무라에게 물었다.

“사카시타는요?”

“조용하고 유들유들한데, 반 친구들은 무서워하죠. 그래도 잘 지냅니다. 실력도…… 학교 최상위권이고.”

마지막으로 니콜라이 였다.

“나디아는……?”

니콜라이는 대답을 잠시 망설이더니 짧게 한마디 했다.

“약하다네요.”

그리고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해서, 집안의 보호가 없었으면 진작에 도태됐을 아이래요. 부계는 정교회. 모계는 군 쪽으로 유명한 집안이랍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러시아에선 저 런 성격으로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상호는 그 말을 듣고 멀리서 밥을 먹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아비게일은 평 범하게 웃으며 아이들과 대화하고 있었고, 이츠키는 태화의 질문 공세를 받으며 세희를 곁눈질로 살피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디아는 나빛과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아서 조용히 아이들 눈치를 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러시아 아이들의 제복은 어디 있든 눈에 띄었다.

‘정교회…….’

상호는 나빛의 목에서 흔들리는 신앙회의 문양을 보며 이시무라에게 물었다.

“일본에는 성력을 쓰는 사람들의 단체가 따로 있나요?”

이시무라는 고개를 저 었다.

“우리나라는 성력과 마나를 크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성력을 신이 줬다면 마나도 신이 줬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신이 많다 보니 한국이나 다른 나라들처럼 성력을쓰는 사람들끼 리 따로 모이지는 않습니 다.”

“러시아는 어떤지 한번 물어봐 주세요.”

이시무라가 말을 전하자 니콜라이가 답했다.

“러시아는 종교가 정교회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된답니다.”

“성력을 쓰는 사람들이 전부 정교회 소속이란 거죠?”

“다른 곳도 있는데 정교회가 훨씬 많대요.”

정교회의 특징은 잘 모르지만, 일단은 타국의 신앙인을 이교도로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사실 이교가 맞긴 했다.

나빛도 천사화에 대해 들었으니, 본인의 성력이 다른 신에게서 전해지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모시는 신은 같을 텐데 친하게 지내지. 성격도 잘 맞을 것 같은데…….’

정교회 집안이라는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까.

상호는 나디아에게서 눈을 떼고 식사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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