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리, 왜 안 들어가고 여기 있는 거야?”
상호의 옆에서 민정이 소곤거렸다.
둘은 꼭 붙어서 소파에 함께 누워있는 중이었다. 상호는 민정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오늘만은 외롭지 않게 해줄 생각이었다.
“지금 들어가면 효은이 깨잖아.”
“그럼 난 왜 안고 있어?”
“누나 또 이상한 연구 하러 갈까봐.”
“안 해, 안 해…….”
민정이 쓰게 웃었다.
그녀는 곧 평소처 럼 따스한 눈빛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단둘이 있으니까 진짜 그때 같다.”
상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그의 머릿속에 큰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누나.”
“응?”
“아까 그 정자, 내 거 맞지?”
“응. 미안해…….”
“괜찮아. 따지려는 게 아니라…… 대체 어떻게 훔쳐간 거야?”
“그게, 손으로 훔치다가…….”
민정이 얼굴을 붉혔다.
“좀오래 걸리길래…… 이것저것 써 봤어.”
“……이것저것?”
그 말은 두 개 이상이라는 뜻인가. 그냥 다른 걸 썼다고 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는데, 이것저것 썼다고 하니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물론 상호가 예상하고 있는 그 하나도 정말 큰 문제였다. 상호의 얼굴도 빨갛게 물들어 갔다.
“그니까, 그…….”
상호는 민정의 볼에 살짝 입을 맞줬다.
이거 말고, 다른 게 있다는 소리야?”
그 말에 민정이 눈을 반짝였다.
“어머, 너 그거 모르는구나.”
“대체 뭐를?”
“궁금해? 지금 해줄까?”
“아니 뭘 지금 해! 말로…… 말로 설명하면 되잖아.”
상호는 식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칭칭 옭아매고 있었다. 상호는 민정을 안은 채로 굳어 버렸다. 심지어 입도 열 수가 없었다.
민정 역시 그와 같은 저승부대원이었다.
“하긴 예경이랑 효은이는 잘 안 될 테니까…….”
민정이 꾸물거리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럴수록 상호의 몸에 흐르는 진땀은 늘어만 갔다.
“상호가 모르면, 누나가 가르쳐 줘야지, 응……. 몇 날 며칠이고, 1년이 걸려도, 10년이 걸려도…….”
“효은이한테는 비밀이야’
상호는 똑똑히 알게 되었다. 민정이 자신의 것을 어떻게 훔쳐갔는지.
덤으로, 그 겨울밤에 자신이 잊어버렸던 감촉도.
<국제교류>
“쌤.”
“응?”
“이거 뭐예요?”
자리에 앉은 태화가 앞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에는 비어있는 의자와 책상이 놓여 있었다.
대답은 세희가 했다.
“국제교류라고 하셨잖아, 바보야.”
“뭐? 언제 말하셨는데?”
“네 생일에. 그냥 하나도 안 들었지?”
책상은 총 세 개.
미국에서 한 명, 러시아에서 한 명. 일본에서 한 명. 전부 태평양의 이대륙 아르게스와 땅이 연결당한 나라들이었다.
일본은 아예 관통을 당했고,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연결부가 가장 넓었다. 미국은 가늘고 얇게 뻗어나간 가지에 간신히 걸쳤다.
그래서 대전이라고 부를 정도로 큰 전쟁을 겪은 나라는 아르게스와 인접한 다섯 나라뿐이었다.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그리고 이곳, 한국.
다만 헌터가 그 다섯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게스가 아닌 땅에도 몬스터는 나타났으니까. 그렇기에 아르게스와 멀리 떨어진 국가들에도 헌터가존재했지만, 그 수준은 다섯 나라보다 현저히 낮았다.
특히 러시아처럼 인구밀도가 낮거나 중국처럼 특정 지역으로 사람이 몰린 곳은 사람 없는 땅을 점거한 몬스터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상호는 교탁을 두드렸다.
“싸우지 마, 싸우지 마. 곧 외국 손님들 오는데 그러면 되겠냐. 우리나라에 좋은 인상 남겨 줘야지.”
“어느 나라에서 오는데요?”
“미국이랑, 러시아랑 일본.”
그러자 태화가 벌떡 일어섰다.
“빨갱이! 쪽바리! 양키 고 홈!”
“그런 거 하면 진짜 혼낸다.”
“코리아 넘버 원!”
“그걸 입 밖으로 내면 넘버 200이 되는 거야, 인마.”
상호는 한숨을 쉬며 태화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다 알아들으니까 그런 거 하지 마. 친하게 지내진 못하더라도 예의는 지키고. 선생님 고생시키지 좀 말아, 응?”
안 그래도 요즘 정신없는데 외국 학생들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딱 3일만 버티면 된다는 게 정말로 다행스럽기 그지없었다.
“걔들만 배우러 오는 게 아니야. 너희도 그 애들한테 배우는 거야. 장점이 있으면 배우고, 단점이 보여도 이유를 생각하고. 이런 기회 많이 오지 않으니까, 귀하게 여기고잘배워.”
“네.”
“네에~.”
아이들이 밝게 대답했다.
누가 오는지는 이미 전달을 받았다. 상호는 교탁에 놓인 출석부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외국 학생들에 대해 간략하게 적힌 종이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당연히 전부 여자. 그리고 검을 쓰는 검사들이 었다.
나이도만16세로다같았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과 학제가 비슷해서 둘 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러시아는 경우가 달랐다. 러시아는 초, 중, 고등학교가 나뉘어 있지 않고, 6~7세에 입학해 11~12학년제로 단 한 학교만을 다닌다.
그의 반에 오는 아이는 12학년제의 10학년이었다.
‘졸업하는 때는 다 같나. 대충 뭐, 우리 애들이랑 똑같다고 보면 되겠네.’
상호가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다 읽고 고개를 드는 순간 누군가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예, 들어오세요.”
그가 말하자 문이 열 리고 세 명 이 들어왔다.
학생 셋은 아니고, 한 명은 교사, 한 명은 통역사. 그리고 한 명이 학생.
통역사는 평범한 한국 남자였지만 교사의 인상이 좀 강렬했다. 검은 피부와 짧은 곱슬머 리를 가진 남자. 안경 아래의 눈빛은 서글서글한데 양복 아래의 몸은 터질 듯이 단단했다.
교사는 상호의 안대를 보고는 눈을 반짝이 며 무어라 말했다. 하지만 상호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는겨. 영언가? 영어는 맞는 것 같은데…….’
다행히 통역사가 얼른 뜻을 가르쳐 주었다.
“안대가 멋있다네요.”
흥미를 보이기에 뭔가 진지한 거라도 물어보려나 했더니 그냥 인사치레인 모양이었다. 상호는 적당히 웃어 주었다.
교사가 또 뭔가를 말하고, 통역사가 전해주었다.
“미국에서 온 도미니크입니다. 여긴 반도 그렇고 선생도 뭔가 달라 보이네요. 지금은 아이들 데려다주느라 시간이 없으니까, 이따가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학생 잘 부탁드립 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 였다.
“예. 걱정안하셔도됩니다.”
교사와 통역사는 서둘러 교실을 나갔다. 다른 반에도 학생들을 데 려다주러 가는 모양이 었다.
상호는 덩그러니 남겨진 학생을 바라보았다.
갈색 피부에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 파란 눈동자. 서양인들이 원체 나이 들어 보이긴 했지만, 도저히 학생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성숙한 외모였다.
‘다들 한국말 조금씩은 할 줄 안다고 했지.’
상호는 종이에 적혀 있던 미국 학생의 이름을 떠올렸다.
“어…… 아비게일? 아비가일?”
“네. 선생님.”
어색한 어조지만 목소리는 당찼다. 상호는 책상을 가리켰다.
“저기 앉으면돼.”
“네, 선생님.”
아비게일은 제일 창가 쪽, 세희의 앞에 앉았다. 상호의 아이들은 다들 외국인을 신기해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중에서 세희의 눈빛이 가장 강렬했다.
아니나 다를까세희의 시선은 아비게일이 허리에 찬 검에 꽂혀 있었다. 휘어진 가드가손잡이 끝까지 이어져 손을 보호하는 외날곡도, 세이버.
그런데 어째 태화의 눈빛도 세희 못지않게 강렬했다. 시선의 방향은 달랐지만.
아비게일의 몸통 쪽을 보던 태화는 곧 자신의 몸을 내려보더니.
“쌤.”
“응?”
“죄송해요.”
“뭐가.”
“인종 차이는 어쩔 수가 없어요…….”
상호는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번째 학생이 도착했다. 이번엔 두 명. 어른 사내 한 명과 여학생 한 명이었다. 둘 다 동양인.
통역사일까, 교사일까. 어느 쪽인지 긴가민가해하는 상호에게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이시무라입니다.”
유창한 한국말이 었다.
이시무라는 상호와 악수를 마치고 뒤쪽의 여학생을 가리켰다.
“학생잘부탁드립니다.”
다들 바쁠 때라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상호는 이시무라가 빨리 다른 반에 갈 수 있도록 얼른 고개를 끄덕 였다.
“예. 걱정 마세요.”
이시무라는 여학생의 팔뚝을 툭툭 두드리고 서둘러 교실을 나섰다.
여학생은 일본인답게 일본도를 차고 있었다. 약간 동그란 단발머 리에 웃는 고양이상의 얼굴. 입은 교복은 검은색이 었다.
상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츠키? 맞나?”
그 말에 여학생의 웃는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사카시타입니다.”
“그러니까 사카시타 이츠키잖아. 이츠키가 이름 아니야?”
“……맞지만, 사카시타입니다.”
뭔 개소린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알았다. 상호는 책상을 가리켰다.
“그래, 사카시타도 가서 앉아.”
그때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이번엔 한 명이었다.
‘올때마다사람이 줄어드네.’
상호는 그 여학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 하얀 피부. 어째 여려 보이고 키도 작은 게 헌터와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등에는 한 손 반 서양검. 바스타드 소드를 매고 있었다. 입은 옷도 교복이라기보단 군복에 가까웠다. 단단하고 빳빳한 재질의 검은색 제복.
“어…….”
문은 힘차게 열어젖혔지 만. 여학생은 소심한 눈빛으로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다시 상호를 가리켰다.
‘한국말을 못 하나?’
분명 어느 정도 배운 아이들만 왔다고 했는데. 상호는 눈을 끔뻑이며 여학생의 이름을 확인했다.
“나데즈다?”
그러자 여학생이 기뻐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옷은 제복인데 행동은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러시아 헌터가 어떤지는 들었지만…….’
러시아는 땅이 넓은데 사람은 적어서, 몬스터들이 뛰놀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심지어 아르게스와 맞닿아 있기까지 했다. 덕분에 헌터가 아주 많이 필요했지만, 또한 편으로는 정부가 민간인들이 큰 힘을 얻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한 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어리고 약한 여자아이까지 군에 예속시키게 된 것이다. 그것도 7살 즈음부터 훈련을 해서.
여학생은 다시 자신을 가리켰다.
“나디아. 나디아.”
“나디아……라고 부르면 돼?”
“네!”
‘네’라는 한 글자는 아는 모양이었다. 듣는 것도 문제없는 모양이고.
상호는 책상을 가리키 며 말했다.
“나디아도 가서 앉아. 그런데…… 왜 혼자 왔어?”
나디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상호를 향해 경 례했다. 상호는 당황했지 만 곧 뜻을 알아들었다.
“군인.”
그녀가 이어서 차렷 자세로 섰다.
“당당하게? 혼자?”
그리고 제자리걸음을 시작했다.
“다녀야…… 한다고?”
“네!”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하긴 러시아 사람들은 귀찮은 걸 싫어하니까. 그래도 교사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그래. 알았어. 가서 앉아.”
그렇게 세 외국인 학생들도 전부 자리에 앉았다.
상호는 그제서야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검을 짚으며.
외국인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생님은 보다시피 몸이 좋지 않다.”
그 말과 동시에 교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목각인형이 일어섰다. 아이들의 눈이 더 큼지막해졌다.
“그래서 이 친구가 대신 수업해 줄 거야. 근데 이 친구 성격이 좀 드러워서, 학생이고 뭐고 없이 막 패. 좀 아플 수도 있어. 그리고 융통성도 없어서…… 다른 반 놀 때 수업밖에안한다.”
상호가 말을 이을수록 아이들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아, 말이 너무 빠르거나 못 알아듣겠으면 다시 말해 달라고 해.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근데…… 어차피 말은 별로 안 할 거야.”
상호는 씩 웃으며 엄지로 창밖을 가리 켰다.
“갈아입고 나와. 자기소개는 그다음에 하자.”
그리고 목각인형을 챙긴 후 교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교실에서 태화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삿깟이다~!
상호의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그토록 하지 말라고 했는데. 심지어 알아들을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분통이 터져버린 그는 곧바로 뒤돌아서 교실 문을 열었다.
“야. 이태화! 어디 남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아이들이 윗옷을 벗기 직전이었다.
태화는 문을 잡은 채로 굳어 버린 상호를 쳐다보다가 아비게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FBI?”
아비게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다른 두 외국인 아이들은 황급히 옷을 내렸다. 국제적으로 신고를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상호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옷을 갈아입는 지윤과 얼굴은 살짝 붉지만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세희, 그리고 헤실헤실 웃는 나빛이었다.
“수영복이 랑 속옷이랑 뭐가 다르노. 걍 후딱 갈아입으라.”
“그래도 지금 벗지 마. 선생님 곤란해하시잖아.”
“선생님, 부끄러워요……. 문 닫아주세요, 헤헤…….”
상호는 당장 문을 닫고 돌아섰다.
좀비처럼 비칠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머릿속엔 딱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