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겼다.
이겼는데.
이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야.”
“왜.”
소파에 누운 효은이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리를 하도 질러댄 탓이었다.
상호는 걸레로 유리창 쪽 바닥을 닦으며 이를 갈았다.
“진 사람이 치우기로 했잖아.”
“그래서?”
“내가 이겼는데 왜 내가 닦아야 돼?”
“닦지 마, 그럼. 놔두고 언니가 치우게 해.”
“미쳤냐?”
“싫지? 그럼 니가 치워. 난 상관없는데?”
효은은 뻔뻔하게 대답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 렸다.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모습에 상호는 열이 확 뻗쳤다.
“야, 니가 해.”
“싫다니까?”
“너 결혼하고 나서도 그럴 거야?”
“응.”
“청소다나시키게?”
“응.”
“너 요리도 안 하잖아.”
“응. 집안일 다 녀 시킬 거야.”
“운전도? 돈 버는 것도?”
“응. 그럴 건데. 싫어?”
효은이 핸드폰을 내리고 눈을 치켜 떴다.
“나싫어? 싫으면헤어질까? 응?”
깐죽거리는 것이 애인만 아니었으면 한 대 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력도 없는 일반인. 예전엔 진짜죽어라 싸웠으니까 배 한 번 때린 것쯤이야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이제는 장난으로라도 그러면 안 되었다.
그래도 화는 났다.
상호는 걸레를 집어 던지고 일어났다.
“야.”
살짝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봤지만, 효은은 전혀 겁내지 않았다.
그저 상호가 다가갈수록 뺨을 붉힐 뿐이 었다.
“왜?”
“너 이제 나한테 지잖아.”
다른 걸 말하는 게 아니 었다그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내가 힘으로 하면 어쩌려고 그래?”
상호는 효은의 뒤에 앉아서 그녀의 몸을 움켜잡았다. 부드럽지만 강하게.
“뭘 믿고 아직도 그렇게 짜증나게 하는 거야?”
“너.”
효은은 고개를 돌려 상호의 볼을 살짝 핥았다.
“넌 그럴 인간 아니니까.”
“누가 알아?”
상호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 두들기고 집안일 다 시키고, 밖에 놀러 다니기만 할지.”
“그래?”
효은이 웃었다.
“근데 난 그래도 좋을 것 같애.”
……졌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효은을 꼭 끌어안았다.
“다내가 할게.”
“응.”
“근데 밥 맛없다고 뭐라 하진 마.”
“할건데?”
효은은 키득거리며 몸을 돌려 상호를 안고 소파에 함께 쓰러졌다. 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이 상호의 얼굴로 쏟아졌다.
둘은 그 자리에서 저녁까지, 2주치 회포를 한 번에 풀었다.
〈불신>
“상호야.”
“응?”
“가운데로 와.”
민정이 그녀와 효은의 사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반대쪽에서 효은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상호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밤이 되어 셋이 함께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왜? 누나도 팔베개 한번 해 줘.”
민정의 목소리는 간절하기까지 했다. 효은도 민정을 거들었다.
“뭐 어때서 그래? 우리끼린 상관 없잖아.”
“뭘 상관이 없어?”
그래도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효은의 위로 넘어가 두 여자 사이에 누웠다.
팔베개를 해주는데 기분이 퍽 묘했다.
“됐어?”
“응.”
민정이 헤실거리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붙었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 난다. 그치? 상호야.”
“언제?”
“겨울에. 눈 엄청 쌓였을 때 있잖아.”
저승부대가 활동하던 곳은 강원도 너머. 이대륙 아르게스의 끝자락.
강원도보다 좀 더 북쪽이 었고, 주변이 바다인 데다가 산세와 바람의 영향 때문에. 상호와 부대원들은 겨울이 되면 정말 미치도록 쏟아지는 눈과 싸워야 했다.
사람 키만큼은 예사요, 심하면 좀 큰 나무 꼭대기까지 눈이 쌓여서 경공을 쓰거나 날아가지 않으면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뭐냐, 예니메르들한테 쫓길 때. 기억 안 나?”
“……아, 그때.”
예니메르는 두 발로 걷는 늑대처럼 생긴 몬스터 였다. 정확히는 늑대인간 종족의 분파로, 추운 지방에서 활동하는 부족들 증에서 제일 야성적이고 끈질긴 놈들이었다.
평소에는 아르게스 북부에 사는 놈들인데. 북반구에 겨울이 오면 활동 범위가 넓어져서 한국까지 출몰하곤 했다.
상호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둘만 작전 나갔을 때?”
상호는 어지간하면 예경과 같은 조로 편성되었었지만, 당시에는 동시다발적으로 긴급한 상황이 터져서, 부대원들 중 가장 강한 예경이 따로 행동했었다. 덕분에 상호는 민정과 같은 조가 되 었었다.
그렇게 둘이서 작전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부대원들과 만나기로 했던 장소, 비밀 임시 아지트로 돌아가는데 예니메르 부대가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만나는 놈들마다 착실하게 도륙을 내주었지만, 놈들의 추격은 끝이 없었다. 상호와 민정은 이대로 가다간 아지트의 위치를 들킬 것을 우려하고 일부러 빙빙 돌며 꼬리를 끊으려 했다.
잠도 못 자고 나흘을 그렇게 싸우고, 도망쳤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둘은 눈 쌓인 산에 보이는 동굴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냈다.
정말 지독하게 추운 밤이었다. 빛이 새어나갈까봐 불도 못 피웠고, 간단한 경계 마법만 설치했다. 상호의 외투로는 둘의 발을 감쌌고, 상호는 민정의 외투에 들어가부 둥켜안으며 함께 추위를 버텼었다.
다행히 그다음날 추격은 끊겼고, 둘은 아지트로 돌아가 부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응, 그때도 우리 같이 잤잖아. 그때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민정의 말에 상호는 눈을 끔뻑 였다.
“뭐가?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어?”
“뭔데?”
효은도 고개를 살짝 들자 민정이 잔뜩 신이 나서 설명했다.
“그때. 우리가 너무 추워 가지고 꼭 껴안고 잤단 말이야.”
“응.”
“근데 상호가 자다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나 봐.”
“……잠깐만.”
상호의 머릿속이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나 누나한테 실수했었어?”
“응? 아니, 딱히 실수는 아니었어.”
민정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 옷 속으로 손이 쑥 들어와 가지고…….”
“클럭!”
상호는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자리에서 도망치기 우1해. 하지만 두 여자의 머리가 팔을 꾹 누르고 있었다.
효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상호를 째려보았다.
“어떻게 그걸 헷갈려? 몸이 완전히 다른데…….”
“자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잠결이라도 딱 알아차려야지. 이제 보니까 완전 난봉꾼이네, 이 새끼. 무슨 순정 사랑꾼인 척하더니.”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착각할 리 없긴 했다. 예경은 어릴 때의 상호보다도 약간 키가 작았고, 민정은 조금 큰 편. 키뿐만이 아니라 체형도 그랬다.
효은의 코웃음에 상호는 반박할 기력이 싹 사라졌다.
“민정 누나, 미안해…….”
“좀 아프긴 했어. 힘이 세더라.”
“깨우지 그랬어…….”
“깨우면 어색해지잖아.”
민정은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키득거 렸다.
“그리고 며칠을 못 잤었으니까. 깨지 말고 자라고, 그냥 그대로 놔뒀어.”
“대체 왜…….”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자자. 나 내일은 애들 보러 가야 돼…….”
“오늘은 효은이로 착각하려 나?”
“절대 안 해.”
“킥킥킥…….”
웃던 민정과 효은도 곧 눈을 감았다.
* * *
상호는 눈을 떴다.
아직 한밤중이었다. 왜 눈이 뜨였는지 의아해하는데 왼팔에 머 리카락이 스쳐 지나갔다.
민정이 몸을 일으킨 것이 었다.
상호는 작게 물었다.
“연구하러 가?”
어둠 속에서 민정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민정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응. 계속 자.”
그 손에서 마나가 느껴졌다.
상호는 무의식적으로 호신강기를 만들어 마나를 막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본능으로 한 일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깨달았다. 민정이 그에게 마법을 걸려 했음을.
‘……뭐지?’
그녀가 그에게 해코지를 할 리는 없었다. 아마 수면 마법일 테지만, 뭔가 찝찝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민정은 마법이 제대로 걸린 줄 알았는지,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고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그 손에서 다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상호는 당장 일어나서 따졌을 터 였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민정이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멀리 가진 않았을 거고.’
저 정도의 마나와 주문 속도라면, 해봤자 이 건물 내부.
상호는 오른팔을 벤 효은을 조심스럽게 베개로 옮기고 윗몸을 일으켰다.
학회 빌딩은 100층, 높이는 500111쯤.
‘좀 무식한 방법 이긴 하지만…….’
무예가인 상호에겐 민정을 추적할 방법이 많지 않았다. 상호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내공을 한껏 끌어올려 몸 밖으로 내뿜었다.
보이지 않는 강대한 기운이 빌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컥…….”
근히 자고 있던 효은이 가슴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쳤다. 상호는 깜짝 놀라 내공을 급히 거두었다.
이제 일반인이 되어 버린 효은에겐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효은의 입에서 연신 기침이 튀어나왔다.
“콜록, 콜록…….”
“미안, 미안해…….”
상호는 효은을 끌어안고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 등을 쓸었다. 어느 정도 달래주고 나자 효은이 축 늘어져 다시 잠에 들었다.
하얀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큰일 날 뻔했네.’
여기서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상호는 검을 찾아 짚고 방을 나섰다.
거실까지 걸어간 그는 엎드려서 바닥에 양 손바닥을 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공을 쏟아부었다.
빌딩 안의 마법사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호는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단 한 명. 이 무식한 기운을 느끼고도 딱히 놀라지 않을 최강의 마법사.
그 마법사는 지금 빌딩 지하에 있었다.
‘멀리도있구만.’
상호는 통유리창을 돌아보았다.
* * *
새벽. 아무도 거닐지 않는 시간.
거리를 청소하던 환경미화원의 입에서 당황성이 터져 나왔다.
어이쿠.”
보도블럭 위에 사내가 대자로 뻗어 있었다.
이 한밤중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니. 술이라도 먹은 걸까. 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야 할까. 미화원은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내의 주변은 움푹 파여 있었다.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 쥔 검이 미화원의 눈에 띄었다.
‘헌터인가?’
“저기…….”
미화원이 말을 걸자 사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오, 드럽게 아프네…….”
신음하며 허 벅 지를 주무르던 사내는 미화원을 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검을 지팡이처럼 짚으며 높은 빌딩을 향해 걸어갔다.
미화원은 사내를 보며 눈을 끔뻑 였다.
‘뭐여, 저 양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