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둘은 학회 건물에 들어섰다.
하도 많이 찾아와서 이제는 프리패스였다. 상호는 날아드는 종이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민정 누나.”
[확인하였습니다.]
그가 종이새를 찢자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下?. 1층의 로비에서 민정의 집으로.
효은이 수녀 모자를 벗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언니 집이야?”
“어.”
“이렇게막들어와도돼?”
“나니까.”
상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민정을 찾았다. 안방 문이 닫힌 것을 보니 아마 저 안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효은이 또 물었다.
“많이 와봤나 봐?”
“태화데리고자주 왔지.”
“흐으음….”
효은이 의심 깃든 눈빛으로 쳐 다보았지만, 상호는 무시하고 안방으로 향했다.
그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민정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는지 머리가 부스스했다.
“상호 왔구나…… 응?”
민정은 상호에 뒤에 선 효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다 일어나서 눈이 침침한듯했다. 눈을 가늘게 떴다가 크게 떴다가,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화들짝놀라며 효은에게 달려갔다.
효은이야?!”
“응.”
“효은이 너, 너 요즘 뉴스에 많이 나오던데. 실종됐다고……, 그동안 상호랑 같이 있었던 거야? 웬일이야? 너희가 어쩐 일로 같이
“다사정이 있어.”
“걱정했잖아……. 그나저나 염색 이쁘게 했네.”
민정은 끝은 하얗고 뿌리는 까만 효은의 머리를 쓸어내 리며 말했다.
민정이 아는 효은의 원래 머리색은 새하얀 백발. 즉 민정의 말은 검은색 쪽 염색이 잘 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제 효은의 진짜 머리색은 검은색이 되었다.
“이거 염색 아냐.”
“응?”
“나 일반인 됐어. 성력도 없어지구.”
“어……떻게?”
“쟤랑 자다가.”
효은이 상호를 가리키며 웃었다.
민정은 그 말을 듣고 떡 벌어진 입을 양손으로 가리며 상호와 효은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너희가?”
“응.”
효은이 방글거 리며 잔뜩 신난 채로 말했다.
“얘가 먼저 좋다고 달려들더라.”
“지랄하지 마, 맨 처음 고백한 건 너잖아.”
상호가툴툴거렸지만 민정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정은 상호와 효은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비틀거리며 둘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둘을 꽉 끌어안았다.
“뭐야. 언니……. 갑자기 왜 그래.”
“냅둬.”
효은이 당황하며 민정을 밀어내려 했지만, 상호는 핀잔을 주며 민정의 등을 토닥였다.
예경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민정은 예경과 가장 나이가 가까웠다. 같은 여자이기도 했고. 그래서 둘이 가장 친했다.
아니면 전우들이 잘 지내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민정을 달래는데, 그녀가 흐느끼며 따지듯이 말했다.
“흑, 윽, 너희들……, 너희가 몇 살이라고 벌써……!”
“응?”
“나는 아직도 남친 하나 없는데……! 너희만 먼저……!”
그쪽이었던 걸까.
어안이 벙벙한 상호를 대신해 효은이 민정을 보듬었다.
“걱정 마, 언니. 우리 결혼 안 해.”
“뭐? 그건 또 무슨
민정이 울음을 멈추고 그들을 멀뚱멀뚱 쳐 다보았다.
상호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그런 일이 있어. 그것 때문에 온 거야.”
* * *
“불임?”
“응.”
소파에 앉은 상호는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효은을 돌아보았다.
“힘든 게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대.”
마주 앉은 민정이 진단서를 흝어보며 물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거야? 효은이가 임신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 였다.
민정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불임을 고칠 수 있는 마법 같은 건 없어. 아무리 마법이 물질에 대해서 만능이라도…… 그런 식으로 인과를 건너뛰고 결과만 창조하는 건 불가능해. 그런 건 주술의 영역이지.”
“그럼 영주 오빠를 찾아야 하……?”
효은의 말에 민정은 쓰읍 하고 소리 내어 주의를 주었다. 효은도 실수를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그녀답지 않게 상호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됐어.”
상호는 검을 만지작거 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어쨌든.”
민정이 빠르게 화두를 꺼냈다.
“방법이 있긴 해.”
상호와 효은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더 간절한 건 상호였다.
“있어?”
“마법공학으로 난자를 만들 수가 있어.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고 착상하고 이식하고 품이 많이 들겠지만…… 하다 보면 될 거야.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민정은 상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 지 못했다.
상호는 그 점을 이상히 여기 면서도. 일단 방금 들은 소식을 기뻐하며 효은을 돌아보았다.
“된대.”
“……응.”
효은의 눈은 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민정이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 마침 내가 난자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거든.”
그 말 또한 이상했다.
상호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누나가 그걸 왜 연구해?”
민정의 시선이 아주 잠깐 동안 상호의 다리를 향했다.
“……비밀이야.”
“우리한테도 비밀이야?”
“응. 그냥사적인 일이라서.”
“섭섭한데.”
상호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고마워. 그럼 그 난자는 어떻게 만드는 거야?”
“효은이 세포가 있으면 돼. 피부를 살짝 떼어낼 거야. 난자를 만드는 건 얼마 안 걸려. 착상을 시도하고 뱃속에 이식하는 게 문제지. 그건 잘 안 될 수도 있어.”
“그럼…….”
상호의 눈이 효은을 향했다.
“지금 하자?”
“글쎄.”
효은이 고개를 기웃하자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는 또 뭐가 글쎄야. 잘 안 될 수도 있다는데 빨리 해야지.”
“굳이 일찍 할 필요는 없잖아? 둘이서 더 지내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도망쳤어? 너 시발 이리 와봐. 이야기 좀 해.”
“아니, 나빛이 문제도 있잖아. 너 나빛이 죽일 거야? 나한테 한 거 그대로 나빛이한테 해줘야 한다니까?”
둘의 이야기를 들은 민정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야? 나빛이면 네 제자 아니야?”
“누난 몰라도 돼.”
“우리 사이에?”
“제발 모른 채로 있어 줘…….”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 민정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효은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셋이서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밖에 놀러 갈까?”
“아니……, 그러고는 싶은데…….”
민정이 하품을 했다.
“연구가 바빠서, 나가서 놀진 못할 것 같아. 피곤하기도 하고……. 쪽잠 자고, 연구하러 가고, 쪽잠 자고. 연구하러 가고, 남친은 없고…… 얘들아, 나 외로워
“그렇게 바빠?”
“응. 계속 지켜봐야 하는 거라서……. 이제 또 가야 해. 너희는 이제 뭐 할 거야?”
“우리?”
상호와 효은은 눈을 마주쳤다.
사실 민정을 만난 뒤에는 예정된 계획이 없었지만, 일단 방을 잡아 외박을 하면서 뒹굴고 껴안을 것만은 확실했다.
“그냥, 둘이서좀지내려고.”
“그럼 자고 가. 낮엔 둘이 있고, 밤에 나 오면 그때 셋이 같이 자자. 옛날처럼. 응?”
상호는 효은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효은이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럴게.”
“그럼 나 갔다 올게. 둘이 쉬고 있어. 먹을 거 맘대로 먹고……. 나 갈게.”
민정이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빛에 휩싸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호는 소파에 한껏 늘어 졌다.
‘잘됐네.’
설명을 들어보니 평범한 체외수정처럼 진행이 되는 모양이었다. 효은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한결 편했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진 않았다. 또 다른 문제에 신경이 쓰여서.
대체 민정이 왜 그런 기술을 연구했을까.
지금 한창 바쁘다는 연구는 또 무엇일까. 그의 다리를 향했던 시선은 어떤 의미일까.
상호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데, 효은이 주변을 좀 둘러보더니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야.”
“왜.”
“우리 저기 가서 해보자.”
효은이 가리킨 곳은 통짜 유리창이었다.
민정의 집은 고층 빌딩의 최상층부. 통짜유리창 너머로는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상호는 효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를?”
“그거 있잖아, 영화에서 보면 저기 창문에서 손 얹고…….”
그제서야 뜻을 깨달은 상호는 흙 씹은 표정을 지 었다.
“너는 진짜…… 누나 집에 와서까지 이러고 싶어?”
“해조~ 해조~.”
효은이 앙탈을 부리자 상호의 뒷목이 팍 당겼다.
“……너 대체 몇 살이야? 우리 애들도 그렇게는 안 해.”
“몰라~ 해조~ 2주일 쉬었잖아~.”
“니 그거 중독이야. 좀 참을성을 길러 보라고.”
“못 참는 건 너잖아. 븅신 토끼 새끼.”
그 말에 상호는 효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