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 태화야. 괜찮나?”
지윤이 태화의 어깨를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데이.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인디…….”
태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일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대체 왜 가장 친한 친구와 이렇게 싸우게 됐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에서, 학교에서. 세상에서 제일 잘 이해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세희랑 쌤 오면 내가 사과할텡게, 니는 너무 마음 쓰지 말어.”
지윤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화는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잡았다. 그런 그녀를 지윤과 나빛이 동시에 붙들었다.
“으데 가노. 쌤이 금방 온다 캤는디.”
“앉아서 기다리자, 태화야…….”
둘은 짜기라도 한 듯 합을 척척 맞추며 태화를 자리에 앉혔다.
태화는 그 말대로 앉아서 기다렸다. 머릿속이 멍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때 가방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머여, 쌤 아니가? 빨리 받아바라.”
지윤이 닦달했다.
태화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았다.
정말 상호였다.
“……네, 쌤.”
[태화야.]
상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세희가 안 보여. 기숙사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자기 방에도 없고. 혹시 세희가 갈 만한 곳 알아?]
알고 있었다. 열쇠를 세희에게 줬으니까. 순간이동으로 다니는 태화에게는 열쇠가 아예 필요 없었다.
태화는 어눌하게 더듬거 리며 말했다.
오늘따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네, 그……제 방에, 있을 수도 있어요…….”
[와서 확인해 줘. 선생님은 다른 곳도 확인해볼게.]
“네…….”
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윤과 나빛을 놔두고 혼자 순간이동을 했다.
그렇게 본관 1층으로 내려온 후, 다시 순간이동을 하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이화관 앞에 도착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내 방에 세희가 있으면…… 어떻게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다시 사과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마음 같아서는 꼭 껴안고 침대에 눕혀서, 평소처럼 장난이라도 치고 싶었다.
‘……오늘부턴안되려나.’
태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순간이동했다. 돌바닥이 그녀의 방바닥으로 바뀌 었다.
고개를 들기가 싫었다그
세희를 만나는 것이 싫었다. 정확히는 세희와 또 싸우는 것이. 태화는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눈에 띄었다. 방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 한 켤레.
세희의 신발이었다.
태화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어?”
태화의 입술 사이에서 당황성이 튀어나왔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발이었다. 작고 예쁘지만 굳은살이 많이 박인 발.
발은 공중에 뜬 채로 아주 조금씩, 옆으로 흔들거 리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태화는 덜덜 떨며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올렸다.
“……꺄아아아악!”
대롱대롱 매달린 소녀.
쏟아지는 앞머리 사이로 감은 눈이 보였다그 살짝 벌어진 입에서 침이 뚝뚝 흘렀다.
가벼운 몸은 미동도 없이 나무토막처럼 달랑거렸다.
“꺅! 꺅! 세, 세……으으……
태화는 이름도 똑바로 못 부르고 황급히 뛰어올라 밧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세희의 목에서 밧줄을 벗겨내고, 바닥에 똑바로 눕혔다.
손이 덜덜 떨렸다.
“세희야, 천세희……. 멍청아, 정신 좀 차려…….”
안 돼, 안 돼, 안 돼.
생일인데. 나만의 날인데.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쌤한테 선물 뜯어낼 생각으로만 가득했는데.
왜 하필 오늘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화는 양손으로 세희의 두 뺨을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철철 흘렀다.
“멍청아……. 나오늘 생일이란 말이야……. 왜 하필 오늘이야? 이러면 오늘도, 내년에도, 평생 못웃는단 말이야 태화가 세희의 품에 얼굴을 묻었을 때.
무언가가 그녀의 꼬리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알아.”
“…어?”
태화는 어안이 벙벙했다.
얼굴에 세희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생일 축하해, 바보야.”
세희는 그렇게 말하며 태화를 거꾸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세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웃음을 본 태화는 안심하고. 화나고, 기쁘고, 짜증 나서.
울음을 터트리며 세희의 멱살을 잡았다.
“또라이년아!”
“흥. 반년 동안 당한 거 한방에 갚은 것뿐이 야.”
세희가 태화의 꼬리를 문지르자 태화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태화는 바닥에 널브러졌지만 욕을 멈추지는 않았다.
“미친년……. 진짜……, 정신나간……. 꺄아악!”
“뭘 또 놀라냐. 아직도 놀랄 기운이 있는 걸 보니 덜 놀랐구만.”
침대 아래에서 상호가 기어 나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너 침대 밑도 청소 좀 해. 저기 먼지 쌓이면 청소 아무리 해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야. 가뜩이나 방도 좁은데 상호는 핀잔을 날리면서도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화는 울먹이면서 물었다.
“뭐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거지 뭐.”
상호의 말과 동시에 태화와 세희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너무 쉽게 속더라. 천장에 밧줄 묶을 데도 없는데. 눈썰미 좀 키워 둬. 그게 다 전투에서 도움이 되는 거야.”
멍하니 세희와 밧줄을 쳐다보던 태화는 이를 악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상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으, 으으…… 쌤, 쌤이 제일 나빠요!”
“응?”
“쌤이, 쌤이 속이면 속을 수밖에 없잖아요! 반칙이야!”
“그런가? 그럼 그렇다 치자. 얘들아.”
상호가 문가를 향해 소리치자 지윤이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왔다.
손에는 촛불 꽂힌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나빛이 지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어라?”
태화는 문가로 달려가 케이크를 뺏어들었다.
그리고는 상호와 세희를 향해 달려갔다. 상호는 팔을 뻗었고, 세희는 몸을 웅크렸다.
“꺅!”
“야, 야 그거 비싼 거……
“몰라! 씨바!”
태화가 팔을 힘껏 휘둘러 상호의 얼굴에 케이크를 처박았다.
케이크 속에서 상호의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나야……?”
“야야. 묵어라. 비싼 거니까 어떻게든 묵어야 한데이.”
“선생님, 눈에 딸기 제가 먹어도 돼요?”
“맛있다, 헤헤…….”
아이들이 깔깔거 리며 상호의 얼굴에서 케이크를 떼어갔다.
태화도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상호의 입 주변으로 손을 뻗었다.
“앗! 태화 막아! 제일 맛있는 부분 가져간다!”
“뭘 막노. 내거다 마. 비키라.”
“꺼져! 내 생일이야.”
태화는 케이크를 먹었다.
달고, 달고, 달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얻은 상처가 싹 녹아 사라지는, 그런 맛이었다그
* * *
케이크를 다 먹은 후. 침대에 선물이 하나씩 쌓였다. 나빛이 가방, 지윤이 옷, 세희가 화장품.
상호의 차례가 되자 아이들과 태화가 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뭐 준비하셨어요?”
“별건 아니고…….”
상호는 등 뒤에서 선물을 꺼냈다.
머리에 구멍이 난 모자였다.
“뿔 넣는 모자야. 머리 조이는 부분을 열 수가 있어서…… 너처럼 뿔이 좀 넓게 떨어져 있어도쓸수 있어.”
태화는 모자를 받아들며 물었다.
“얼마예요?”
“너는 그게 중요하냐……, 주문제작이야. 그냥 적당히 주고 만들었어. 그리고.”
선물은 하나가 아니 었다. 상호는 또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곰인형이었下?.
세희와 나빛, 지윤이 인형을 보고 웃었다.
“뭐예요? 테디 씨 아들? 아니, 낡았으니까아빠인가?”
“쌤 물건입니꺼?”
“어, 그럼 저 주세요.”
“아니야.”
상호는 고개를 젓고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인형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 렸다.
“뭐지……?”
“본 적 있어?”
“잘……잘 모르겠어요.”
“그래?”
상호는 씩 웃었다.
다름아닌 태화의 집에서 가져왔던 인형이었다. 어젯밤 자신의 집에 가서 가져왔었다.
안에는 태화의 어 릴 적 사진을 넣어 놓았다.
“버리지 말고, 한 번 세탁했으니까 절대, 절대로 다시 세탁하지 마. 물에 젖게 하지도 말고.
“왜요? 돈이라도들었어요?”
“……아니. 아무것도안들었어.”
이상한 쪽으로 눈치가 빨라서 참 속이기 힘들다.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태화는 인형을 받아들며 눈을 끔뻑였다.
“뭔가…… 뭔가 익숙한데.”
“맘에는 들어?”
“음……, 네. 맘에 들어요. 뭔가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잘 간직해 놔. 내가 산 건 아니지만.”
“네? 그럼 누가 샀어요?”
태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지만, 상호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웃기지 않냐?”
“뭐가?”
상호는 신호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되물었다.
조수석에서 효은이 씩 웃었다.
“수녀를 임신시키겠다고 데려가는 게.”
말만 들으면 그렇기도하다.
토요일. 상호와 효은은 민정을 만나기 위해 마법학회로 향하는 중이었다. 둘 사이에 아이를 만들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우]해.
상호는 차를 출발시키 며 대답했다.
“웃기면 뭐 어때. 준비나해 둬.”
“준비?”
효은이 눈을 깜빡였다.
상호는 손을 뻗어 효은의 배를 슬쩍 쓸었다.
“욕도 좀 줄이고. 좋은 생각 하라고.”
그 말을 들은 효은은 몸까지 배배 꼬며 끅끅 웃었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왜 웃어?”
“너랑 나 사이에 애가 생기면…… 걔는 태어날 때 응애 씨발~ 이러면서 나올 거야, 낄낄낄
“미…….”
미친년, 이라고 말하려던 상호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을 고쳤다.
“머리에 우동사리 든 여자야. 진짜.”
“뭐래, 어머니 아버지 안 계시는 분께서.”
“너는씨……. 에휴, 너는있어?”
효은이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있지, 그럼.”
“뭐? 계신다고?”
“몰랐냐? 나 엄마 아빠 다 살아 있는데.”
금시초문이었다. 상호는 어이가 없었다. 6년을 그렇게 알고 살아왔는데.
그리고 그 말은, 심지어 죽어갈 때도 부모님에게 가지 않고 상호에게 왔다는 뜻이었다.
“아니 누가 봐도 고아처 럼 살았잖아!”
“너 빼고 다 알고 있을걸?”
“아니……, 아니 그럼. 아버님 어머님한테 내 얼굴도 안 보여주고 임신하려고?”
“몰라, 내가 좋으면 됐지 뭔 상관이야.”
“너는 대체…… 어휴.”
상호는 생각을 포기하고 조용히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