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호가 열쇠로 문을 따자 나빛이 안으로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
“네. 아, 찾았어요.”
나빛이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박스였다. 골판지 박스.
상호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 나빛아. 그거는…….”
“응?”
나빛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이런 거 좋아하세요?”
“아니,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수녀님이……. 아니, 그냥 쓰는 물건이지. 누가좋아하고 자시고가 아니라.”
“수녀님이 그러시던데요. 이거 쓰면 선생님이 좋아하신다고……. 아!”
나빛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상자에서 수갑을 꺼내 손목에 찼다.
“제가 하면 선생님이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수갑을 찬 나빛의 모습을 보자 상호의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렸다. 지금 저 꼴을 남이 봤다가는 저 은빛 팔찌가 고스란히 그의 손목에 채워질 터였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나빛은 목줄까지 집어 들고 있었다.
효은이 그에게 채웠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근데 이건 다 어디다 쓰는 거예요?”
“쓰는 거 아니야! 빨리 내려놔.”
“엥, 쓰는 물건이라고 하셨으면서…….”
잔뜩 식겁한 상호는 나빛의 말을 무시하고 수갑과 목줄을 잡아 뚝뚝 끊어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박스도 검으로 쳐 침대 밑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앗, 수녀 님 이 저한테 선물로 주신 건데…….”
“쓰레기야, 쓰레기. 저걸 어따 써. 그냥 너한테 장난친 거야. 가자. 나가자.”
“그래요?”
나빛은 순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하더 니, 이내 빙긋 웃으며 상호를 따라 방을 나섰다.
“근데 선생님.”
“응.”
“선생님 별명이 왜 토끼예요?”
“……토끼 아냐.”
“수녀님이 그랬는데…….”
“아니라니까.”
“애들한테 말해 줘도 돼요?”
“절대안돼…….”
“헤헤.”
나빛은 헤실거리며 웃었다. 재미있는 비밀을 간직한 아이처럼.
〈악우>
효은을 만난 날 밤. 상호는 남교사 숙소에 들어와 TV를 켜고 침대에 앉았다. 오늘도 TV에는 지난 며칠 동안 나왔던 내용과 똑같은 내용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X급 헌터의 실종.
한동안 사회가 시끌벅적했다. TV는 연일 효은에 대한 뉴스를 내보냈고, 신문에도 그녀의 이름이 대서특필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론을 펼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참전자에 대한 처우개선이 필요하다느니, 신의 계시를 받은 거라느니. 효은이 성창으로 글자를새겼던 구원교단의 예배당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틀림없는 신의 계시라며. 그리고 그게 사실이긴 했다.
상호는 침대에 앉아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거기서 로또 번호를 찾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켜고 도현의 번호를 눌렀다.
저승부대의 생존자 5명 중에 X급을 택한 것은 단 두 명, 도현과 효은뿐.
나머지 셋 중 한 명은 마법학회 건물 꼭대기에 틀어박혀 살았고, 한 명은 백수로 살다가 최근에야 여고 교사가 되었고, 또 한 명은 모든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홀연히 사라졌다. 부대원들마저도 그 한 명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이제는 효은까지 잠적했으니, 도현만이 홀로 X급 헌터, 세상에 거취가 알려진 유일한 저승부대원이었다.
덕분에 요즘 한창 바쁜 모양이 었다.
상호는 도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를 쳤다.
“형!”
[뭐야 씨……, 왜 소리를 질러. 뭐 좋은 일 있냐?]
“기자팼다며!”
그렇게 묻는 상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신난 기색이 있었다. 반면 도현의 대답에는 한숨이 섞였다.
[하……. 그래. 팼다. 안 그래도 요즘 짜증나 죽겠는데 그 양반이 선을 넘어도 너무 넘어서…….]
“낄낄낄……, 대장이 이 꼴을 봤어야 하는데. 제일 먼저 민간인 팬 게 내가 아니라 형이네.”
사실 증선을 때린 적이 있긴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실컷 웃던 상호는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왜 때린 거야? 뭐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났다드만.”
도현은 남한테 절대로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 호인이 얼굴에 주먹을 날릴 정도라니.
상호의 의문은 곧 풀렸다.
[효은이 사라진 게 나 때문이래. 웃긴 게…… 시발. 설명하기도 어렵네. 그 뭐냐, 기사를 쓸 때는 인터뷰를 하고 쓰든가 해야 할 거 아냐?]
“응.”
[근데 이 새끼가 기사를 이미 올렸어. 효은이하고 내 사이에 애가 생겼대. 그래서 실종된 거래. 그것만 해도 빡치는데 시발놈이 자꾸 질문을 이상하게 하면서 유도하더라고. 이미 써놓은 기사에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고. 그래서…… 쳤지.]
상호는 웃지도 못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 었다.
불임 때문에 마음 상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임신 때문에 숨었다고 한다. 당사자들 마음에 불을 지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주 제대로 달성한 셈이었다.
“그래서, 잘 팼어?”
[네 몫까지 팼다. 넌 찾아가지 마. 학생들 챙겨야지.]
“아니, 알아. 내가 찾아가겠단 건 아니고. 뭐 형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합의했어?”
[합의를 왜 해? 그 염병할 놈하고. 벌금 내겠지 뭐.]
하긴 감옥에 가진 않을 터였다. X급 헌터를 가뒀다가는 나라가 손해고, 가둘 방법도 없고. 끽해야 가택연금일 터였다. ‘제발 집에서 나오지 말아주십쇼’ 하고 비는것이 고작이다.
“잘됐네. 형도 이참에 좀 내려놓고 살아.”
[그러고싶은데 아버지가…….]
“혼났어?”
[안 났겠냐? 아들이 사람 팼다고 동네방네 소문 다 났는데. 네가 망나니냐면서 된통 깨졌지.]
“그래도 뭐, 이번에 혼쭐냈으니까 알아서 피하겠지, 기자들도.”
[그러길 바라야지……. 그래서, 효은이는 찾아갔어?]
상호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에 반쪽 달이 떠 있었다.
“응.”
[뭐래?]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래.”
[그래서 너는 뭐랬냐?]
“조까라고 하고 입술 박았어. 근데…… 내가 결혼하자고 하면 또 도망칠 것 같아서. 일단은 주말에 보자고 하고 헤어졌어.”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하아, 잘 되나 싶더니만 왜 하필 그런 일이……. 그래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 그래라. 마법도 있는 세상이니까,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야지, 뭐.”
[민정이한테 연락해 봐.]
상호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긁적 였다.
“……설마 임신마법 같은 게 있을 리는 없잖아.”
[있을 수도 있지 인마. 불도 만들고 얼음도 만드는데. 손가락으로 딱 가리키면 애가 덜컥 생길 수도 있지.]
“그게 뭔 미친 마법이야, 졸라 무섭네……. 어쨌든 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형은 그거 잘 해결해.”
[그래, 힘내고. 잘 지내라.]
도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끊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정에게 가면 방법이 있을까.
어쨌든 평일 동안에는 찾아가지 못할 테니, 주말에 효은과 함께 가면 될 것 같았다.
‘생각난 김에 문자나 할까.’
상호는 효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야
-왜
-밥먹었어?
-응
-뭐 먹었어
-몰라기억안나
‘……잘 살고 있나 보구만.’
맛없으면 맛없다고 유난을 떨었을 텐데, 불평이 없는 걸 보니 그럭저럭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지금은 뭐해? 잘 시간인가?
그러자 사진이 하나 올라왔다. 잠옷 차림의 효은이 화면을 향해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이어서 문자도 도착했다.
-너도 뽀뽀 찍어서 보내
‘염병…….’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징그러운 거 할 줄 모르는데.
결국 그는 최근에 아이들에게 배운 손가락 하트를 끽어서 보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곧 효은에게서 답장이 왔다.
-뽀뽀 해줄 때까지 안 잔다
‘아오……. 이럴 거면서 도망은 왜 쳤어?’
상호는 한탄하며 입술만 나오게 사진을 끽고 전송했다.
-됐지? 잠이나자이제
-웅~
이제 된 걸까. 안심하며 침대에 널브러지는데, 핸드폰이 또 한 번 울렸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 며 핸드폰을 켰다가 살짝 놀랐다.
‘뭐야, 세희네.’
세희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선생님
-응세희야
-내일 태화생일인 거 아세요?
상호는 당황하며 핸드폰 달력을 켰다.
내일은 8월 17일 월요일.
아이들 생일은 깜빡하고 달력에 표시해놓지 않았다. 생일이란 개념 자체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하지만 상호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알지
-선물 준비하셨어요?
준비했을 턱이 없다그 상호는 시계를 보며 머 리를 긁적였다.
‘내일은 시간이 없고. 지금 갔다 와야겠네…….’
-응
-어떤 거요?
-비밀
-전 이거요
세희가 올린 사진에는 웬 밧줄이 찍혀 있었다. 동그랗게 올가미의 형태로 묶인 굵은 밧줄.
꼭 교수형에 쓰일 듯한 모양이 었다.
-뭐야 그거
그렇게 답장을 보내자 세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호는 전화를 받았다.
“어, 세희야. 너 그거…… 뭐야?”
[선생님.]
세희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태화 속이는 것 좀 도와주세요.]
* * *
다음 날 아침, 남교사 숙소 앞에는 지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윤이 밖으로 나온 상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쌤!”
“어, 일찍 나왔네.”
“태화 그 가스나 무조건 아침 일찍부터 쌤한테 들러붙을 테니까예.”
벌써 시작인가. 상호는 어젯밤 세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희는?”
“태화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심더. 방에 몰래 들어가서 준비해 놓는다고.”
“들어갈수있어?”
“갸들은 열쇠 같이 쓰고 다닙니더. 부부라니까예.”
그 정도로 친하면서 왜 이런 지독한 장난을 꾸미는 건지.
“지윤아.”
“예.”
“태화……, 세희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그거까진 모르겄는디예.”
둘은 본관을 향해 걸었다.
이화관 앞을 지날 때쯤, 태화가 쌩 달려와 상호의 옆에 붙었다. 지윤의 말이 꼭 맞았다.
태화는 실실 웃으며 상호의 허리를 검지로 찔렀다.
“쌤, 쌤.”
“응.”
“오늘 무슨 날인지 알…….”
그때 지윤이 태화의 말을 끊었다.
“쌤요. 지궁금한게있는디예.”
“아, 응.”
“2학기 일정 있잖습니꺼. 언제 알려주시는지…….”
“오늘 알려 줄게.”
상호도 일부러 태화에게 등을 돌리고 지윤의 말에만 대답했다.
하지만 태화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옆을 폴짝폴짝 뛰며 눈길을 돌리려 했다.
“쌤쌤쌤! 오늘, 오늘 무슨 날이게~요…….”
“맞다, 지윤이 너 반탄강권 말고 유술도 잘 연습하고 있어?”
“예, 세희가 도와줍니더.”
상호는 그 말을 듣고 뜬금없이 애 먼 태화를 타박했다.
“너도 다른 애들처럼 공부 좀 여러가지로 해라. 마법 하나 배웠다고 퍼질러 놀지 말고.”
태화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중선이 찾아왔을 때와 같은 낯빛이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뜨끔했다.
‘생일인데 너무 갑자기 혼냈나…….’
그 후로 태화는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말없이 걸었다.
본관에 도착한 상호는 두 아이를 교실로 보내고 교무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교실에 붙여놓을 일정표를 프린트하고 있는데, 교무실 문을 열고 세희와 나빛이 들어왔둘이 조용히 종종걸음으로 다가오자 상호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나빛이 일찍 왔네.”
“헤헤, 세희가 재밌는 거 한다고 그래서…….”
재밌다기보다는 독한 일이었다. 상호는 프린터에서 종이를 꺼내며 물었다.
“세희야.”
“네.”
“태화한테…… 악감정 있어?”
“아니요.”
세희가 살짝 웃었다.
“재밌잖아요.”
요즘 애들 너무 무섭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자리 에서 일어났다.
“교실 가자,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