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501)

* * *

“여기 사시는 거예요?”

“응.”

상호는 열쇠를 꺼내 도어락을 열었다. 나빛이 그 열쇠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왜 열쇠를 가지고 계세요?”

“그…… 여행 갔다 와서…… 방학 동안 같이 살았어.”

그 말에 나빛의 얼굴빛이 살짝 풀어졌다.

상호는 문을 열며 나빛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상태를 살폈다. 효은이 옷을 안 입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효은은 침대에 없었다.

집 안 어디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외출…… 했겠지.’

상호는 심장이 욱신거 리는 것을 느끼며 현관을 향해 말했다.

“나빛아, 들…….”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식탁 위에 놓인 종이였다.

얇은 人4지 서류뭉치와 편지지 하나.

상호는 그곳으로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진단서였다.

‘무난자증?’

난생처음 듣는증상이었다. 그 밑에 상세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월경의 흔적과 정상적인 자궁의 발달 상태, 정상적인 호르몬 분비 등을 보아, 선천적 체질이 아닌 후천적 요인으로 난자와 난모세포만 없어진 것으로 사료됨.

후천적 요인.

분명 천사화 때문이겠지만. 상호는 효은의 배를 때렸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아니겠지만.

단 1퍼센트의 확률이라도 있다면.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 병신 새끼

상호는 이를 갈며 편지를 집었다. 눈앞이 아른거려서 읽기가 힘들었다.

편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토끼야.

‘지랄…….’

첫 줄부터 이러기냐.

상호의 눈동자가 다음 줄을 향했다.

-나 불임이래.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어. 너랑 자기 직전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확하진 않으니까. 어쩌면 전쟁 때 이미 그랬을 수도 있고.

-특히 신앙인들은 이런 거 안 하니까, 사례가 없어서 알 방법이 없네. 어쩌면 나빛이도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상호는 뒤에 서 있는 나빛을 흘끔하고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나빛에 관한 내용도 신경이 쓰였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불임이면 불임인 거지 대체 왜 떠났는가.

-그동안 너무 억지 부렸지. 미안해.

‘미안하긴 뭘 미안해, 미친년아. 안 어울리는 말 제발 하지 마…….’

-더 이상 네 앞길 막지 않을게. 나도 이제 천사화 다 없어졌으니까. 너도 이제 나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 이제 성력 못 써. 성창도 안 나오고 치료도 못 해. 네 눈이랑 다리는 꼭 내가 고쳐주고 싶었는데…… 그건 이제 나빛이한테 맡겨야겠지.

-X급으로 사는 것도 질렸어. 이젠 그럴 능력도 없고. 나 그냥 조용한 곳으로 가서 수녀로 살래. 신앙회 수녀 말고 진짜 수녀.

상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뭔 앞길을 막아. 왜 도망치는 건데……. 수녀는 개뿔, 하나도 안 어울리는데…….’

-너 그거 알아? 난 원래 개벽 전부터 수녀로 살고 싶었어. 넌 들으면 웃겠지만, 나 실은 인생에 별로 욕심이 없거든. 그런 사람일수록 천사화에 쉽게 걸리더라. 나빛이처럼.

-내가 평생에 욕심 가져본 건 너 하나뿐이었어. 그 욕심을 채웠으니까, 충분히 채웠으니까. 이제 너는 네 욕심대로 살아.

-사랑해 줘서 고마웠어.

그게 마지막이었다.

상호는 편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자신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는 건지.

설마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저, 의무적으로. 불쌍해서 사랑한 척 안아준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의 이빨이 부드득 갈려 나갔다.

‘지금 내가 제일 가지고 싶은 게 너라고, 멍청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이렇게 내빼 버 리다니. 그게 제일 맘에 들지 않았다.

수단 방법 가릴 때가 아니었다. 상호는 붉게 충혈되어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빛을 돌아보았다.

나빛은 여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빛아.”

“네, 선생님.”

“아버님께 부탁 하나만 해줄래?”

“네.”

나빛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호도 핸드폰을 꺼내 도현의 번호를 눌렀다.

* * *

효은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아내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궐그룹과 헌터 협회의 힘을 쓰니 어떻게든 찾아낼 수는 있었다.

도착한 곳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조촐한 수녀원이었다. 상호는 수녀원의 마당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조수석에서는 나빛이 내렸다.

“가자.”

상호는 나빛이 곁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란히 걸어 수녀원으로 향했다.

나이 지긋한 수녀가 문 옆 의자에 앉아 있었下匕 수녀가 그들을 보고 물었다.

“강선생님?”

“네, 맞습니다.”

상호와 나빛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녀도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둘은 기도실로 안내받았다.

구원교단의 예배당보다 훨씬 아담한 방이었다. 둥그런 모양이던 예배당과는 달리 직사각형의 방에 긴 의자가 두 줄로 놓여 있었다.

그 맨 앞줄에 수녀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수녀복을 입어서 뒤에서는 구별이 힘들었지만, 상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틀림 없는 그녀 였다.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나이든 수녀가 인자하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상호는 맨 뒷줄을 가리키며 나빛에게 속삭였다.

“잠시 여기 앉아 있어. 선생님 먼저 이야기 좀 할게.”

나빛이 고개를 끄덕 였다. 상호는 검을 짚으며 맨 앞줄로 향했다.

찾아오는 건 비밀로 해 달라고 했지만,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모를 리가 없지.’

여인은 단정한 수녀복을 입은 채로 양손을 모아 잡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상호는 그 앞에 서서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검은 머리. 끄트머 리가 희끗한 속눈썹.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순결한 분위기가 풍겼다. 나빛처럼.

상호는 효은의 옆에 천천히. 조용히 앉았다.

“왔어?”

효은이 눈을 감은 채로 빙그레 웃었다.

상호는 그 웃음을 보며 새삼스레 그녀가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응.”

“토끼야.”

효은은 키득거 리며 그에게 어깨를 살짝 기댔다. 그럴수록 상호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미안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효은.”

“응.”

“내가 전에 배 때린 거 있잖아.”

효은이 눈을 살며시 떴다가 깜빡였다.

“그거 때문은 아닐 건데.”

“알아. 그래도……. 그거,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사과하고 싶었어.”

“괜찮아.”

효은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도 너한테 잘못한 거 많잖아.”

“없어. 하나도 없어. ……아니, 있긴 있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왜 말도 없이 도망쳤어?”

“그냥. 얼굴 보거나 목소리 들으면…… 못 떠날 것 같아서.”

“아니……, 그래, 그건 알겠어. 그런데 왜, 왜 떠났냐고. 그걸 묻는 거야.”

“편지 읽은 거 아니었어?”

효은은 그제서야 기도하던 손을 내리고 상호를 바라보았다.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라고. 난 그런 건 이제 못 해주니까.”

“그게 뭔 상관이야. 애 안 낳아도 결혼은 할 수 있잖아. 너 설마 내가 너랑 결혼 안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상호는 나빛에게 보이지 않도록, 등받이 안쪽으로 효은의 허리를 안았다.

효은이 물끄러미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너는…… 바랄수록 바라게 해.”

중독.

“내가 네 옆에 있으면…… 나는 너한테 집착하고, 의존하면서, 널 내 안에 가두려고 할 거야.”

“그럼 그렇게 해.”

“그러긴 싫어.”

효은은 킥킥 웃었다.

“난 네 아들 보고 싶어. 지윤이 보니까그 생각 나더라. 성철 아저씨 닮으면서도 안 닮았잖아. 그게 신기했어. 그러니까’소원이야.”

“내 소원은 물어보지도 않는구만.”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 리며 효은이 쓰고 있는 베일의 끝을 잡았다.

그리고 살짝 당겨서, 효은과 그의 얼굴을 나빛이 볼 수 없도록 가렸다.

다른 사람 찾아서 가족 만들어. 그게 진짜 내

“내 대답은 이거야.”

둘의 입이 맞닿았다.

효은도 몸을 빼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올 뿐.

상호는 입을 떼고 말했다.

“또올거야.”

효은이 뺨을 붉혔다.

“……응.”

“그땐외박준비해놔.”

“응.”

“불임이니 나발이니 핑계 대면서 도망치지 말고.”

“응.”

“진짜 수녀 됐다고 봐주는 거 없어. 그냥 막 할 거야.”

“응.”

상호는 베일을 놓고 효은에게서 떨어졌다.

상호와 효은은 동시에 나빛을 돌아보았다. 나빛은 이제 평소처럼 맹한 표정으로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베일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효은이 상호에게 속삭였다.

“너 그거 알지?”

“뭐가?”

“나빛이한테도 똑같이 해줘야 하는 거.”

상호는 방학 동안 자신과 효은이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당황했다.

“똑같이?”

“응. 똑같이. 완전히 똑같이.”

효은이 짓궂게 웃었다.

“네가 나빛이랑 뭘 하든 나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내 생각하지 말고 알아서 잘해.”

“야, 쟤는 애잖아…….”

“너랑 언니도 일찍 하지 않았나? 뭐, 사람마다 만족하는 기준이 다르니까. 나빛이는 키스 정도로도 만족하려나?”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상호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알았어. 계속 신경 쓸게, 나빛이…….”

“그리고 2세 계획도 세우고.”

“……그건 다음에 왔을 때 이야기해. 어차피 또 올 거 니까.”

상호는 나빛을 향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빛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효은을 향해 달려왔다. 효은의 상태를 본 나빛은 활짝 웃다가, 울먹이다가, 결국은 두 표정을 마구 섞으며 효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수녀님!”

“그래, 그래. 이제 괜찮아. 다 나았어.”

효은은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피식 웃었다.

“나빛아.”

“네?”

“좋은 거 알려줄게.”

효은이 나빛의 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빛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 이 며 웃었다.

“네, 한번 해볼게요.”

뭘 한다는 걸까. 뭔가 음모에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상호는 두 여자가 동시에 자신을 향해 웃는 것을 바라보며 진땀을 흘렸다.

* * *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니니, 오래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나빛이 회포를 풀 때까지 기다린 상호는 곧 자리를 뜨기로 했다.

상호와 나빛은 수녀원 입구에서 효은을 마주하고 섰다.

“갈게. 다음 주 주말쯤에 보겠다.”

“응.”

“또 어디 이상한 데 가지 마. 그땐 납치해서 학교로 데려올 거야.”

“아…….”

효은이 실쭉 웃었다.

“그것도 한번 해보자. 납치 플레이.”

“……내가 애들 앞에선 말조심하라고 했지.”

“애들도 이제 알 거 다 알 나이야.”

“쯧…….”

상호는 더 입씨름하지 않고 나빛과 함께 차에 탔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효은에게 소리 쳤다.

“간다.”

“알았어 빨리 가.”

“응.”

“연락 씹지 말고. 혹시 또 몸 이상해지면 당장 전화해.”

효은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상호는 핸들을 돌리고 페달을 밟으며 천천히 수녀원 마당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또 볼 건데, 방학 내내 함께 있었던 게 몸에 익어 버렸는지 일주일 동안 헤어지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평 일에는 아이들에게 집중해야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빛이 그를 불렀다.

“선생님.”

“응?”

“저희 수녀님 집 잠깐만 들렀다 가요.”

“신앙회 본부 말하는 거야?”

“네.”

상호는 눈을 끔뻑 였다그 거기 뭔가 있나.

“그래. 가자.”

그는 구원교단을 향해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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