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리 집 개새끼는 교사개새끼~.”
“학교에서 퇴근하면 멍멍멍~.”
효은이 수갑을 찬 양손으로 상호의 목줄을 잡아당겼다. 상호는 힘으로 버티며 중얼거렸다.
“재밌냐?”
“응. 재밌어.”
“좋아?”
“응, 좋아.”
낄낄거리던 효은은 돌연 콧방귀를 뀌며 핀잔을 날렸다.
“니가 연기를 드럽게 못하니까 내가 하는 거 아니야.”
“난그런 취미 없어.”
“평소 하던 대로 하시라고요. 밖에서는 때리고 욕하고 잘만 하던 새끼가 왜 지금은 못하시는데?”
“몸만 잘 쓰면 됐지 그게 뭔 상관이야.”
“참나, 말하는 뽄새 봐. 누가 보면 졸라 절륜하신 줄 알겠네. 몸이나 잘 쓰고 아가리를 터세요. 토끼야.”
“니가 쉴 시간을 안 주니까 그러지, 시발…….”
상호는 이를 갈며 신경질적으로 목줄을 끊어냈다. 그의 손에서 사슬 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딱 하루. 하루만 쉬고 하자. 그럼 진짜 실력 보여줄게.”
“하루? 그럼 내일 아침에?”
“어. 밥도 좀 먹고 충전 좀 하게.”
“그래, 해 봐.”
효은이 키득거 렸다.
상호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전의를 불태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분. 그리고 근육에 충전할 에너지.
‘내일은 진짜 보내버려야지. 며칠 동안 이야기도 못 꺼내게…….’
그 며칠 동안 학교 가서 아이들을 돌봐줄 생각이 었다. 태화 말대로 무책임한 선생이 되지 않도록.
밤일도 일종의 전투다. 상호는 냉장고에서 꺼낸 계란을 날것으로 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일은 꼭 이길 거라고 다짐하며.
* * *
다음날.
아침의 따사로운 햇살이 침대로 쏟아졌다.
그 위에, 베개에 엎드린 상호의 귀에 효은이 나직하게 흥얼거렸다.
“싼~ 토끼 토끼야~.”
“왜~ 벌써 가느냐~.”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동요를 부르는데 내용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상호는 얼굴을 베개에 더 깊이 파묻었다.
분명 자고 있을 때 기습했는데,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졌다.
효은은 낄낄거 리며 말을 이었다.
“따라 해 봐, 누나.”
“누나.”
“다시는 안 깝치겠습니다.”
“다시는 안 깝치…… 하아…….”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기에는 배알이 뒤틀렸다.
“비명 빽빽 질러놓고 이긴 척은…….”
“그래서 내가 항복했냐? 니가 항복했지?”
효은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맑은 땀은 턱에서 방울져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반면에 상호는 비교적 멀쩡했다. 땀도 별로 안 났고, 숨도 평온했다. 근육은 24시간 내내 움직일 수 있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었다.
효은이 상호의 등을 치며 깐죽거렸다.
“난 니가 졸라 박력 있게 허 럴 잡길 래. 아, 오늘은 죽겠구나 생각했다?”
“근데 애걔? 내가 하니까 바로 끝나버리네? 토끼도 아냐, 무슨 미더덕이냐? 툭 씹으면 쭉 나오게?”
대체 어디까지 추락하는 걸까. 이러다가 무생물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상호는 변명을 시도했다.
“너도 죽네 아프네 울어제꼈잖아.”
“너 좋으라고 해준 거예요, 미더덕님.”
“다음번엔 진짜…… 니 허리 부러지든 말든 신경 안 쓸 거야.”
“참나. 지금 해봐. 해보라고. 못하지? 못하지? 븅신~.”
피지도 않는 담배가 당겼다.
‘얘 웃는 꼴을 나빛이가 봐야 하는데…….’
나빛은 효은이 살판난 줄도 모르고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개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터였다. 그게 여전히 원망스러웠는지, 나빛은 아직도 상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진짜로 개학식 날에나 보게 생겼다. 상호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효은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상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며칠 내내 침대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뭐야, 웬일이야. 밥이라도 차리려고?”
“뭐래. 니가차려 먹어.”
효은은 침대 옆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화장실로 총총 걸어갔다.
상호는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상자를 보며 눈을 끔뻑 였다.
‘저거 설마
옛날에 예경이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침에 써야 한다고 했던가.
그때 상호와 예경은 최대한 안전을 지켰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를 가질 순 없었으니까.
아이가 생기면 예경은 전역할 생각이었고, 그래서 가끔 의심이 되면 확인하기 위해 저걸 썼다.
하지만 지금 상호와 효은은 안전이고 나발이고는 쥐뿔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중이었다.
‘생기면…… 바로 식 올려야지 뭐. 오래 보기도 했으니까.’
도현도 부르고 민정도 부르고. 아이들도 부르고.
생각해 보니 부를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도 조촐하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오래전, 예경과 단둘이서 식을 올리자고 약속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렇게 되면 가을쯤인가? 봄은 아니어도 초가을이면 뭐, 야외에서 올리기에 나쁘지 않지…….’
상호는 옷을 입으며 생각에 잠겼다. 방학 내내 쉰 적이 없으니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각오는 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마음가짐은 예경의 생전에 이미 준비를 마쳤다.
‘오래 걸리나?’
검사 결과가 나오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
상호는 문을 두드렸다.
“결과 나왔어?”
“뭐가?”
시치미를 뗄 생각인 모양이었다.
“임테기 결과나왔냐고.”
“아, 아니.”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당황한 효은이 몸을 움츠리며 소리 쳤다.
“꺄악! 어딜 들어와!”
“볼 거 다 봤구만 뭐 어때서.”
역시나 효은의 손에는 테스트기가 들려 있었다.
“줄 나왔어?”
상호의 물음에 효은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손에 들린 테스트기에는 줄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호는 말없이 그걸 보다가 효은을 안아 들었다.
“또 하자.”
“야! 씻어야 한다고……
“그럼 씻으면서 하지 뭐.”
“……그래.”
목소리에 어째 힘 이 없었다. 상호는 의아해하며 효은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거울에 비친 효은은 불안 가득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옆에서 태화가 소리쳤다.
“학교에 불 지르고 싶다아아!”
“조용히 해.”
상호는 태화의 정수리에 꿀밤을 놓았다.
개학식. 웬일로 일찍 나온 태화와 함께 등교를 하는 중이었다그 태화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쌤 다시 숙소 들어왔어 요?”
“응. 어젯밤에.”
“그동안 즐거우셨어요?”
“……뭐가?”
태화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교생쌤이랑 살림 차렸잖아요.”
“누가 그래?”
“딱 봐도 그거잖아요. 바다에서부터 분위기 이상했는데. 바닷가에서 하룻밤 불장난하고 당황해서 도망쳤다가 진심을 깨닫고 태화가 손으로 위험 천만한 제스처를 취했다. 상호는 식겁하며 태화의 손등을 쳤다.
“얌마, 말 좀 가려서 해!”
“그래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드린 건데.”
“너 졸업하기 전에 내가 짤리겠다, 진짜…….”
“어쨌든 그거잖아요.”
“아니야. 임마.”
상호는 혀를 차며 본관으로 들어갔다.
“쌤 교무실 들렀다 갈게. 교실 가.”
“넹.”
태화는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교무실에 도착한 상호는 컴퓨터를 켰다. 엊저녁에 잠깐와서 일을 해놨기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작업은 없었지만, 개학을 했으니 일 자체는 많이 쌓여 있었다.
아이들한테 2학기 일정도 알려줘야 하고, 어떻게 가르칠지도 생각해야 하고. 특히 1학년의 2학기는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컴퓨터를 켜고 그동안 쌓인 문서를 열람하는데 문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생님들이겠지.’
상호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 인기척은 사라지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강렬한 시선도 느껴졌다.
결국 고개를 들어 문가를 본 상호는,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나빛을 발견하고 딸꾹질을 했다.
‘깜짝이야…….’
나빛의 예쁜 회색 눈동자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지독한 한기를 품었다.
상호는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나빛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고요하게,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귀신처럼 그를 노려보다가 문밖으로 스르르사라졌다.
그는 책상에 철푸덕 엎어져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와씨, 무서워 축겠네…….’
착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고 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 리가 내린다고 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소녀 가 한을 품으니, 온몸에 오한이 들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빨리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상호는 서둘러 조례 준비를 마치고 교실로 향했다.
* * *
“……개학이다, 얘들아.”
상호는 나빛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세희랑 태화랑 지윤이는 계속 봤고…… 나빛이……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나빛이…….”
나빛은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태화가 한마디 했다.
“삐순이 삐졌네.”
그러자 나빛이 고개는 가만히 두고 눈동자만 돌려 살벌한 눈빛으로 태화를 째 려보았다. 태화도 그 눈빛을 보고 움찔했다.
“그, 그럼 내가 삐진 거 할게. 넌 씨진 걸로 해. 세희가 에이니까……. 순서대로 지윤이가 디진 걸로 하자.”
“죽을래?”
“난왜디지는기고?”
상호는 교탁을 두드리며 아이들을 집중시 켰다.
“너희는 조용히 해. 방학 끝났으니까 마음 다잡고, 수업 열심히 들어.”
“네.”
“넹”
“넵!”
딱 한 소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빛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데, 다른 아이들 앞에서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상호는 문가를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옷 갈아입고…… 늦지 않게 밖으로 나와. 기다릴게.”
* * *
오랜만에 하는 운동장에서의 야외 수업.
목각인형은 이제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뛰어다녔다. 아이들도 그랬다. 세희와 지윤은 경공이 늘었고, 태화는 원래 순간이동을 썼고, 나빛은 진짜로 날아다녔으니까.
상호는 정신없이 치고받는 목각인형과 나빛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곧 목각인형이 움직 임을 멈추고 바닥에 내 려섰다.
“됐다. 나빛이 선생님 앞으로
퍼억
성창이 목각인형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나빛은 둥그런 보호막에서 내려와 상호에게 다가왔다. 아직도 눈이 매서웠다.
상호는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그
“잘했어. 잘했는데…….”
흠을 잡으려고 하니 나빛의 눈빛이 더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수업은 수업이다. 사적인 감정은 배제해야 했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창이…… 좀 더 빨랐으면 좋겠고……. 세희한텐 옛날에 말했던 건데…… 찌르는 공격은 시야가 좁아지기 쉬워. 그런데 이기어검술은 시야가 꼭 넓어야 하거든? 그러니까…… 시야 넓히는 연습을…….”
눈을 살짝 떠 봤지만, 나빛은 아직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해줬으면…… 좋겠어…….”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 듣던 세희가 헛기침을 하고는 나빛의 뒤로 가 양어깨를 뭍들었다.
“나빛아, 이제화풀어.”
“싫어.”
“선생님 방학 내내 바쁘셨어. 우리 찾아올 때마다 지치고 피곤해 보이시고…… 뭔가 열심히 하고 계셨다니까. 지금도 봐. 많이 힘들어하시잖아.”
방학 때 지쳤던 이유는 밤일 때문이고, 지금 힘든 건 나빛 때문이지만, 상호는 말없이 세희를 응원했다.
“나야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선생님 나름대로 많이 노력하셨을 거 아냐. 네 전화 못 받은 것도 바쁘셔서 그런 거고…… 그니까 화 풀어.”
“싫어.”
나빛은 짤막하게 한 마디를 되풀이했다.
상호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나빛의 저 ‘싫어’라는 말이 꼭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
효은의 건강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답이 없을 듯했다.
‘수업 끝나고…… 같이 효은이 보러 가자고 해야겠다…….’
〈물려받는 마음>
상호는 조수석에 앉은 나빛에게 안전벨트를 매어주며 말했다.
“서랍에 먹을 거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먹고…….”
“…….”
“에어컨 틀어줄 테니까, 너무 세면 말해.”
“…….”
나빛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상호의 입에서 한숨이 푹푹 쏟아졌다.
점심시간에 불러내는 것마저도 어려웠다. 방과후에 같이 효은 만나러 갈 거니까수행원 부르지 말라는 말. 그 한 마디를 전하는 게 참 힘이 들었다.
상호는 핸들을 잡으려다가 나빛이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떡하지?’
둘만 있을 땐 손을 잡아 달라던 소원.
근데 지금 잡으면 뺨따귀를 후려칠 것 같았다.
‘그래도…… 해야지.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맞으면 맞는 거고…….’
상호는 손을 슬금슬금 움직 여 나빛의 손등에 살며시 올렸다.
“흥.”
나빛이 작게 콧방귀를 뀌며 손을 쓱 빼더니, 팔짱을 끼어 손을 숨겼다.
‘끄응…….’
속으로 침음하던 상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빛아. 수녀님 다나았어.”
나빛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제 검은 머리도 많이 났고…… 렌즈 안 써도 돼. 나랑 사이도 좋아져서 같이 잘 놀고…
상호의 말에 나빛이 눈을 흘겼다.
“노느라 제 전화 다 무시하셨어요?”
“미안해…….”
“뭐 하고 노셨어요?”
“그…… 해외여행 갔어.”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는 못하고 어떻게든 지어낸 것이었다.
나빛에게는 부족한 모양이 었다.
“어디로요?”
“중국 아래에 있는 곳인데…… 은행도 많고…….”
사실 한 번도 가본 적 없다. 은행인지 증권인지 뭐시긴지가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서 비행기 타느라 전화 못 했어……. 비행기에선 전화하면 안 되잖아.”
“이착륙할 때만 그런 거잖아요.”
“그, 꺼두고 깜빡했어. 수녀님이랑 이야기하느라.”
거짓말을 하려니 지어 내는 게 끝이 없었다.
상호는 겸 연쩍어하며 웃었다.
“선생님이 네 전화를 왜 일부러 무시하겠어. 다 사정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나빛은 그제서야 납득을 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는 않은 듯했지만.
그래도 상호에게는 나빛이 자신과 대화를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빛이 저녁에 뭐 먹을래? 수녀님이랑 같이 가자. 응?”
“싫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출발해 주세요.”
“끙…….”
상호는 군말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구원교단 본부에 있는 효은의 집으로 향하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효은이 또 알몸으로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옷 입으라고 말해 놔야 할 것 같았다. 상호는 핸드폰을 꺼냈다.
뚜……뚜…….
밋밋한 연결음만 들릴 뿐. 효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싸늘한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왜 안 받지?’
예전에는 서로 잘 안 걸고 잘 안 받았지만, 동거를 시작한 후로는 꼬박꼬박 잘 받았었는데.
상호는 당황한 것을 숨기고 차를 더 빨리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