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501)

* * *

점심의 학교 급식소. 방학이지만 기숙사 아이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었다.

태화가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이 밀었다그

“쌤.”

“응?”

“무슨 일 있었어요?”

“뭐가.”

“오늘도 눈이 퀭한데요.”

상호는 태화의 시선을 피 했다.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볼도 홀쭉하고…… 뭔가 말라비틀어져 가는 느낌인데.”

“니들이내속썩어서 그런다.”

“엥, 갑자기 우리 탓이에요?”

앞에서 밥을 먹던 세희와 지윤도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윤이 먼저 물었다.

“쌤. 그저께 그 일은…… 어케 잘 됐심니꺼?”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 다가 퍼뜩 생각이 들었다.

“너희 나빛이랑연락하냐?”

“예.”

“어제오늘 기분 어땠어? 내가 전화좀 못 받았더니 이제 전화 절대 안 받더라. 많이 삐진 것 같은데 

“맞아예. 쌤욕엄청 했심더.”

지윤이 말하자 태화와 세희도 거들었다.

“여자 때리고 욕하고 버리는 쓰레기 선생이래요.”

“자기가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남한테 시키면서 생색은 혼자 다 낸대요.”

그 말들이 상호의 심장을 푹푹 찔렀다.

“진짜…… 그렇게 말했니……?”

“대충 그렇게 말하던데요. 물론 저희가 알기 쉽게 해석해드린 것도 있지만.”

태화가 실쭉 웃었다.

“제 핸드폰 빌려드려요? 나빛이한테 전화해 보실래요?”

“줘 봐.”

상호는 태화의 핸드폰을 받아 나빛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들리고, 금방 나빛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힘이 없었다.

[응, 태화야…….]

“나빛아. 선생님이야.”

딱 한 마디 하자마자 통화 종료음이 울렸다.

띠로롱

절망에 빠진 상호에게 아이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러게 왜 혼날 짓을 했습니꺼.”

“걘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별로 없어서 사과하기 힘드실 텐데.”

“전화 좀 잘 받아 주시 지……. 문자로라도 사과하세요.”

“……문자도 안 보더라.”

상호는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어쨌든너희는별일 없지?”

“예.”

“쌤 방학 동안은 다른 곳에서 머물 거니까, 잘 지내고 있어.”

“어디 가는데요?”

“몰라도 돼.”

그래도 아이들을 이대로 방치해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흘에 한 번은 올게. 그때 수업도 할 거고……, 필요한 거, 힘든 거, 그 외에 뭐 중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나빛이 건 씹으셨잖아요.”

“……쌤도진짜바쁠때가 있어.”

상호는 식판을 들고 자리 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일찍 가야 돼. 먼저 간다. 밥 잘 먹고, 잘 지내.”

“그럼 우리 계곡이랑 수영장은 언제 가요?”

“못 가지.”

“쳇…….”

태화가 못마땅해하며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제자 버리고 도망치는 쓰레기 교사.”

“얌마, 버리긴 뭘 버려……. 제발 그만 놀아라. 많이 놀았잖아. 다른 애들 운동장에서 수련하는 거 안 보여?”

“마법도 못 가르치면서 수련 상대도 안 해주고는 논다고 뭐라 하는 무책임한 교사.”

“……미안해, 그건.”

상호는 난색을 표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너희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선생님 그쪽 일에 좀 집중해야 되거든. 이해해 줘.”

“저는 괜찮아요.”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윤도 마찬가지 였다.

“지들은 알아서 수련할 테니께 쌤 볼일 보시면 됩니더.”

상호는 태화를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다.

심통난 표정으로 버티던 태화도 결국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고맙다.”

상호는 아이들의 머 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 출구를 향해 걸었다.

“이틀후에 올게. 잘지내.”

“네.”

상호와 아이들은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가 급식소 밖으로 나갈 때까지.

문을 닫는데 뒤쪽에서 아이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 근데 진짜 나빛이 어떡하냐? 이제 우리 연락도 씹겠는데.”

“별수 있나. 개학식 때나 보겠제.”

“독하네, 걔도. 난 선생님께서 전화하면 그래도 받을 줄 알았는데.”

“원래 그런 애들이 빡치믄 무서운기라.”

나빛의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산 넘어 산이니 첩첩산중이었다.

상호는 한숨을 푹푹 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나 왔어.”

집 안으로 들어서며 한 말에 효은이 침대에서 고개를 빼꼼 들었다.

상호가 집에서 나갔을 때의 위치 그대로였다.

“뭐야. 그동안 계속 거기 누워 있었어?”

“응.”

“밥 안 먹어? 아니 뭐라도 좀 먹지 그래.”

“배 안 고파.”

상호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씻긴 했어?”

“아니.”

“화장은?”

“아니.”

“향수는? 머리는? 관리는?”

“안 했는데.”

“검색은?”

“그건 했어.”

효은이 그의 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이거 봐봐.”

화면에는 적나라한 이미지들이 띄워져 있었다.

“나 이거 해줘.”

효은의 검지가 가리킨 것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강렬한 이미지였다. 상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들고 해 달라고?”

“안돼?”

“아니, 드는 거야 내공으로 하면 되는 일이지만…… 니가 힘들걸?”

“언니랑해봤어?”

“아니, 누나랑은 이런 정신나간 건 시도도 안 해 봤는데.”

그 말에 효은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해줘.”

예경과 안 해본 일이라는 데에 귀가 솔깃한 모양이 었다. 상호의 숨이 턱턱 막혔다.

“굳이 이런 걸 해봐야겠어? 난 이게 좋을지 잘 모르겠는데…….”

“해 봐야 아는 거지. 빨리 해 봐.”

효은은 잔뜩 신이 나서는 이불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분명 간밤엔 이불을 뒤집어쓰며 부끄러워했었는데, 이제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완전히 즐기는표정이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아프면 말해.”

“쎈 척하지 마세요, 토끼 새끼야.”

효은이 코웃음을 치자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니그말똑똑히 기억해 둬.”

그는 효은을 덥석 붙잡았다.

* * *

‘……토끼는어떻게울까?’

상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우주의 이치. 세계의 평화.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오리 부리는 왜 노랄까.

잠시 현자가 된 그의 옆에 효은이 달라붙었다.

“토끼야.”

“토끼새끼야.”

“맨날 개새끼 개새끼 그랬는데 토끼새끼네, 이거. 내가 그렇게 잘하냐? 응? 응?”

효은은 키득거 리며 그의 볼을 쿡쿡 찔렀다.

상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얘가왜나보다잘하지……?’

분명 어제 처음인 걸 확인했는데. 경험으로 치면 자신이 백 배는 많은데.

‘재능인가?’

압도적인 재능 앞에 경험은 의미가 없는가. 상호는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며 효은이 베고 누울 수 있도록 팔을 내어주었다.

효은은 계속 상호의 몸을 찌르며 치근덕거 렸다.

“그렇게 좋아? 정신도 못 차리더라?”

“좋았냐고, 토끼야. 묻잖아.”

상호는 어이가 없었다.

“니는 나한테 뭐라 하면 안 돼, 진짜.”

“뭐가?”

“그걸 그렇게 묻는 여자가 세상에 어딨어? 분위기 따지더니 염병, 지도 그런 거 개뿔도 모르는구만 

“여자는 그런 거 안 물어봐? 그런 법이라도 있냐?”

“그럼 남자는 여자한테 잘한다고 하면 안 돼?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상호는 혀를 차며 효은을 끌어안았다.

“그래서 귀는어떠신데.”

“귀?”

“계시, 아직도들리냐고.”

“……앗.”

효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짧은 사랑>

“야.”

상호가 부르자 효은이 대 답했다.

“왜.”

“우리 밥 언제 먹냐?”

“몰라.”

“니가 좀 차려 봐.”

“싫어, 니가차려…….”

배고파 죽겠는데 둘 다 밥은 차리기 싫고.

상호는 칭얼대는 효은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귀를 깨물었다.

“그냥확 씹어먹어 버릴까보다.”

“생각 잘해. 누가 더 위험한지.”

“뭐래, 내가 맘만 먹으면 닌 씹지도 못해. 강기가 폼으로 보이냐?”

둘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침대 위를 구르다가, 효은이 상호의 머 리채를 잡고 나서야 몸싸움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상호는 이를 갈았다.

“니 이따가 보자. 나도 니 머리채 잡는다…….”

“지금 잡아 보시든가~.”

효은이 그의 머 리카락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해 보시든가~ 왜 못하는데에~.”

“진짜 니는…….”

화가 났지만, 애인으로 받아들인 이상 힘을 쓸 수도 없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효은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이젠 완전히 나은 것 같네.’

눈동자도 많이 검어지고, 입술도 붉어졌다. 새로 나는 검은 머리카락 때문에 정수리도 거뭇거뭇했다.

한창 심할 때는 귀에다 속삭이면 알아듣지를 못했는데, 이제는 아무리 작게 속삭여도 귀신같이 알아듣고 반응을 했다.

그때.

또또또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문 앞에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상호는 효은과 눈을 마주쳤다.

“뭐야?”

“택배인가본데.”

효은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해? 가져와.”

“염병…….”

상호는 대충 바지를 주워 입고 문밖으로 나왔다.

효은의 말대로 복도에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그 상자를 들고 안으로 가져오니 효은이 반색했다.

“아, 내가 어제 시킨 거다.”

“뭔데?”

“뜯어. 니 선물이야. 너 쓰라고 샀어.”

대체 뭐기에. 상호는 손톱에 강기를 씌워 택배의 테이프를 갈랐다.

그리고 당황했다.

뭐여, 이거.”

안에는 수갑과 목줄, 그리고 밧줄 따위가 잔뜩 들어 있었다.

“너…….”

“써.”

“넌 진짜…… 여태 어떻게 참고 살았냐?”

“몰라. 검색하니까 나오더라.”

상호는 수갑을 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다 뭔 의미야? 내가 힘 한 번 쓰면 다 끊어지는 건데.”

“아니.”

효은이 양 손목을 앞으로 내밀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나한테 채우라고, 등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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