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501)

* * *

“안 보이네.”

설미가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방에 안 들어온 것 같아. 다른 사람들도 못 봤대.”

“……그래요.”

상호는 고개를 끄덕 였다.

바다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효은은 이틀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전화를 아무리 해도 받지 않았다.

항상 있던 그곳에 있는 모양이 었다.

“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찾으면 나도 알려줘.”

설미는 걱정하는 눈빛으로 상호를 일견하고 여교사 숙소로 들어갔다. 상호는 그 앞에 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젠가부터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쌤예.”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지윤이 서 있었다.

지윤이 그를 맑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쫌만…… 이야기 괜찮으십니꺼.”

“응.”

“한적한데로가입시더.”

상호와 지윤은 학교 부지 구석으로 향했다.

뒷산 근처에는 학교 부지 경 계를 표시하는 낮은 돌담이 쌓여 있었다. 딱 앉을 만한 높이 였다.

둘은 거기에 앉았다.

지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무이한테 물어봤어예.”

“뭐를?”

“떠난 사람을 잊으려면 우째야 하는지.”

상호는 눈을 끔뻑 였다.

누군가 말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 비밀들은 쪼개어져 있으니 필시 누군가들이 말해주었으리라.

“세희랑나빛이가 말했어?”

“나빛이가 저희들한테 다 말해 줬습니더. 비밀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믄서. 쌤한테 엄청 실망한 모양이던디예. 그리고 세희는…… 저한테만 알려 줬습니더. 쌤이 왜 그러는지. 지랑 세희는 쌤이 어디서 무슨 일 했었는지 알고 있으니까예.”

나빛이 화가 났다니.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데?”

“어무이는못잊었답니더.”

지윤은 상호의 손을 잡았다.

“근디…… 그런 건 잊고 자시고가 아니라, 끝을 냈는지 아닌지의 문제라 카데예. 살아 있으면 이어갈 방법이 있지만, 죽었으면 그럴 수도 없다믄서. 죽은 순간 그사랑은 끝이지만, 지 인생은 그대로 이어져야 한다믄서……. 어무이는 지랑 동생들이 있으니까 그 인생을 이어가기로 했지만, 쌤처럼 시퍼런 양반은 궁상떨지 말고 새 인생이나 찾으라 그러데예.”

상호의 손을 잡은 지윤의 손에는 성철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마음에 시체를 두지 말고…… 잊을 필요 없으니까, 끝을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더.”

상호는 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윤아.”

“예.”

“쉽지 않아, 그게…….”

지윤은 한숨을 쉬었다.

“나빛이가 쌤 죽일 겁니더.”

“……일단알겠어.”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고 일어섰다.

“쌤이 알아서 할게. 너희는 신경 쓰지 마.”

“나빛이가 쌤 꼬챙이로 만들어 불겠다고 했다니 까예.”

“진짜?”

“대충 그런 식으로 말했습니더. 지 해석이 좀 들어가긴 했지만.”

머리를 긁적이던 지윤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지는 아직 아니지만…… 세희는 쌤한테 실망할 수도 있습니더. 태화 그 가스나는 별 생각 없겠지마는…….”

“알았어.”

말 그대로 알아듣기만 했다는 뜻이 었다.

이건 아이들이 실망을 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순전히 그의 마음에 달린 일.

애들이 꼬챙이로 만들겠다고 달려들어도, 그렇게 그가 억지로 효은의 곁으로 향해도. 그의 진심이 변하지 않으면 효은은 끝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고 영영 떠나버릴 것이었다.

상호는 지윤이 전해준 정애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

“어쨌든 고마워.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지윤은 더 이상 이야기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 였다.

“쌤예.”

“응.”

“믿습니더.”

“……그래.”

상호는 말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한 사람,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 * *

“영감이요?”

해련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딱히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상호는 교장실 소파에 앉아 해련의 대답을 기다렸다.

“간 지 꽤 됐죠. 개벽 전인데…… 그…… 손녀가 갓난아이일 때 갔으니까, 15년? 그쯤 된 것 같은데.”

그 말에 상호는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후에…… 많이 힘 드셨어요?”

“힘? 슬펐냐는 뜻이죠? 때 되어서 간 거라. 받아들이긴 했지만…… 슬픈 건 어쩔 수 없었죠. 평생을 같이 살았으니까.”

15년 전에 축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니. 품고 있던 의문들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상호는 간신히 삼키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교장선생님.”

“네.”

“그렇게 자기 인생에 완벽히 달라붙어서 떼어놓을 수 없게 된 사람이 떠났을 때……, 다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해련은 상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진지한 이야기예요?”

“그런 편이죠.”

“응…….”

상호는 고민에 빠진 해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련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흔히들 그렇게 말하잖아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그 찢어진 한쪽을 떠난 사람이 가져가 버린 기분이 들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해련의 눈빛이 상호를 꿰뚫었다.

“난 이렇게 생각해요. 마음은 사랑을 시작할 때 이미 전부 줬고, 그 사랑이 끝나면 돌려받는 거라고. 사랑과 사별할 때도…… 그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내게 마음을돌려주고 싶어할 거라고. 그렇게 돌려주고, 새로운 사람 찾기를 응원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해련은 그렇게 말하고는 쓰게 웃었다.

“우리 영감도 그러더라고요. 외로우면 다른 영감 찾아도 된다고……, 물론 내가 젊어질 줄은 모르고 한 얘기겠지만.”

“……그런가요.”

상호는 이마를 짚었다. 해련의 답을 들어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그의 마음까지는 닿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곧 그는 자신이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하는지 깨달았다.

“이야기 감사했습니다.”

상호는 벌떡 일어나서 교장실을 나섰다.

* * *

“선생님.”

세희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를 불렀다.

남교사 숙소에 있는 상호의 방이었다.

“저 왔어요.”

“어, 들어와.”

상호는 별관에서 주워온 방석을 바닥에 깔았다.

“운기조식 좀 하자.”

“선생님.”

세희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빛이가그러는데…….”

“알아, 알아. 선생님이 알아서 할 거야.”

상호는 세희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탁할게. 잠깐만 시간 내어 줘.”

“……그건 당연히 드릴 수 있어요.”

세희는 방석에 앉았다.

“알아서 하신다니까…… 저는 그냥 믿고 있을게요.”

상호도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음이 급했다. 그는 서둘러 내공을 움직여 몸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예경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누나.’

상호는 심상 속에서 마음의 눈을 떴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예경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끝이 없는 어둠뿐.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 렸다.

‘뭐야. 누나는어디…….’

상호는 당황하며 운기를 멈추고 심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내공이 점점 천방지축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혈관 하나하나에 가시 돋친 용암이 흐르는 것 같았다.

주화입마였다.

‘젠장!’

너무 급하게 운기를 시작했다.

끔찍한 고통이 덮쳐오는 와중에도 상호는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폭주라도 했다간 세희가 휘말린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내공을 억누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심상에서 꿈틀거리던 무언가가 점점 뚜렷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검푸른 불꽃을 두른 거인의 형상이었다.

거인이 손을 뻗자 엄청난 열기가 그를 덮쳤다.

‘염병 씨발……!’

상호는 자신을 움켜쥐려 하는 손을 보며 눈을 감고 이를 갈았다. 몸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때.

뒤에 누군가가 다가와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쉿

그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잦아들었다.

날뛰던 내공도.

들끓던 열기도.

“누구~게.”

그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상호는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며 맥없이 대답했다.

“누나…….”

“정답!”

예경이 깔깔 웃으며 손을 떼었다.

눈앞에 그의 방이 나타났다. 남교사 숙소. 세희만 없을 뿐, 그가 운기조식을 시작할 때와 모든 것이 같았다.

그때처럼 예경은 뒤에 있고, 상호는 돌아볼 수가 없었다.

예경의 손이 상호의 볼을 빙글빙글 문질렀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인걸. 이렇게 급하게 찾은 걸 보니.”

“누나.”

목이 메어왔다.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대요.”

“응.”

“근데 내가 안 사랑하면 그 사람이 죽어요.”

“응.”

“근데 난 아직…… 누나를 못 잊었거든요?”

상호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진짜 축어도, 누나 한 사람밖에 없는데. 모든 게 누나인데, 지금도 가짜인 걸 알면서도 죽을 것같이 아픈데…… 대체.”

목에 핏줄이 터질 듯이 불거졌다.

“대체 어떻게 해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통수에 격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컥!”

“바보야, 그럼 결혼도 안 할 거야?”

예경이 핀잔을 날렸다.

심상이 아니라 진짜로 고통이 느껴졌다. 예경의 내공이 현실의 육체를 타격한 모양이었다.

상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넋이 담겼다는 설명을 듣긴 했지만, 내공 주제에 완전히 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줄이야.

이 렇게 아픈 것은 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난 너랑 할수 있는 거 다 했어.”

예경의 손이 상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결혼은 못 했지만……, 그건 할 수 없으니까 못 했던 거지. 그거 말곤 다 했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네가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란 말이야.”

상호는 그녀의 포근한 품이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결혼도 하고, 가족도 만들고. 당연히 다 해도 돼. 네가 날 덜 사랑했어? 내가 너 때문에 죽기라도 했어? 전혀 아니잖아. 그러니까…….”

예경의 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가.”

“누나…….”

“빨리 가, 바보야. 더 할 말 없어.”

“아니, 누나.”

상호는 심상의 눈을 감으며 말했다.

“……고마웠어요.”

머 리를 쓰다듬는 감각이 마지막이 었다.

현실의 눈을 떠 보니 세희는 여전히 운기조식 중이었다. 상호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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