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리하여 나온 밤의 바닷가.
짭짜름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번화가의 불빛은 밤에도 밝았지만, 수평선 끝의 먹빛 바다는 하늘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검었다.
모래사장을 돌아다니는 것은 죄 연인들이었다. 걸음마다 슬리퍼 속으로 모래가 들어와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도 조금은 그랬다.
상호는 옆에서 걷는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세희는 방금 그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세희의 눈도 그를 향했다.
“드세요.”
세희가 아이스크림을 내밀자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됐어. 다 먹어. 세희 너 지금은 몸무게 몇이야?”
“멈줬어요.”
“이따또먹어.”
둘은 짧은 산책을 마치고 벤치에 앉았다.
세희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나자 상호는 자연스럽게 세희의 손을 잡았다.
그 손에서 내공이 조금씩 흘러들어 갔다. 상호에게서 세희에게로.
“좀 아플 거야.”
평상시보다 많은 양의 내공을 넣어 단전에 과부하를 거는 방식이 었다.
당장은 큰 효과가 없지만 조금씩 익숙해지고 나면 더 많은 양의 내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렇게 단전을 튼튼하고 강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세희의 손에서 금방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으….”
“많이 아파?”
“아랫배가…… 뻐근…… 해요.”
“그럼 나한테 돌려줘. 네가 버틸 수 있을 만큼.”
“지금만큼이면…… 참을수있어요.”
상호는 내공의 주입을 멈추고 바로 손을 떼려 했지만, 세희가 그의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잡고 있어 주세요…….”
숨이 살짝 거칠었다.
상호는 그 말대로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밤하늘 달을 올려 다보며.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세희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분…… 처음 만났을 때요.”
“아, 그래.”
상호는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 였다.
“몬스터한테서 구해진 다음이지. 그게……. 맞다, 첫 부대 분대원들이 다 도망갔을 때. 나는 친구도 죽고 해서 군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총도 버리고 스승님 졸졸 따라갔지. 어떻게 그렇게 강하냐고 물으면서.”
하지만 예경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스승님은 무시하셨어. 귀찮았나 봐. 한 번 정을 주면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그 한 번이 어려운 사람이었어.”
“선생님처럼요?”
“……글쎄.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딱히 생각 안 하는데.”
상호는 고개를 기웃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따돌리려면 따돌릴 수 있었을 텐데, 스승님은 내 앞에서 걷기만 했어.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안 하고. 아마 시험하고 싶었나 봐. 어디까지 따라오는지.”
“얼마나 오래 따라가셨어요?”
“이틀인가 따라갔는데. 별로 못 가고 쓰러졌지. 눈이 곯았거든.”
“아…….”
세희는 상호의 안대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멀쩡히 앞에 앉아 있는데도, 세희의 눈빛엔 걱정이 묻어났다.
“괜찮으셨어요?”
“그럼. 안 괜찮으면 지금 네 앞에 있겠냐. 물론 그때는 안 괜찮았지만…….”
상호는 쓴웃음을 지 었다,
“하여튼 그렇게 눈에 상처가 나니까 세균이 뇌까지 들어가고……. 온몸은 펄펄 끓고. 쓰러져서 이제 죽는가 싶어서 눈을 감았어. 근데 눈을 다시 떠 보니까…… 침대더라. 옆에는 스승님이 있고.”
세희는 먼 바다를 돌아보았다. 옛 기억을 되살리는 듯했다.
“저도그런 적 있는데.”
상호는 세희의 뺨을 집고 흔들었다.
“그러니까 살 좀 찌워, 인마. 또 쓰러질 거야?”
“아야야……. 죄송해요.”
세희는 울상을 짓다가 물었다.
“침대면…… 병원이 아니었다는뜻이에요?”
“응. 빈집의 침대. 눈은 소독을 했지만 몸은 계속 아팠어. 뻐근하고, 열이 났어. 지금 너처럼.”
“아, 내공을…….”
“응.”
의사는 대부분 군병원에 징집당했고, 징집을 피할 만큼 늙은 의사들의 병원도 꽉꽉 미어터지던 시절.
병원까지의 거 리도 멀고, 병원에 가도 시간이 지체될 것임을 깨달은 예경은 상호에게 내공을 나눠주었다.
“내공이 있으면 몸이 훨씬 튼튼해지니까. 하지만 그대로 죽어버리면 다 허공에 날아가는 건데…… 스승님은 내 생명력에 걸으셨던 거지.”
그 후로 꼬박 일주일을 불붙은 시체처럼 지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땀이 너무 나서 옷을 못 입을 지경이었고…… 온몸의 혈관도, 기맥도 다 퉁퉁 부어서 미치도록 아팠어. 그때는 스승님의 내공도 딱히 강하거나 진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공을 아예 받아본 적이 없는 몸이 었으니까.”
몸이 양쪽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 예경의 내공은 점차 흡수되었고, 세균은 고열에 싹죽었다.
“그동안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 가고 씻지도 못했어.”
“그럼 누워서 쌌어요?”
“아니…….”
세희는 짓궂게 헤헤 웃었다. 상호는 세희가 가끔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가 인생 최고로 당황스러웠다.
“스승님이…… 다해 줬지.”
“다요?”
“다.”
“다…….”
세희가 고개를 끄덕 였다.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그때부터였어요?”
“아니. 그땐 서로 데면데면했지. 스승님도 부끄러워하셨던 것 같긴 한데…… 나는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고, 스승님도 그때 이야기는 안 하셨어.”
“그래도 살려주고 돌봐준 건…… 마음이.”
있었다는 것 아니냐, 그렇게 묻고 싶은 듯했다.
상호는 예경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첫 시작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거지. 그런 사람들이야, 우리는. 물론 나는 스승님 따라갔던 거지만.”
저승부대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이니까 목숨 내놓고 거기까지 간 거야. 세상은 우릴 이해 못 해도……, 우리는 또 가라면 또 가지. 몇 번이고.”
세희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소방관처럼요?”
“뭐그런 거지.”
상호는 고개를 끄덕 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쨌든…… 결국은 보다시피 이렇게 멀쩡히 나았고, 나는 스승님한테 고맙다고 절하고 뭐든 하겠다고 했어. 스승님도 그때쯤 되어서는 내가 포기 안 할 거라는 걸 알았는지, 제자로 받아주셨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아련하면서도 쾌활해진 데가 있었다.
“그날부터 그 집에서 머물면서 심법을 배웠어. 그땐 이제 천색창염이란 건 있지도 않았고 그냥몸속에서 빙빙 돌리면 늘어나더라, 하는 개념이었지만……. 그 기본적인 내공으로도 근육을 강화하고, 무기를 강화하는 건 가능하니까.”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은…… 천색창염은 나중에 만드신 거예요? 선생님이랑 같이?”
“같이라면 같이인데, 스승님이 거의 다하셨어. 항상 나보다 앞서 계셨으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차이가 크진 않으셨나 봐요.”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차이는 중요한 게 아니야. 좋은 선생은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가 아니라 얼마나 잘 이끄는가로 결정되는 거니까. 비록 단 한 걸음밖에 앞서 있지 않더라도…… 함께 높은 산을 오른다면, 그게 진짜 제대로 된 스승인 거야. 정상에 앉아 있는 스승보다 훨씬.”
그래서 그는 항상 생각했다. 예경에 비하면 자신은 절대 좋은 스승이 못 된다고.
“어쨌든 심법 배우고, 경공도 배우고. 검도 살짝 배우긴 했는데…… 그때는 스승님도 검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 물론 난 더 몰랐지만. 그렇게 배우고 난 다음엔 집에서 나왔지. 몬스터 잡으려고. 스승님은 경험으로 몬스터를 잡을수록 내공이 빨리 는다는 걸 알고 계셨거든…….”
상호는 말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희가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움찔했다.
“뒤에 애들 있어요?”
“아니.”
색이 빠진 흑발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상호는 그 골목을 가만히 쳐 다보다가 세희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단전은 어때?”
“아.”
세희는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느낌이 없어요.”
“그릇이 커진 거야. 다음엔 좀 더 많이 넣자. 줬던 만큼만 돌려줘.”
“네.”
세희가 상호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공을 불어넣 었다.
상호는 조바심이 나서 재촉했다.
“더 빨리 넣어도 돼. 선생님은 혈맥 안 다쳐.”
그 말에 세희는 내공을 넣는 속도를 높였다.
내공을 다 돌려받은 상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 가. 선생님은 잠깐 어디 들렀다가들어갈게.”
“네.”
세희는 궁금해하는 눈치 였지만 묻지는 않았다. 상호는 지팡이를 짚으며 골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금색 깃털 몇 장이 바닥에 녹아들고 있을 뿐이 었다.
* * *
방은 다섯 개를 잡았다. 상호의 방. 해련과 설미의 방. 세희와은율의 방, 태화와 지윤의 방, 그리고 나빛과 효은의 방.
상호는 나빛과 효은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빛이가 방에 없다는뜻…….’
상호는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자마자 담배 연기가 매캐하게 뿜어져 나왔다. 방을 아주 한가득 메운 채였다.
그는 기겁하며 급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야, 아니 미쳤다고 실내에서…….”
상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안개처럼 뿌연 회색 연기 속, 은은하게 빛이 나는 여인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완전히 백발이 된 머리카락 뒤에서 후광이 비쳤다.
감은 눈의 속눈썹은 서리가 내린 듯 하얗고, 그 밑에 항상 드리워 있던 눈그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입술은 익사자의 것처럼 연한 보랏빛을 띠 었다.
“왜또피워.”
상호는 목소리를 낮줬다. 처음에는 나빛이도 같이 자는 방에서 뭐 하냐고 따지려 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효은은 눈을 떴다.
렌즈를 뺐는지, 아주 연한 회색의 동공이 상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의 초점은 상호의 얼굴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네 안엔 아직도 언니밖에 없구나.”
상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효은이 힘없이 웃었다.
“알고는 있었어. 네가 날 볼 리 없다는 거. 넌 처음부터 끝까지…… 언니로 이뤄져 있으니까.”
몸과 영혼.
내공, 검, 신념, 전투, 교육, 입맛, 취향, 상처, 기억.
“처음엔 네 진심을 얻고 싶어서…… 말 안 했어. 너는 비겁한 걸 싫어하니까. 그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면, 너는 지어내는 걸 싫어하니까, 나한 테서 멀어질 거란 걸…… 알고 있었어. 어릴 때도 그랬듯이.”
상호는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을 기다렸어. 연락 안 하더라. 나는 네가 날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줄 알고…… 방송도 나가고, 어떻게 하면 예뻐 보일까, 고민하면서 성형도 해 보고.
버틸 수 없는 날엔……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술로 담배로 풀었어. 같이 마실 사람이 없으니까.”
“조금만
목소리가 살짝 떨 렸다.
“조금만 알기 쉽게…… 말해 줄 순 없었어? 항상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 어릴 때 밤에 있었던 그 일은…… 어려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효은이 고개를 푹 숙이고 키득키득 웃었다. 작은 등이 들썩였다.
“내가 너한테 언니보다잘해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도…… 바보 같지. 바보 같아. 그건 인정해. 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너는 날 절대 봐주지 않잖아.”
그 말이 맞았다.
“그래도 이대로 갔다간 안 되겠다 싶어서…… 네 진심은 포기하고. 한 번쯤은 언니의 위치를 느껴보고 싶어서, 가짜라도 좋으니까…… 내 목숨으로라도 널 유혹해 봤는데.”
효은은 눈을 감고 평온한 미소를 지 었다.
“이제 알았어. 언니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담배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상호도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어서.
그의 표정을 본 효은이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나빛이가 또 울겠지.”
효은의 등에서 황금빛의 날개가 돋아났다.
“먼저 갈게.”
“잠깐만.”
상호는 정신을 차리고 효은의 손을 붙들었다.
“어디 이상한 데 가지 말고.”
전에 했던 말이었다.
효은은 그때와 달리 고개를 저 었다.
“그렇게 말해도 너는 언니밖에 모르는걸.”
효은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유령처 럼 미끄러지듯 걸어간 그녀는, 날개를 펼치고 밤하늘로 날아올라 저 멀리 날아갔다.
상호는 효은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손으로는 잡을 수가 없었다. 내공을 뻗어도 마찬가지. 잡으려면 진심뿐인데.
마음은 이미 누군가한테 줘 버렸고, 그 사랑은 죽어버 려서 돌려받을 방법이 없었다.
‘미안해.’
상호는 속으로 중얼거 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섰다.
<천국으로>
“쌤.”
뒷좌석에 앉은 태화가 상호의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뭐가?”
“눈이 퀭해요.”
한숨도 못 자긴 했다.
그래도 하루쯤 안 자는 것은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힘이 들었다.
이유야 뻔했다.
“그냥…… 일이 있었어.”
상호는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속으로 삼켰다. 그러자 태화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뒷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어제 실컷 놀아서 그런지 말이 없었다.
어쩌면 효은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특히 나빛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상호는 핸들을 돌렸다.
‘학교에 있겠지?’
다른 곳에 갔으면 곤란한데. 걸어 다니기도 힘들고.
제발 학교 여교사 숙소에 잘 있어 주기를 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