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501)

***

‘……어쩌다 이렇게 됐지?’

상호는 무릎에 앉은 소녀에게 밥을 먹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지윤이 키득거렸다.

“지영이는 쌤이 좋은갑다. 평소엔 한두 숟갈 먹고 안 묵더니 오늘은 조용~히 묵네.”

“우웅.”

지영은 놀리지 말라는 듯 투정을 부리고는 입을 오물거렸다. 빵빵하게 부푼볼이 퍽 귀여웠다.

지윤이 남자아이의 등짝을 두드렸다.

“지성이도 쉬지 말고 꼬박꼬박 묵으라.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혼자서 한 그릇을 못 묵노. 머스마가 되가지고…….”

“묵짜나.”

입에 밥이 들어서 발음이 뭉개졌다.

아이들은 냠냠거리며 밥을 먹었다. 상호도 지영에게 밥을 먹이며 띄엄띄엄 식사를 했다.

정애는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숟가락을 멈춘 채였다.

“지영아.”

“웅?”

“손님 무릎에 앉지 마.”

“우웅…….”

지영이 시무룩해하자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어머님 식사하세요.”

“그래도…….”

“오늘은 그냥 쉬세요.”

“하지만…….”

지윤이 옆에서 거들었다.

“쌤이랑 지가 다 할 텡게 쉬시소. 설거지도 청소도 지가 할랍니더.”

“네가 무슨 집안일을 해. 애들이랑 놀아.”

“와 그랍니꺼. 지가 집안일 다 한 거 쌤도 알고 있습니더. 솔직히 이 앞치마도 어무이보다 지가 더 많이 맸잖아예.”

정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호는 밥그릇을 뚝딱 비운 후 지윤과 함께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반찬만 정리해. 설거지 쌤이 할게.”

“에이, 같이 하믄 좋잖아예.”

지윤은 배시시 웃으며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둘은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좁은 집이라 싱크대 좁았고, 둘은 어깨를 꼭 붙인 채로 그릇을 헹구고 닦으며 주고받았다.

상호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지윤아.”

“네.”

“동생들은 사투리 안 쓰네?”

“이사 온 후로는 안 썼지예. 주변이랑 다른 말을 쓰면 애들 교육에 안 좋으니 까예. 그리고…….”

지윤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부지 떠난 후로는…… 어무이 말씀이 많이 없어지셨어예.”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사투리로 이야기하는 것도 너밖에 못 들었을 거고. 그치?”

“그라지예. 큰애가 있긴 한디…… 가도 이제는 사투리 안 씁니더.”

“큰애라고 하니까 꼭 네가 애들 엄마인 것 같다.”

“그라믄 오늘은 쌤이 애아빠 하이소.”

“얌마…….”

지윤은 깔깔 웃었지만, 상호는 초조한 마음으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거실에서 정애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강도 가족

상호는 거실에 퍼질러 누워서 멀뚱히 천장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주변에 아이들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삼촌~, 나 빙글빙글~.”

“난 비행기~.”

“그래, 그래.”

그가 한숨을 쉬며 내공을 움직이자 아이들이 회전하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꺄아~!”

“쓔우우웅~.”

완전히 보모가 되어 버렸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지윤은 정애와 함께 외출을 나갔다. 아이를 맡아줄 사람이 있는 날이 흔치 않아서. 모녀가 함께 놀러 가는 날이 몇 년 만이라고 했다.

정애는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지만, 지윤은 한사코 어머니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저녁때쯤 오려나? 그때까지 애들이랑 뭘 하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지윤의 제일 작은 여동생 지영이 물었다.

“삼촌. 엄마 어디 갔어……?”

“큰언니랑 놀러 가셨어.”

“언제 와?”

“금방 오실 거야.”

“나 엄마한테 갈래.”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지금은 안 돼.”

“왜? 나 갈래…….”

“평소에도 엄마 가게 가시잖아. 오늘도 그런 거야.”

“갈꺼야!”

상호는 지영이 울음을 장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당황하며 방을 돌아보았다. 방 안에는 지윤의 셋째 동생인 지예가 책상에 앉아 공책에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지예가 그들을 돌아보더니 한 마디 했다.

“냅두세요. 자주 그래요.”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다.

“흐에에엥!”

지영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넷째인 지성이 꼴에 오빠라고 지영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지만, 어째 코를 훌쩍이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울음이 전염되어 두 번째 폭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상호는 쩔쩔매며 아이들을 달랬다.

“울지 마, 응? 엄마 금방 온다니까. 밥 먹기 전에 올 거야.”

“엄무아아아…… 흐어헝헝…….”

“착하지, 착하지.”

지영이 손을 뻗어 그의 안대를 잡았다. 그리고는 쭉쭉 잡아당기며 떼를 썼다.

“어으므아뜨에려아아!”

“어느 나라 말이니…….”

“몬나! 삼촌 미어! 끄으흐엉……. 힉!”

안대가 머리 위로 훌렁 벗겨지며 지영이 뒤로 넘어갔다. 상호는 빠르게 손을 뻗어 지영의 뒤통수를 받쳤다.

지영은 깜짝 놀랐는지 멍하니 상호를 바라보며 딸꾹질을 했다.

“후끅.”

상호는 지영을 일으켜 앉혔다.

“조심해야지.”

그리고 안대를 돌려받으려 했지만, 고사리같은 손이 꽉 움켜잡고 놔주지 않았다.

지영은 안대의 뒷면에 수놓인 고양이 캐릭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울음을 뚝 그친 채로.

“……나 줘.”

상호는 당황하며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대를 바꿨다가는 태화가 서운 해할 것이 뻔했다.

“안 돼, 지영아. 삼촌이 아끼는 거야.”

“어른은 이런 거 하면 안 돼. 어린이만 하는 거야.”

캐릭터를 보고 하는 말 같았다. 언제 울었냐는 듯 또박또박한 말투로,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당차게 주장한다.

상호는 안대를 살살 잡아당겼다.

“이거, 이 캐릭터 인형 사 줄게. 그러니까 이건 줘. 이거 삼촌 옷이야, 옷.

옷은 입어야 되잖아. 그치?”

“아니야. 벗어.”

“제발…….”

상호가 다섯 살 어린아이한테 쩔쩔매고 있는 그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가를 돌아보니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축구공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소년의 시선이 상호와 지영을 향했다.

“……안녕.”

상호는 겸연쩍어하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네가 지훈이구나.”

“누구세요?”

지훈은 공을 내려놓고 눈을 끔뻑였다. 집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내가 들어와 있으니 얼이 빠질 만도 했다.

“누나한테 남친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나이를 따지면 그쪽이 자연스럽긴 하다. 어쨌든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생님이야, 학교 선생님.”

“엄마는 어디 가셨어요?”

“누나랑 외출하셨어.”

지훈은 그때서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안대를 잡은 지영에게 핀잔을 주었다.

“놔. 떼쓰지 말고.”

“우웅, 싫어……. 나 가질래…….”

“혼난다.”

그러자 지영은 울상을 지으며 안대를 놓았다.

동생을 꽤나 엄하게 다루는 것 같았다. 지윤이 기숙사에 살게 된 후부터는 지훈이 아이들을 돌봤을 터였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인데도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컸기 때문일까, 지훈의 눈가에는 정애처럼 피곤이 묻어 있었다.

동생들을 매정하게 대하는 것도, 아마 마음 한구석에 미운 감정을 품어서 그런 듯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상호는 지영에게 안대를 내밀었다.

“자. 삼촌 갈 때까지만 가지고 놀아.”

“응!”

지영이 빵끗 웃으며 그의 볼에 뽀뽀를 했다. 상호는 볼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딸이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지훈이 왔으니 이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지훈의 몫이었다.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아주 능숙했다. 아이들은 지훈이 쓰다듬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상호는 그런 남매들을 지켜보다가 지훈이 자신의 검을 흘끗하는 것을 알아챘다.

“왜, 궁금해?”

상호가 묻자 지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헌터……신 거죠?”

“응.”

“어쩌다 다치신 건지 물어봐도 돼요?”

“전쟁 때 싸우다가 이렇게 됐지.”

“저희 아빠도 전쟁 나갔었는데.”

상호는 쓰게 웃었다.

‘내가 니 아빠 친구야.’

하지만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러셨구나.”

“아저씨도 그럼 연금 받아요?”

“받지.”

“얼마나 나와요?”

“년에 천.”

그 말을 들은 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밖에 안 돼요?”

“적나? 근데 뭐, 어쩔 수 없지. 내 나이에 직업도 있으면서 연금까지 받기는 쉽지 않아.”

전쟁으로 돈을 번 것도 아닌데 나랏돈 쓸 곳은 많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지는 것이 당연했고, 그 기준은 전쟁 전보다도 훨씬 엄격했다.

“아버지도 연금 받으시나?”

“네.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얼마나 나와?”

“1년에 3천이요.”

상호는 지훈을 흘끗 돌아보았다. 듣기로는 분명 13살.

아무리 집안일을 한다 해도 가계까지 맡을 리는 없었다.

“어머님이 알려 주셨어?”

“아니요. 우편 뜯어서 봤어요. 궁금해서. 엄마한테 들키고 엄청 맞긴 했지만요.”

“3천이면 부족하다고 생각해?”

지훈은 지영의 머리카락을 쓸며 중얼거렸다.

“부족하지 않아요? 목숨까지 바쳤는데.”

“목숨 값으로는 얼마를 따져도 부족하지.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적게 받고도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총으로만 싸우던 시절 참전한 사람들 중에는 정말 비상식적일 정도로 적은 연금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사망자의 배우자들은 특히 그랬다.

정애의 나이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고, 직업도 있는데다 참전자 본인도 아니지만, 그나마 성철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연금을 받는 것이었다. 중간에 끊기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나온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왜, 집에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아니요.”

그의 물음에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 때문인지 예의 때문인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본심은 당연히 아닐 터였다.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서 그래?”

정곡이었을까. 지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상호는 지훈의 등을 토닥였다.

“네 방을 갖고 싶은가 보구나. 그럴 때지. 그럼 기숙사 있는 중학교를 찾는 건 어때? 독방 기숙사가 찾기 힘들긴 하겠지만…….”

“기숙사는 안 가요.”

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누나처럼…… 도망 안 쳐요.”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맏이는 아비를 원망하고, 둘째는 맏이를 원망하고.

‘아니 형 집안은 왜 이 모양이야?’

아마 누나가 집안일과 동생들을 전부 자신에게 맡기고 홀랑 떠나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뭐라 말할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핸드폰을 켜며 입을 열었다.

“누나가 도망쳤다고 생각해? 기숙사에서 친구들이랑 편히 놀고 있을 거라고?”

“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상호는 지훈의 앞에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봐봐.”

화면에서는 지윤과 목각인형이 싸우고 있었다.

눈은 퉁퉁 붓고, 코에선 피가 흘렀다. 하지만 지윤은 딱히 아프지도 않다는 듯 멀쩡히 전투를 계속했다.

목각인형의 주먹이 지윤의 배를 후려쳤다.

[끄윽!]

비명도 잠시뿐. 지윤은 딱 한 번 짧게 비틀거리고 다시 보법으로 목각인형에게 달려들었다.

피가 튀고, 흙이 튀었다.

지훈이 멍하니 화면 속의 누이를 쳐다보았다. 상호는 함께 영상을 보다가 말했다.

“누나는 이걸 매일 해. 칼을 맞을 때도 있고, 불덩이를 맞을 때도 있어. 위험하진 않지만, 보통 사람은 견디기 힘들 만큼 무섭고, 위험하고, 힘든 훈련이야.”

지윤의 주먹이 목각인형을 때렸다.

나무와 주먹, 둘 중 하나는 부러졌을 법한 소리가 스피커에서 터져나왔다.

“너는 매일 할 수 있겠어?”

“……아니요.”

지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도 할 수 있어.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어. 최선을 다한다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 그걸 네 누나가 하고 있는 거고.”

간단하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지윤은 그걸 날마다 해내고 있었다.

“네가 왜 누나를 서운하게 생각하는지는 이해하지만…… 약간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지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철을 닮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너도 누나처럼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면…… 당당하게 기숙사 있는 곳으로 가. 눈치 보지 말고. 어머님도 그걸 바라실걸.”

“……네.”

지훈은 대답하면서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때 현관문이 열렸다. 상호는 핸드폰을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녀왔심더~. 앗!”

방글방글 웃으며 들어온 지윤이 지훈을 보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야이 문디 짜슥아. 어무이 밥하는데 어데 놀러 다니나. 도우라고 도우라고 그렇게 말해싸도 듣지를 않고…….”

“……미안.”

“으잉?”

지훈이 군말없이 사과하자 지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윤은 당황하다가 상호와 지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쌤이 뭐 했습니꺼? 저눔아가 이럴 눔이 아닌디…….”

상호는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정애가 지윤을 뒤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종이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모양을 보니 먹을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옷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뭔가가 분명 들어 있긴 한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보기에는 또 눈치가 보였다. 다행히 지훈이 대신 물었다.

“엄마, 어디 갔다 왔어?”

그러자 지윤의 시선이 정애를 향하고, 정애의 시선이 상호를 향했다.

정애는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누나 옷 사러.”

“언니 옷?”

지예가 방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종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볼래!”

“안 돼.”

정애와 지윤이 지예를 막았다. 지예가 발을 동동 굴렀다.

“왜! 어차피 또 나한테 물려줄 거잖아!”

“이건 물려주는 거 아냐.”

상호는 그녀들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속옷인가?’

그런데 말하는 것을 보면 또 아닌 것도 같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윤이 주방으로 걸어가다가 거실에서 자고 있는 지영을 내려다보았다.

“야는 또 와 안대를 잡고 자노. 쌤요. 저녁도 묵고 가실 거지예?”

“아니, 나도 이제 슬슬 가야…….”

“아이고~, 어무이 또 애들 밥 묵이느라 고생하긋네~.”

상호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잠까지 자고 가게 하진 않을 거지?”

“우째 알았습니꺼. 눈치 참 빠르시네예.”

지윤이 씩 웃으며 앞치마를 묶었다.

“나빛이한테 다 들었습니더. 잠도 같이 잤다믄서예. 그 조용한 가시나가 으찌나 자랑을 하는지……. 내도 안 질랍니더. 이틀은 묵고 가이소.”

“……나 갈게.”

“으딜 도망갈라 캅니꺼. 칼 내놓으이소.”

상호는 서둘러 도망치려고 했지만, 안대는 지영이 꽉 잡고 있고 칼도 지윤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렇다고 형수 앞에서 힘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날강도 가족이 따로 없구나…….’

그는 한탄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 누운 지영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안대를 꼭 껴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에헤……. 아빠…….”

제일 어린 아이라 아빠 얼굴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을 텐데. 누구 꿈을 꾸는 걸까.

상호는 손을 들어 지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명절 때만이라도 애들 보러 와야겠다.’

물놀이야

“오빠~ 달려~.”

“야, 인마!”

상호는 태화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고 벌컥 성을 냈다. 그 소리에 조수석에서 자고 있던 설미가 깜짝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뭐, 뭐야. 나 불렀어?”

“아, 아니예요. 미안해요.”

“바꿔 줘?”

“아뇨. 여태 선생님이 계속 운전했잖아요. 바꾼 지 한 시간도 안 됐으니까 그냥 계속 자요.”

“응……. 피곤하면 말해.”

설미는 다시 눈을 붙였다.

뒷자리에서 해련이 웃었다.

“교대할까, 강 선생?”

“괜찮아요.”

상호는 백미러로 해련의 옆에 앉은 효은을 째려보았다. 효은은 대화에 끼지도 않고 나몰라라 하며 창밖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휴, 어차피 운전 못하니까.’

그래도 빈말로라도 도와준다 하면 얼마나 예쁠까. 상호는 말없이 승합차를 몰았다.

어른 넷. 아이 다섯.

그 중에 상호 혼자만 남자였다.

‘뭐, 남자가 같이 간다고 해도 딱히 잘 놀지는 않겠지만…….’

처음에는 아이들 넷만 데려가려고 했다.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놀고 조용히 돌아오려고.

하지만 여행 준비를 하다가 효은에게 들켜서 그녀도 함께 가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상관없었다. 투닥거려도 스스럼없는 사이니까. 귀찮아도 데려가서 같이 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은율을 데려가려고 할 때부터 일이 꼬였다.

다른 반 아이를 데려가서 논다는 것도 위험한데, 남교사 관련해서 일이 터졌던 아이를 데려간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심지어 집에서 노는 것도 아니고 탁 트인 휴양지다. 학교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했다가는 큰일이 날 터였다. 수영복을 입는다는 것이 또 문제고.

그래서 못 데려간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해련에게 달려가서 떼를 썼다.

그랬더니 해련이 그럼 교장으로서 같이 가주겠다며 함께 가게 되었고, 마침 옆에서 듣고 있던 있던 설미까지 덤으로 따라오게 되었다.

‘그래도 뭐, 애들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어른들이니까. 내가 더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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