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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가 고른 공포영화는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와 사람을 토막치는 물건이었다.
“꺄아아악~!”
태화는 비명은 지르지만 즐기고 있는 분위기였다. 반면 나빛은 극초반 이후로는 단 한 장면도 보지 못하고 상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양손에 상호의 손과 세희의 손을 잡은 채로.
세희도 티는 안 내지만 거북해하는 표정이었다.
상호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자 뒤틀린 얼굴을 한 귀신이 무언가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정서상 안 좋다.’
결국 그는 노트북을 껐다.
한참 집중하고 있던 태화와 지윤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요?”
“다른 애들이 재미없어하잖아.”
“치, 나약한 것들…….”
“다른 영화 골라 봐.”
“됐어요. 안 볼래요. 제일 재밌을 때였는데…….”
상호는 태화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보여줄게. 다른 영화 보자. 응?”
“쌤.”
“응?”
“우리 무서운 이야기 해요.”
“……무서운 이야기?”
“네.”
태화가 씩 웃었다.
***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교탁 앞에 선 태화가 그들을 둘러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상호는 아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태화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불을 끄고 커튼까지 친 교실은 바로 옆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창문을 사납게 때리는 빗방울과 햇빛이 닿지 않아 서늘해지는 공기가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태화도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쌔끈하고 쭉쭉빵빵한 고등학생 언니야가 살고 있었어요.”
“그럼 딱히 먼 옛날이 아닌 거 아냐? 무슨 조선시대 이야기 하려는 줄 알았네.”
세희가 핀잔을 날려도 태화는 묵묵히 말을 이어나갔다.
“언니야는 남몰래 사귀는 오빠야가 있었어요. 둘은 알콩달콩 행복하게 지냈죠. 데이트도 하고. 뽀뽀도 하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오빠야가 바람을 피고 있던 거예요. 그것도 언니야하고 같은 반 여자애랑.”
“저런.”
“그래서 언니야는 그 나쁜 년이랑 결판을 내기로 했어요. 나쁜 년이 먼저 제안을 했죠. 밤에 학교 화장실에 가서 칼을 물고 거울을 보기로. 그러면 미래의 배우자의 모습이 등 뒤에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오빠야의 얼굴을 본 사람이 이기는 내기였어요.”
“그 둘은 그걸 믿었어?”
“언니야는 그냥 담력 시험이라고 생각했어요. 쫄리면 지는 거죠. 만약 못 한다면 사랑한다면서 겨우 그 정도도 못 하냔 말을 듣게 될 테니까.”
갑자기 태화가 다가와서 상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시만 따라와 보세요.”
“응? 왜?”
“배우가 필요해요.”
태화는 그를 교실 뒷편의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의 검을 뽑아 입에 물게 했다.
“거울 보세요.”
“음.”
“뒤에 뭐가 보여요?”
뭐가 보이냐니. 당연히 태화가 보였다.
상호는 멀뚱히 거울 너머의 태화와 눈을 마주쳤다.
“너.”
“그게 쌤 미래의 배우자예요.”
“야이…….”
상호가 혼을 내기도 전에 세희의 칼집이 태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태화는 여유롭게 교실 앞쪽으로 순간이동을 해 칼집을 피했다. 세희가 짜증을냈다.
“이야기나 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언니야는 그 나쁜 년 말대로 밤에 학교에 왔어요.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 식칼을 물고 거울을 보는데…… 거울 속 자신의 뒤에 뭔가가 보이는 거예요.
언니야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죠.”
나빛이 소름이 올라온 팔뚝을 부여잡았다.
“그…… 그래서? 뭐였어?”
“언니야는 다시 거울을 봤어요. 그러자 거울 아래쪽에서부터 뭔가가 스멀스멀일어서는 거예요. 식칼을 든 여자가. 알고 보니…….”
태화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나쁜년이 식칼을 들고 숨어있다가 확!”
그와 동시에 나빛의 뒤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나빛이 경기를 일으키며 펄쩍 뛰었다.
“꺅! 어헝항항……. 흐헝……!”
검은 결정창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상호는 울음을 터트리는 나빛의 등을 다독이며 태화에게 꾸중을 했다.
“얌마, 겁 많은 애를 놀래키면 어떡해.”
“괴담은 원래 그런 거라구요.”
태화는 목표를 달성했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 나는 끝. 다음 사람 누구야. 세희? 지윤? 쌤?”
“내가 할게.”
세희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
“……그런데 버튼이 안 눌리는 거예요.”
“으으…….”
나빛이 와들와들 떨며 상호의 손을 움켜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세희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1층도, 2층도, 3층도. 그리고 5층도, 6층도, 7층도. 눌리는 버튼은 오직 하나, 4층뿐이었어요.”
세희가 스산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상호도 살짝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괴물은 때려잡아도 귀신은 때려잡아 본적이 없어서.
지윤도, 심지어는 태화도 마른침을 삼키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결국 남자는 4층 버튼을 눌렀죠. 그랬더니…….”
“그랬더니?”
그의 물음에 세희는 씩 웃었다.
“다음 시간에.”
“응?”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앞으로 2년이나 남았는걸요.”
“끙…….”
엊그저께 예경의 이야기를 끝까지 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복수인 모양이었다.
상호는 김이 빠져서 축 늘어졌고, 태화는 분통을 터트렸다.
“야! 거기서 끊으면 어떡해! 다음번에 들어도 재미없단 말이야!”
“너 재밌으라고 들려준 거 아니야. 궁금하면 밤에 내 방 오든가.”
“그래? 그럼 해 봐! 무서운 이야기로 한번 뜨자고. 지윤이까지 끼워서.”
태화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빛은 평소라면 자기가 못 끼는 것을 섭섭해 했겠지만, 지금은 덜덜 떠느라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상호는 그런 그녀들을 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세희가 저렇게 이야기를 잘 할 줄은 몰랐네……. 여자애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가?’
따로 공부라도 해야 할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빛의 등을 토닥였다.
남겨진 이들
여름은 물의 계절.
장마는 7월 말이 되어 끝났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습한 공기가 불쾌지수를 잔뜩 높였다. 잠깐만 밖에 나와도 땀이 흐르고 숨이 막혔다.
방학식이 그런 날이었다.
“쌤.”
태화가 그를 불렀다.
상호는 칠판에 방학 일정을 쓰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응?”
“제가 우리 반 설문조사를 좀 해 봤는데요.”
“설문조사?”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상호는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뭔데?”
“계곡이 한 표.”
태화가 주머니에서 종이쪼가리 하나를 꺼내 읽었다.
“바다가 한 표. 수영장이 한 표. 호캉스 한 표, 해외여행 한 표. 그렇게 됐으니까, 공평하게 전부 놀러 가죠.”
“뭔 호캉스고 해외여행이야? 니들이 돈이 어딨어?”
“나빛이가 그러던데요. 다 같이 놀러갈 땐 돈 걱정 하지 말라고.”
“절대 안 돼. 남의 돈으로 놀지 마. 그리고 왜 표가 다섯 개야?”
“은율이요.”
“은율이는 왜…….”
상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방학이 그렇게 긴 게 아니잖아. 그치?”
“넹.”
오늘, 7월 24일부터 8월 10일까지. 2주 남짓한 시간이다.
“그런데 다섯 군데씩 놀러 가자고?”
“짧은 만큼 열심히 놀아야죠.”
“1박씩만 잡아도 10일이 날아가고…… 중간중간 쉬는 날 하루만 넣어도 14일인데. 그냥 방학 내내 놀자는 말이야?”
“넹.”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사래를 쳤다.
“계곡, 수영장……, 바다까지. 셋 중에 하나만 골라. 나머지는 안 돼.”
“에에~, 왜요~.”
“왜는 뭐가 왜야. 2학기 때 1등 안 할 거야? 다른 애들 열심히 수련할 때 띵가띵가 놀기만 할 거야?”
“넹.”
태화는 당당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구르며 떼를 쓰려는 것이다. 그걸 간파한 상호는 허공섭물로 태화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태화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빽빽 소리를 질렀다.
“물~놀~이~!”
“못 놀아서 죽은 귀신이냐? 왜 이렇게 놀기만 하려고 그래.”
“한 번도 안 가 봤단 말이에요!”
“너흰 안 해본 게 왜 이렇게 많냐…….”
상호의 시선이 다른 아이들을 향했다. 아이들도 태화를 거들었다.
“바다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요.”
“방학인데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는 싫습니더. 두 곳은 가야지예.”
“2학기때 잘 할게요, 헤헤…….”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은 갈 수 있다 하더라도 두 번은 곤란했다.
“방학때 선생님도 할 거 많다. 너희랑 놀기만 할 수가 없어.”
“뭐 하시는데요? 어른들끼리 놀아요?”
“곧 지윤이 가정방문 갈 거야.”
그 말에 지윤이 깜짝 놀랐다.
“저희 집이예?”
“응. 가서 인사 한 번 드려야지. 공개수업 때도 못 뵈었으니까.”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상호는 지윤과 눈을 마주쳤다.
“지윤이는 어머님께 여쭤봐서 편한 시간 알려 줘. 그때 갈게. 다같이 노는 건 그 후에 이야기하자. 알았지?”
“넵.”
“흐으음…….”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태화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못마땅한 듯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
“벨트 맸어?”
“네.”
조수석에 앉은 지윤이 씩 웃었다. 평일이지만 방학이라 간편한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다.
상호는 검을 뒷자리에 놓으며 툴툴거렸다.
“같이 좀 가자니까 죽어도 안 간다네. 쯧….”
“수녀님예?”
“응. 가서 뭐 하냬. 그래도 형수 한번 보지 그걸 귀찮다고…….”
사실은 알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을 보는 게 부담스럽다는 걸. 상호도 그것 때문에 효은에게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그는 운전대를 돌리며 지윤을 흘끗했다.
“집에 얼마만에 가?”
“두 달쯤 된 것 같아예.”
“동생들은 다 집에 있나? 애들도 방학이지?”
“그럴 깁니더. 애들은 일찍 하니까예.”
아직 아침이었다. 남의 집에 가기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그래도 일찍 가서 볼일만 보고 빨리 돌아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윤이 상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쌤요. 식사하고 가실 거지예?”
“아니.”
“에이, 드시고 가이소. 우리 엄니 김치찌개 잘 합니더.”
상호는 성철이 생전에 질리도록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내가 해주는 김치찌개가 정말 끝내준다던 말.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지윤의 어머니에게는 오늘이 쉬는 날이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머님 쉬셔야지.”
“밥 많아예. 입 하나쯤 는다고 뭐라 안 합니더.”
“괜찮아.”
“먹으면 끔뻑 죽는다니까예.”
“괜찮대도…….”
그는 진땀을 흘리며 지윤의 본가를 향해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