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화가 밥을 깨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은율이 너…… 생긴 거랑 다르게 요리 되게 못하네.”
“너는 밥은 안 하는 주제에 왜 이렇게 투정이 많아?”
세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세희의 밥도 그리 많이 줄어들진 않았다.
태화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도 딱 보면 요리 잘 할 것 같았는데……. 의외야.”
“너희 나이에 요리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그러냐. 지윤이가 특별한 거지.”
상호는 핀잔을 주고 밥을 먹었다. 이번에도 제일 잘 먹고 있는 사람은 그와 지윤이었다.
태화는 납득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세희를 돌아보았다.
“너는 요리 잘 해?”
“너보단.”
“흐으음……, 자신 있나 보네.”
태화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나중에 대결해 봐? 누가 더 잘 하는지?”
“해 봐. 언제든지.”
둘의 눈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빛이 그런 둘을 보며 헤헤 웃었다.
“나도 그때 불러 줘……, 헤헤.”
은율은 세희와 태화가 또 싸울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은율에게 지윤이 말했다.
“신경쓰지 말라고 안 캤나. 다 사랑싸움이다. 지들까리 맛있는 거 먹여줄라고 저러는 기라.”
상호도 한 마디 보탰다.
“쟤들은 저게 일상이야. 우린 밥이나 먹자.”
“……네.”
은율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세희와 태화가 싸우고 나빛이 구경하는 동안, 상호와 은율과 지윤은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무 보니까 묵을 만하구마. 은율이 너무 기죽지 마래이.”
“응……, 고마워.”
“쌤요, 아침에 이래 묵으니까 괘안치 않습니꺼?”
“그러게. 오래간만에 남들이랑 아침 먹는 거 같네.”
“가끔 이렇게 모여서 해묵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더.”
“그럼 한 달에 한 번쯤 모일까. 은율이도 또 같이 먹을래?”
“네.”
“그래, 나중에 부를게.”
셋은 그렇게 식사를 계속했다. 자취경력으로 싸우기 시작한 세희와 태화를 뒤 로한 채.
비 오는 여름, 교실 불을 끄고
장마가 시작되었다.
퍼붓는 장대비가 학교를 적셨다. 운동장도, 건물도. 그리고 사람도.
교실에 들어온 세희가 땋은 머리를 쥐어짜자 그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아…….”
하얀 하복의 안쪽에 검은 반팔티가 비쳤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는 세희를 보며 혀를 찼다.
“기숙사에서 오는데 그렇게 많이 맞았어?”
“네. 우산이 의미가 없어요.”
“아이고…….”
뒤이어 태화와 지윤이 들어왔다. 그녀들 역시 흠뻑 젖은 채였다.
태화가 뒤통수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모델 포즈를 취했다.
“시스루.”
“염병하지 말고 앉아.”
“칫…….”
마지막으로 나빛까지 교실에 들어왔다. 나빛은 접이식 우산을 힘없이 덜렁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너도 다 젖었네.”
상호는 나빛의 젖은 얼굴을 소매로 눌러 닦았다.
네 명이 자리에 앉자 바닥이 흥건해졌다. 덥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시원하지도 않은 눅눅한 공기가 교실에 가득 찼다.
아이들이 축 늘어져서 우는 소리를 냈다.
“쌤~ 찝찝해요~.”
“에어컨 틀어주세요…….”
“뭔 에어컨이야. 감기 걸린다.”
상호가 딱 잘라 말하자 태화가 손을 들었다.
“그럼 교복 벗어도 돼요?”
“온도 올려달라고 말해 볼게. 제습 모드로 돌려달라고. 그때까지만 참아.”
“3.”
태화가 단추를 하나 풀었다.
상호의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내가 어쩌다 애들한테 협박을 당하게 됐지……?’
“얌마, 여름이라도 감기 걸린다니까…….”
“2.”
“혼난다! 어디 선생님 상대로…….”
“1.”
“알았다, 알았어, 틀어 줄게……. 너 근데 그 아래에 뭐 입었는데?”
“별거 없어요.”
태화는 교복을 확 벗어젖혔다. 군데군데 젖은 회색 민소매 티가 드러났다.
문제가 있는 옷은 아니지만 남선생이 보기에는 좀 민망한 차림이었다. 지윤과 달리 근육이 없는 태화라서 더욱 그랬다. 지윤은 몸이 탄탄해서 운동하는 사람 티가 나니까 괜찮은데.
상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음부턴 반팔 입어. 아니면 못 벗게 할 거야.”
“엥~.”
태화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쌤. 저희 방학에…….”
“방학? 방학은 왜?”
“음……. 아니에요, 흐음.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그러면 곤란한데…….”
방학에 무슨 짓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호는 태화의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감기 조심해. 여름이라고 안 걸리는 거 아니니까. 감기에는 성력도 안 듣는다.”
“네.”
“그건 그거고 수업은 해야지.”
“네?”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가 오는 날에는 야외수업이 없다. 이맘때쯤에는 1학기 교과수업도 다 끝나서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반은 다 영화를 보거나 자습을 시키곤 했다.
그러나 그건 다른 반 이야기고, 상호의 생각은 달랐다.
“비 온다고 못 나가는 거 아니잖아?”
“감기 걸리는데요!”
“뛰면 안 걸려.”
상호는 씩 웃으며 엄지로 창 밖을 가리켰다.
“준비하고 나와.”
***
“아동 학대야아아아!”
“니가 애야? 조용히 하고 뛰어!”
“응애애액!”
태화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빗줄기 사이를 달려갔다.
상호는 아이들이 운동장을 뛰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탠드에는 플라스틱 차양막이 설치되어 있어 비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상호는 일부러 운동장에 서서 아이들과 같이 비를 맞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는 아예 물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정도로 푹 적셔진 상태였다.
“얘들아, 한 바퀴만 더.”
상호가 소리치자 태화가 반색했다.
“끝? 끝? 마지막? 라스트? 시마이?”
“뛰는 거 보고.”
“으아아악!”
태화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지만, 굵직한 장대비에 금방 사그라지고 말았다.
상호는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힘껏 달리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앞으로 불러들였다.
“됐다. 그만 뛰고 와.”
아이들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후아…….”
“스탠드 가서 쉬자. 태화가 불 좀 피워 주고.”
그들은 다 함께 스탠드로 가서 태화가 바닥에 피워낸 검은 불꽃 주변에 둘러 앉았다.
상호는 아이들의 얼굴에 가닥가닥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비가 와도 수련은 해야 하는 거야. 언제 어떤 상황에든 적응할 수 있게. 무슨 뜻인지 알지?”
“지는 상관없심더.”
지윤이 머리를 탈탈 털며 웃었다.
“비 올 때 뛰는 것도 재밌네예.”
“저도 괜찮아요.”
세희가 머리를 꽉꽉 눌러 짜며 말했다. 그 옆에서 태화가 세희의 머리카락을 보며 중얼거렸다.
“뭔 걸레 짜듯 짜네…….”
그 말에 세희가 태화의 꼬리를 잡고 꽉꽉 쥐어짰다. 태화가 혀를 빼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응그흐윽! 잘못, 잘못했어…….”
“흥.”
“그만 싸우고 옷이나 말려. 안에 들어가면 불 못 피우니까.”
상호는 아이들과 함께 태화가 피워준 불을 쬐었다.
***
“쌤! 우리도 영화 봐요!”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교실에 들어오니, 태화가 그런 말을 했다.
상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안 그래도 남은 시간 동안 애들이랑 뭘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래, 뭐…… 할 것도 없으니까.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공포영화!”
그러자 지윤이 눈을 반짝였다.
“지도 볼래예!”
“으으, 난 싫어…….”
나빛이 울상을 지으며 몸서리를 쳤다. 무서운 걸 못 보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태화를 향해 난색을 표했다.
“공포 말고 다른 건 안 돼?”
“여름에 비 오면 당연히 공포영화죠! 다른 게 어딨어요!”
“그래도 나빛이가 싫어하니까.”
태화가 나빛과 눈을 마주쳤다.
“야, 나빛. 공포영화가 왜 싫은데?”
“놀래키는 거 싫어…….”
“요즘 그런 거 안 나와. 다 사람 심리를 이용하는 거라니까. 그게 얼마나 재밌는데.”
“잔인한 거 싫어…….”
“잔인한 것도 안 나와. 진짜라니까. 그런 거 한물 갔어.”
“귀신 싫어…….”
“안 나온다니까! 진짜 딱 한 번만 나 믿고 봐봐. 응? 응? 같이 보자고오오~!”
태화의 손이 나빛의 어깨를 흔들었다.
결국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한 번만 볼게.”
“오케이!”
상호는 허공애 어퍼컷을 날리는 태화에게 말했다.
“교무실에 선생님 자리에서 노트북 가져와. 쌤 앉을 의자도.”
“넹.”
태화는 순간이동으로 몇 초만에 노트북과 의자를 들고 왔다.
상호는 태화의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아이들이 그 주변으로 의자를 끌고 몰려들었다.
그가 영화 결제 사이트를 들어가자 태화가 영화 제목들 중 하나를 검지로 짚었다.
“이거 봐요. 이거 재밌어 보이는데.”
“뭔데?”
상호는 화면을 보다가 이를 갈며 태화의 이마를 찰싹 쳤다. 제목이 딱 봐도 삼류 에로영화라서.
“너 이러면 안 보여줘.”
“에이, 장난이죠. 이건 어때요? 지윤이 너 이거 봤어?”
“아니. 내도 보고 싶었는디 못 본 거네.”
“이걸로 할게요.”
상호는 태화가 가리킨 영화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