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호야.”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상호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야.’
아이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무언가에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위에 눌리면 이런 느낌일까. 당황하는 상호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제자가 생겼나 보구나.”
등 뒤의 여인이 웃었다.
상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인가.’
하지만 너무 생생했다. 마치 꿈이 아닌 다른 무언가인 것처럼.
다시 눈을 떠도 아이들은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간신히 입술만 떨어질 뿐.
그는 힘겹게 대답했다.
“네.”
“기가 나랑 비슷한 걸 보니까…… 여자네. 분명 너보다 어릴 거고.”
여인이 키득거렸다. 왜 그 부분에서 웃는 건지 상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착한 아이니?”
“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그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성실해요.”
“다행이다.”
여인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너도 어른 다 됐구나. 제자를 다 받고.”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누나.”
“응.”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
“네 안에 내가 있으니까.”
예경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호는 예경이 죽기 전에 그에게 모든 내공을 물려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내공에 생각이나 뜻도 담을 수 있어요?”
“그렇더라. 나도 지금 알았어. 뭐, 진짜 나는 이미 죽었지만.”
꿈에 나타난 것은 그의 내공에 남은 예경의 념.
상호는 그 사실을 깨닫고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편해진 줄 알았는데.
“그럼 영혼이라든가…… 그런 건 아닌 거죠?”
“아니지, 물론.”
예경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저 같은 내공에 반응해서…… 잠시 밖으로 나온 것뿐이야.”
그런데 내공 주제에 왜 이리도 진짜 같은지.
상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를 악물었다.
“어허. 운기는 차분한 마음으로 해야지.”
예경이 그의 내공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래도 그냥 내공일 뿐이라고만 하면 너무 낭만 없으니까…… 제자랑 같이 운기조식을 하면 심상에 스승이 찾아온다, 정도로 해 둘까.”
낭만을 사랑하던 그녀. 성격까지 실제를 꼭 닮았다.
상호의 운기가 끝나갈 때쯤 예경이 입을 열었다.
“상호야.”
“네.”
뺨에 그녀의 입맞춤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내공이다. 내공일 뿐인데.
내공에 깃든 념마저도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말을 꾸며낸다.
상호는 예경을 붙잡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도요.”
상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 봐요.”
그리고 현실의 눈을 떴다.
아직 운기조식 중인 세희, 지윤, 은율이 보이고, 그 뒤로 함께 잠든 나빛과 태화가 보였다.
눈에 눈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어서, 소매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어우, 애들 앞에서 쪽팔릴 뻔했네…….’
상호는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렸다.
그는 그렇게 아이들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
***
지윤이 만든 저녁밥은 꽤 맛이 좋았다. 동생들에게 밥을 자주 해줘서 자연스럽게 요리도 잘 하게 된 모양이었다.
밥 먹고 다 정리하고 나니 여덟 시가 되었다. 상호는 소파에 앉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 슬슬 한 명씩 씻어. 오래 걸릴 거 아냐.”
“쌤은 언제 씻게요?”
“난 너희들 다 씻고 나면.”
제일 먼저 나빛이 들어갔다.
상호는 슬쩍 일어나서 침실로 향했다. 애들 씻으러 드나드는 곳에 같이 있기가 좀 그랬다.
그렇게 아이들이 다 씻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문 밖에서 나빛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선생님.”
“어, 나빛아.”
“혹시 헤어드라이기 있으세요?”
“드라이기? 아니, 없는데.”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 씻었어? 선생님이 머리 말려 줄까?”
“네. 부탁드려요.”
문을 열자 잠옷 차림의 나빛이 서 있었다. 젖은 회색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어두운 빛을 띄었다.
상호는 나빛이 내민 수건을 받아 그녀의 머리를 탈탈 털었다. 기계처럼 일정하고 정확하며 빠른 속도로.
나빛은 서비스에 만족했는지 눈을 감고 씩 웃었다.
“감사합니다, 헤헤…….”
나빛의 뒤에서 지켜보던 태화와 지윤이 앞다투어 소리쳤다.
“쌤! 저도요!”
“지도예!”
“너희는 빨리 씻기나 해. 씻고 나오면 다 해 줄 테니까.”
세희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멋쩍어하며 뺨을 긁적이는 모습을 보니 아마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은율은 그런 일을 하기엔 아직 거리가 멀었고.
상호는 씻고 나오는 아이들마다 머리를 닦아 주었다.
마지막 차례인 태화는 뿔 때문에 시원시원하게 털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물기는 다 닦았다.
그는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지며 안대를 벗었다.
“다들 씻었지?”
“네.”
“나도 이제 씻어야겠다.”
상호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비누와 샴푸 냄새 말고도 다른 향기가 났다. 뭉근한 체취. 사람 살냄새. 그는 그 냄새를 애써 무시하며 몸을 씻었다.
샤워를 마친 상호가 밖으로 나오자 아이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상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쓸어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뭔 일 있어?”
“아니요.”
“저희가 쌤 머리 말려 드릴까요?”
“됐어. 괜찮아.”
상호는 태화의 말에 손사래를 치고 수건을 목에 걸었다. 그러다가 궁금한 것이 생겨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 근데 잠은 어떻게 자냐?”
“소파에서 자죠, 뭐.”
“여름이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이불도 담요도 없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침대에서 자. 내가 소파에서 잘게.”
“괜찮아요.”
“그래도 돼요?”
상반된 반응이 세희와 태화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둘은 서로를 째려보고는 다시 한 마디씩 했다.
“선생님이 침대에서 주무세요.”
“쌤도 침대에서 같이 자요.”
“혼난다, 인마. 은율이도 있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상호는 태화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얏!”
“어쨌든 너희가 침대에서 자. 잘 붙어 누우면 다섯이서 잘 수 있을 거야. 너무 좁겠다 싶으면 두 명이 소파에서 자고. 난 바닥도 상관없으니까.”
“어떻게든 침대에서 해결 보겠심더.”
지윤이 맡겨 달라는 듯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호는 피식 웃으며 소파에 앉았고,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침실로 들어갔다.
은율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쌤, 꿈에서 봐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답했다.
곧 침실의 문이 닫히고 불이 꺼졌지만, 그 안에서 또 이야기가 시작될 것임을 상호는 알고 있었다.
‘은율이도 애들이랑 많이 친해졌음 좋겠네. 요즘 힘들었을 텐데…….’
학교에서는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으니까. 은율에게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상호는 머리를 마저 말리고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운기조식 때의 일이 기억났다.
‘……또 보고 싶네.’
그는 그런 바람을 품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에 관하여
물소리가 들렸다. 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
그 소리에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니 어둠 속에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상호는 조용히 눈을 몇 번 끔뻑였다.
주방에서 세희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세희구나.’
문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건 태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태화는 장난치기를 좋아하니까.
그는 계속 자고 있는 척 눈을 감았다.
꼴깍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그 후에는 침실로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발소리는 방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 상호에게 다가왔다.
‘뭐야, 왜 오는 거야…….’
상호는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진땀을 흘렸다. 머리맡에 오도카니 서 있으니 무슨 귀신 같았다.
세희가 그의 옆에 앉아 소파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눈을 감았어도 몸에서 나는 소리와 숨결의 위치로 알 수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세희가 숨을 쉬었다. 눈을 뜨면 코앞에 있을 것 같았다.
상호는 입냄새가 날까봐 살짝 숨을 죽였다.
그러자 세희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선생님.”
상호는 못 들은 척했다.
“깨어 계시죠?”
못 들은 척했다.
갑자기 귀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후우…….”
세희가 입김을 분 것이었다. 상호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귀를 긁적였다.
“왜 안 자냐, 세희야…….”
“깨어 계신 것 같았어요.”
세희의 웃음이 점차 옅어졌다.
“선생님.”
“응.”
“저 아까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상호는 세희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갔다.
“운기조식 때?”
“아……. 네. 맞아요.”
세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 알고 계신 거예요?”
“아니, 나도 잘은 모르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들렸어요.”
세희는 그때의 감각을 되살리려는 듯 눈을 감고 집중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일단은 여자 목소리였어요.”
상호는 일어나 앉아서 세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뭐라고 하는지는 못 들었어?”
“네. 너무 작아서…… 그래도 마지막 말은 들었어요.”
“뭐랬는데?”
“상호 잘 부탁한다고…….”
세희는 말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죄, 죄송해요. 실수로……. 들은 대로…….”
“괜찮아. 내가 너보다 막 어른도 아닌데.”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세희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분…… 인 거예요?”
“아마도.”
세희에게 전해준 내공에 예경의 것이 섞여있었던 듯했다. 그래서 동시에 반응한 것이고.
운기조식을 할 때 몸이 공중에 뜨기도 한다느니, 은은한 빛이 나기도 한다느니 여러 소리를 들어 봤지만 이런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내공에 념이 남아 함께 운기조식을 할 때 공명한다니.
“너한테 준 내공에 스승님 게 들어가서 그래. 그게 내 몸에 남은 스승님 내공이랑 반응한 거고. 우리끼리 운기조식을 하면 그런 일이 생기나 봐.”
“이런 일이 흔해요?”
“아니. 나도 처음 겪는 거라서.”
“선생님도요? 선생님도 그 분 목소리 들었어요?”
“응. 나는 좀 더 정확히 들었지.”
“뭐라고 하셨어요?”
“비밀.”
그러자 세희가 그의 옆에 앉아 눈을 마주쳤다.
상호는 세희의 예쁜 눈에서 부담스러운 눈빛을 느끼고 살짝 옆으로 비켰다.
“왜, 왜 그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어떤 거?”
“선생님의 스승님이요.”
세희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었다.
“저는 선생님이랑 같은 심법 배웠잖아요. 궁금해요. 어떤 분이 만드셨는지, 어떻게 선생님을 가르쳤는지……. 그 목소리, 그 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그건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안 돼.”
상호는 엄지로 중지를 튕겨 세희의 코끝을 쳤다.
“아얏…….”
“너도 알잖아. 단순한 스승 관계가 아니었고…… 그걸 이야기하려면 너무 많은 비밀을 말해야 돼.”
다리부터 눈까지. 그의 모든 비밀은 예경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 자체도 또 하나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세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 알고 싶어요.”
“어허…….”
“저 1등 했잖아요. 알려주세요. 그게 소원이에요. 그 분에 대해 아주 조금만이라도요. 궁금해서 잠도 안 온단 말이에요.”
무공을 알려줬더니 이젠 비밀까지 알려달라고 한다. 이러다 나중엔 몸이고 마음이고 다 내놓으라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상호는 그녀의 양쪽 볼따구니를 잡고 흔들었다.
“이 고집쟁이야.”
“아야야…….”
그래도 심법을 알려준 이상 어느 정도는 말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도 몰랐다.
세희, 태화, 나빛, 지윤. 넷 모두 학생이며 제자. 그렇지만 만약 예경이 그의 앞에 나타나 네 제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상호는 세희라고 대답할 터였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여기선 좀 그렇고…….”
침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이야기 도중에 누군가가 깨면 곤란했다.
상호는 현관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