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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년 만이었다. 작년 12월에 예현여고에 취직하고 숙소에 들어갔으니까.
오랜만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에 먼지가 가득했다. 상호는 내공을 뻗어 청소기를 꺼냈다.
‘물은 잘 나오려나.’
다행히 전기, 가스, 온수 다 잘 나왔다. 문제는 냉장고였다. 열어보니 역시나 유통기한 지난 음식이 한가득이었다. 그는 상한 것들을 골라내어 버렸다.
그리고 화장실 상태도 한 번 확인하고, 거실로 돌아와 창문을 연 후 먼지떨이로 가구 위를 털었다. 그 옆을 청소기가 저 혼자 돌아다녔다.
혼자서 청소하다 보니 집이 은근히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이 살 땐 좁다고 느꼈었는데.
둘이 살면 딱 좋았던, 그런 넓이였다.
정리를 한 번 해서 양친의 흔적은 없었지만, 몇 번 머물렀던 그녀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상호는 예경의 사진이 든 액자를 챙겨 침대 옆 서랍에 넣었다.
침대에는 웬 인형들과 사진첩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상호는 그게 뭔지 얼른 기억을 해내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태화 집에서 가져왔던 거구나.’
태화에게 술을 먹였던 날의 다음 날. 트렁크에 넣어놨던 것을 그냥 대충 침대에 던지고 학교로 돌아가 버렸었다.
아직은 보여줄 때가 아니다.
상호는 인형과 사진첩을 벽장에 넣었다. 이번엔 까먹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대충 정리가 다 끝나가는데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일찍도 왔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들어와서 식사 준비 하면 딱 점심 먹을 시간이 될 터였다. 상호는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아파트 복도에 다섯 명의 아이들이 사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
“……?”
“심심해 보여서 데려왔어요.”
당황해서 입도 못 여는 그에게 세희가 설명했다. 세희의 뒤에는 은율이 서 있었다.
은율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니…… 어…… 그래.”
상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몇 번 봐서 안면은 텄지만, 잘 모르는 애를 집에 덜컥 들여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같은 반도 아니고 다른 반 아이를.
그렇다고 돌려보내자니 너무 매정한 것 같고.
결국 그는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
“여봉~ 나 왔엉~.”
태화가 콧소리를 내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다들 가방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지윤의 손에는 장바구니까지 들린 채였다.
그 안에 담긴 음식의 양을 본 상호는 당황하며 물었다.
“얘들아.”
“네!”
“너희 설마…… 하루 자고 가려고?”
“네!”
그는 이마를 짚었다.
“……안 돼.”
“아 왜요~. 쌤~.”
“저희가 점심 저녁 아침 다 차려드릴게요.”
나빛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말했다.
밥이 문제가 아닌데.
상호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너희 사감선생님한텐 뭐라고 하게?”
“친구 집에서 잔다고 하죠.”
“주말에는 빡시게 안 잡거든예.”
태화가 능청스럽게 대답하고, 지윤이 키득거리며 덧붙였다.
상호는 다시 방어에 들어갔다.
“집에 이불이 없어.”
“괜찮아요.”
“바퀴벌레도 무더기로 나와.”
“으엑…….”
그건 무서웠는지 나빛과 은율이 살짝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지윤과 세희, 태화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지도 집에선 벌레랑 같이 살았어예.”
“잡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잡을게요.”
상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가 신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쌤! 화장실 어디예요?”
“저기.”
“화장실 검사! 슈우웅~.”
태화는 양팔을 펼치고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화장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가 손으로 OK 표시를 만들었다.
“통과!”
“뭐가?”
“칫솔 하나! 동거녀 없음!”
“당연하지 인마. 집 비운 지 얼마나 됐는데…….”
“선생님~.”
주방에서 나빛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그쪽으로 향했다.
나빛이 앞치마를 허리에 동여매고 있었다.
“식칼 어디 있어요?”
“싱크대 아래에 열어 봐.”
“아, 찾았다……. 근데 선생님.”
그녀가 앞치마를 톡톡 치며 배시시 웃었다.
“앞치마 귀여운 거 쓰시네요.”
상호는 그 앞치마를 바라보았다. 분홍색 바탕에 하얀 꽃이 그려진 앞치마.
예경이 가져온 물건이었다.
그래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가지고 있었다.
대답을 하려 하는데 목이 메었다.
“……그렇지?”
“선생님이 이거 한 거 보고 싶어요.”
“나중에…… 나중에.”
나빛은 도마에 양파를 놓고 식칼로 썰기 시작했다.
옆에서 함께 준비중이던 세희가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 했다.
“나빛. 너 그렇게 하면 손 다친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해?”
“줘봐. 이렇게 칼 옆에 손가락을 붙이고…….”
혼자 살던 아이라 살림에 빠삭했다.
상호는 오순도순 요리를 하는 둘을 놔두고 고개를 돌렸다. 태화와 지윤은 함께 여기저기 쏘다녔고, 은율은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세희의 뒤쪽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주방이 좁아서 함께 무언가를 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런 은율을 불러세웠다.
“은율아.”
“아, 네.”
은율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상호는 엄지로 TV 쪽을 가리켰다.
“TV라도 보고 있어.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괜찮아요…….”
“그러면 식탁에라도 앉아.”
은율은 그 말대로 했다.
상호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찬장에서 티백을 꺼내 차를 탔다.
곧 뜨끈한 녹차 한 잔이 은율의 앞에 놓였다.
“요즘 학교 못 나왔지? 잘 지내고 있어?”
“네. 선생님 덕분에…….”
은율이 얼굴을 붉혔다. 상호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혀를 찼다.
“뭘 나 덕분이야. 세희가 다 알려줘서 간 거야. 세희한테 고맙다고 해.”
“네.”
“옮길 반은 정했어?”
“저어…….”
은율의 눈동자가 상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생님 반…… 가고 싶어요.”
“안 될걸.”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은율이 너는 여자 선생님 반에 들어가게 될 거야.”
경한 때문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제자가 아닌 직접적인 피해자니까. 남자 선생 반에는 갈 수 없다. 학교에서 가만히 놔두지 않을 터였다.
은율도 이미 아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교장선생님이 말씀해 주시긴 했어요. 그래도…… 어떻게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제가 배우고 싶은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은데…….”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안 하면 더 문제가 생기니까. 경찰이나 교육청 같은 데서 분명히 뭐라고 할 거고…….”
입은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상호는 차를 홀짝이고 입맛을 다셨다.
이 아이를 가르쳤다가 세희와 태화보다 강해지기라도 하면. 그래서 그 둘이 아슬아슬하게 10등에 들지 못하게 되기라도 하면. 학비 지원을 못 받게 되면.
분명히 후회할 터였다.
그런 일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세희와 태화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싫고, 은율을 가르친 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학생을 대충 가르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 나한테 배우고 싶으면 내년에 와. 그때 받아 줄게.”
그 말에 은율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네.”
그때 방에서 태화와 지윤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의 침실이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벌떡 일어섰다.
‘얘들이 뭘 하는 거야?’
뭐 방에 이상한 물건이 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괜스레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급히 방으로 가 보니 태화와 지윤이 침대에 엎드려서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은 액자였다.
아침에 치웠던 물건이었다.
“……얌마.”
그는 한숨을 쉬며 다가가 태화의 손에서 액자를 뺏어들었다.
“선생님 서랍까지 뒤지면 어떡해.”
“쌤 여자친구예요?”
“디게 이쁘시네예. 근디 어디서 본 것 같은디……. 어디더라.”
지윤은 저승부대의 사진을 주의깊게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주방까지 소란스러워졌다.
“나도 볼래~!”
나빛이 쪼르르 달려와 예경의 사진을 보았다.
밝게 웃는 20대 초반의 여인. 특별한 특징 없이 평범하게 생겼지만 미소가 워낙 아름다웠다.
나빛의 회색 눈동자는 한참 동안 사진에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예쁘셔요.”
“그치?”
상호는 씩 웃었다.
“근데 헤어졌어.”
“엥, 왜요? 엄청 착해 보이시는데…….”
“착하고 예뻐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고.”
“으음…….”
나빛은 어렵다는 듯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방 앞에 식칼을 든 세희가 나타나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일해! 이태화!”
“앗, 엄마다. 엄마~ 밥 뭐야?”
“맞을래?! 지윤이랑 나빛이도 빨리 와! 나빛이 너는 네가 요리해보고 싶다며!”
“힝.”
태화와 지윤이 세희를 쫄래쫄래 따라갔고, 나빛이 터덜터덜 그 뒤를 따랐다.
상호는 쓰게 웃었다.
예경에 대해 알고 있는 세희가 대화를 듣고는, 그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주러 온 것 같았다.
‘음식 냄새 좋네.’
그는 액자를 다시 서랍에 조심스럽게 넣어 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넋
“우웩……, 맛없어.”
태화가 흙 씹은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옆에 앉은 세희가 태화를 흘겨보았다.
“주는 대로 먹어. 니가 애야?”
“그럼 내가 애지 어른이야? 쌤, 저 어른이에요?”
“……아니.”
어른이라고 했다가는 무슨 소리가 나올지 뻔했다.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보나마나 결혼하네 어쩌네 하겠지…….’
“그래도 아기는 아니잖아. 투정 부리지 말고 먹어.”
상호의 꾸중에 태화가 아랫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그리고 포크로 눈앞의 파스타를 뒤적거렸다.
“그래도 너무 맛대가리가 없는데…… 이거 누가 만들었어? 세희 너야?”
“나빛이.”
“나빛이는 시집 못 가겠네.”
“요리랑 시집이랑 무신 상관이고? 밥하는 남자 잡으믄 되는 기지.”
“그러니까 못 가겠다고. 요리 못하는 남자한테는.”
지윤이 핀잔을 주자 태화는 상호를 흘끗하며 코웃음을 쳤다.
“둘 중에 한 명은 그래도 먹을 만한 거 만들어야지. 밥이랑 김치만 먹는 남자한테는 못 갈 거 아냐.”
“암만 그래도 그런 남자가 시상에 으딨나? 밥하고 김치만 묵는다니…….”
눈앞에 있다. 상호는 묵묵히 파스타 면을 포크로 빙빙 돌렸다.
못 먹을 물건은 아니지만, 확실히 맛이 없긴 했다.
‘어머님이랑은 딴판이네…….’
물론 상호에게는 세상 모든 음식이 먹을 만한 음식이었지만.
지윤은 배가 고파서 그런지 군말 없이 먹었고, 은율과 세희도 깨작거리며 어떻게든 먹고는 있었다.
못 먹는 사람은 둘. 태화는 연신 투정을 부렸고, 나빛은 자기가 만들었음에도 잘 먹지 못하는 중이었다.
마음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게 속상했는지 낯빛이 어두웠다.
상호는 태화의 그릇을 뺏었다.
“안 먹을 거면 줘. 맛만 좋구만.”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바닥까지 긁어 싹싹 비웠다. 태화가 그 모습을 보고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엑, 쌤 누렁이인가 봐…….”
다른 아이들도 무슨 기인열전 보듯이 신기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나빛이 밝게 웃었다.
“선생님.”
“응?”
“저녁도 제가 해 드릴까요?”
상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 그게…….”
“아이씨, 뭔 저녁이야! 넌 빠져! 딴 사람이 해!”
태화가 버럭 소리치자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게, 그럼.”
세희는 그런 태화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너는 먹기만 하려고?”
“응.”
태화는 그러면 안 되냐는 투로 당당하게 말했다.
“난 쌤이랑 놀 거야.”
“너 따라와.”
세희가 벌떡 일어나서는 태화의 꼬리를 잡고 침실로 들어갔다.
곧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꺅!”
“이 웬수야, 일 좀 해! 너만 놀러 왔어?!”
“미안, 미안! 아앙!”
은율이 안절부절못해하며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지윤과 나빛이 한 마디씩 했다.
“쟈들은 원래 저리 논다. 다 사랑싸움이니까 신경쓰지 말어라.”
“저래도 둘이서 제일 자주 놀아.”
은율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응.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게 안심을 시켜도 은율의 시선은 침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윤과 상호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고 남은 음식을 싹 먹어치운 후, 그릇을한데 모았다.
“설거지는 지가 하겠심더.”
“됐어. 쌤이 할게. 너흰 놀러 온 거잖아.”
“그럼 도와드릴게예.”
지윤은 기어코 그를 따라와 함께 설거지를 했다.
좁아터진 싱크대였지만 상호의 적절한 허공섭물 덕분에 어렵지 않게 설거지를 할 수 있었다. 상호는 지윤이 능숙하게 그릇을 싹싹 닦아 건조대에 올리는 것을 보며 살짝 웃었다.
“잘하네.”
“설거지에 잘하고 말고가 어딨습니꺼.”
“그래도 빠르고 깔끔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느린데 꼼꼼하게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무이가 가게 가면 지가 동상들 밥 하고 치웠거든예.”
“동생이 몇 명이더라? 셋이던가?”
“예.”
“나이가 어떻게 돼?”
“둘째가 열셋, 셋째가 여섯, 넷째가 다섯입니더.”
“다섯?”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5살이면 만으로 4살. 4년 전에 낳았단 소린데…….’
그럼 5년 전엔 뱃속에 있었단 말이고. 5년 전이면 한참 전쟁 중.
상호는 속으로 당황했다.
‘뭐야, 그럼 형수님은 임신한 몸으로 갓난애 하나랑 애 둘을…….’
지윤이 성철을 왜 미워했는지 살짝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둘은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싸움을 끝내고 나온 태화와 세희, 그리고 나빛과 은율이 소파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상호는 그녀들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뭐해?”
“할 게 없어요…….”
“낮잠이나 잘래요.”
나빛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태화가 하품을 했다.
기껏 놀러 왔으면서 낮잠이나 자겠다니.
그렇지만 상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주말이니까 뭐, 잘 쉬어야지…….’
세희는 가부좌를 틀었다.
“그럼 전 운기조식하고 있을게요.”
“아, 나도.”
지윤도 그 옆에 앉았다.
은율 또한 질 수 없다는 듯이 세희의 옆에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상호는 눈을 감고 집중하는 셋과, 그 뒤의 소파에 누워서 눈을 감은 태화, 그리고 태화에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뿔을 만지작거리는 나빛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나도 오랜만에 운기나 할까…….’
이곳의 희박한 마나와 안 그래도 비효율적인 천색창염강기공으로는 그의 막대한 내공에 물 한 방울 보태는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하는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느껴보고 싶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