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501)

***

효은은 앞에 놓인 라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상호가 젓가락을 집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안 먹어?”

“너는 진짜…….”

“하긴 니는 전투식량도 맛없다면서 안 먹었지.”

상호는 김밥을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주말에 비싼 거 사줄게. 오늘은 이거 먹어.”

효은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보나마나 바쁘다고, 애들 본다고 약속 깰 게 뻔했다.

시간이 없는데. 한 끼 한 끼가 소중한데. 비싸고 맛있는 것만 먹고 싶은데.

이런 싼 음식을 얼마 만에 먹는지 몰랐다.

효은은 김밥을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근데 맛있네.’

“야.”

“뭐.”

상호가 부르자 효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호는 제일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무슨 병이야?”

효은은 라면을 뒤적거리며 뜸을 들이다가,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너 신앙인들의 신이 어떤 신인지 알아?”

“몰라. 뭐 기독교 불교 신 아냐?”

“아니야.”

효은의 안색은 어두웠다.

“우리한테 성력을 주는 신은…… 아니, 신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 신은 원래 우리 세상에 있던 신이 아냐.”

“그러면?”

“당연히 개벽 때 몬스터들이랑 같이 온 거지.”

상호에게는 금시초문인 내용이었다.

“그러면 이계의 신이란 뜻이야?”

“응. 아마 그쪽 세계에서 몬스터들이랑 싸우던 세력이었나 봐. 그래서 몬스터들의 적인 우리한테 힘을 주는 거고.”

“그럼 왜 다들 치료밖에 못해?”

“적성에 맞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 나랑 나빛이가 특별한 거지.”

“개벽 때 정해진 거라는 소리야? 신앙인이 노력하면 전투신관이 되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애초에 지금 나빛이 성력도 다른 신앙인들보다 몇십 배는 많아. 그래서 그런 식으로 싸울 수 있는 거야.”

상호는 효은이 말하는 바를 깨달았다.

“인간을 보살피려고 성력을 내려주는 게 아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거야?”

“맞아. 그 신은…… 컴퓨터 같은 거야. 몬스터 죽이는 컴퓨터. 우리를 어여 삐 여기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냥 시스템적으로 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뿐인 컴퓨터. 어쩌다 우리랑 같은 편에 선 것뿐이야.”

“넌 그걸 어떻게 알아?”

“계시.”

효은은 눈을 감았다.

“지금도 들려.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어대.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어떻게든 잠에 드는 데 성공하고 나면, 이번엔 꿈에서 나와.”

“어떤 꿈인데?”

“색깔 없는 세상이랑 석상 같은 천사들.”

색깔이 없다. 그 말이 상호의 마음에 걸렸다.

나빛의 회색 머리카락, 회색 눈동자, 그리고 회색 눈썹.

“천사는 또 뭐야?”

“신의 기계. 자아도 없이 그냥 노예가 된 기계야.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존재.”

“너랑 나빛이가 그 천사가 되어가는 거야?”

“대충 알고 있었구나.”

효은이 의외라는 듯 웃었다.

“말해도 모르는 눈새인 줄 알았는데.”

“그거 뭐야, 천사화라고 불러야 하나? 너는 얼마나 남았는데? 나빛이는?”

“그런 식으로 딱딱 맞아떨어지진 않아. 그냥 본인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야. 계시가 너무 시끄러워지면, 그리고 삶에 미련이 없어지면……

그 때 끌려가는 거지. 그래도 나빛이는 아직 걱정 안 해도 돼. 아직 시끄러울 단계가 아니니까. 한참 나중의 일이 될 거야.”

“삶의 미련? 술담배도 그것 때문이야?”

“응.”

효은은 라면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게 대부분은 중독인 거고.”

“그러면.”

상호는 앞으로 다가앉고 허리를 숙여 효은과 얼굴을 맞댔다.

둘의 눈은 새끼손가락 하나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내가 네 삶의 미련이라고?”

효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

“내가 약이라며.”

상호는 따지듯이 물었다.

“약 먹으면 치료 돼? 완치가 되는지를 묻는 거야.”

“……그건 몰라.”

효은은 그저 웃었다.

“계시가 그런 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진 않거든. 내가 찾아낸 답일 뿐이야.”

그 말은 완치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말.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완치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말.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효은은 말없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난 두 번은 안 되겠어. 죽을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상호는 김밥을 집어 효은의 입에 넣었다.

“한 번이면 족해.”

“……그래.”

효은은 키득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나 안 되는 것이다.

“알았어.”

“그래도 니가 원하는 만큼은 맞춰줄 테니까……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연인이나 애인은 못 돼도…… 그 직전까지는 최대한 해줄 테니까.”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가만히 상호를 바라보다가, 이내 방긋 웃어 밝은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응.”

“밥이나 빨리 먹어. 면 다 불어터진다. 뭐 더 먹을래? 떡볶이 시켜 줘?”

“응. 먹을래.”

“아까는 안 먹을 것처럼 굴더니 엄청 잘 먹는다?”

“몰라. 나 이것도 시켜 줘.”

“참나, 연봉이 어쩌고 하더니…….”

“몰라. 사조.”

둘은 평범한 연인처럼 이야기하고 때로는 웃으며, 때늦은 저녁밥으로 배를 채웠다.

집으로

경한은 학교에서 잘렸고, 은율도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경찰이 학교를 들락날락거렸다. 교무실에 오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묻기도 하고. 이상한 소문이 퍼질 법도 했지만, 해련의 배려 덕분에 단순 폭행이라고만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선생들은 다 알고 있었고, 몇몇 학생들도 진실을 알았다.

상호의 반은 전부 알고 있었다.

“왜 주는지 알지?”

상호는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눠주며 물었다.

아이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에는 성폭력 예방과 근절을 위한 실태조사라고 쓰여 있었다.

“쓸 사람만 쓰는 거야. 선생님한테 내는 게 아니고, 교장실 앞에 수리함 있으니까 거기다 넣어.”

“크흠~.”

태화가 짐짓 점잖은 척 헛기침을 하며 종이를 양손으로 잡아서 들어올렸다.

“1번. 올해에 교직원에게 신체적, 언어적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나요? 네.”

상호는 못 들은 척했다.

“있다면 그 상대와 상황을 적어주세요. 음…….”

태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세희를 돌아보았다.

“언제지?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뭐라는 거야, 바보야.”

“그러면 다음 문항. 흠. 2번. 올해에 같은 반이나 다른 반 친구가 신체적 언어적 성폭력을 당하는 걸 본 적이 있나요? 아, 이건 있지.”

태화를 제외한 모두가 눈을 끔뻑였다. 상호는 당황하며 물었다.

“본 적이 있다고? 누구?”

“쌤이랑 세희요.”

“……나랑 세희?”

“저번에 쌤 침대에서…… 읍.”

세희가 태화의 입을 틀어막고 눈을 치켜떴다.

“헛소리하지 마. 너도 있었잖아.”

지윤과 나빛이 벌떡 일어났다.

“니들끼리 쌤이랑 뭐했는데?”

“너희 선생님 방 가봤어?”

“운기조식 배우느라 갔어. 얘도 같이.”

세희는 태화를 가리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윤과 나빛에게는 평범한 내용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둘이 상호를 향해 소리쳤다.

“쌤! 지도 쌤 방 갈랍니더.”

“갈래요!”

“와서 뭐하게? 뭐 할 것도 없으면서…….”

상호는 황당해하며 그녀들을 둘러보았다. 방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뭘 가르칠 것도 아닌데.

놀 거면 차라리 다른 장소를 가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태화가 실쭉 웃었다.

“시험 끝난 기념으로 놀러 가는 셈 치죠. 주말에 날 잡고.”

“멀리 안 가고 좋은 것 같아요.”

웬일로 세희도 거들었다.

그 말에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세희까지 저런 말을 하다니.

안 그래도 학교 분위기가 이래서 애들이랑 같이 다니는 것도 눈치보이는데, 남교사 숙소에 애들이 왔다가는 경찰 조사를 받을 게 뻔했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정 그러면…… 집으로 가자. 선생님 집.”

“집이요?”

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쌤 집이요? 진짜 집?”

“응. 교사 숙소 말고.”

“진짜요? 아싸!”

아이들이 환호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상호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가서 청소부터 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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