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다 뭐야?”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불이 켜진 양초와 와인이 놓여 있었다.
통유리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의 레스토랑이었다. 그것도 창가의 2인석. 테이블마다 거리가 널찍해서 단둘이 온 느낌이 났고, 그 때문에 이 가게의 요리가 얼마나 비싼지 쉽게 예상이 갔다.
메뉴판을 보니 역시나였다. 상호는 숫자를 보고 맞은편에 앉은 효은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야이씨, 이걸 먹자고? 이 돈이면 애들 옷을 몇 벌을…….”
“뭔 상관이야. 이미 계산했어.”
“응?”
“내 연봉이 니 연봉보다 백 배는 많아, 멍청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원이 식탁에 무언가를 놓았다. 샐러드와 작은 빵. 그릇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작은 스프 한 종지.
효은이 빵을 집으며 물었다.
“언니랑 이런 데 안 와봤냐?”
“한 번도 안 왔지. 그땐 문 여는 식당이 별로 없었잖아.”
전쟁통이라고 본토까지 쑥대밭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이대륙과 맞닿은 동쪽에서 주로 일어났고, 그래서 중앙과 서쪽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다만 국가간 수입과 수출이 막히고 모든 물자가 군으로 우선 들어간 탓에 거의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았다.
돈의 가치가 불확실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장사를 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아니었다.
“그럼 처음이야?”
효은이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상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랑 둘이서는.”
나빛이 비싼 식당에 데려다준 적은 있지만, 여자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고 둘이서 간 것도 아니었다.
대답을 들은 효은은 만족한 표정으로 빵을 우물거렸다.
상호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야.”
이번엔 상호가 몸을 기울였다.
“이제 말 좀 해봐.”
“뭘?”
“밥만 먹으러 왔냐? 시험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했잖아.”
“아아, 그거?”
효은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와인을 따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별 거 아닌데. 신경 안 써도 돼.”
“병 깬다. 똑바로 말해.”
“맛있는 거 먹으러 왔잖아. 밥 먹고 말하면 덧나?”
효은은 그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볼멘소리를 했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와인병을 건네받아 효은의 잔에 콸콸 들이부었다. 좋아하는 술이나 많이 마시라고.
그런 다음에 효은과 대충 잔을 부딪히고 목에 털어넣었다.
효은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드없는 새끼…….”
“니랑 나랑 뭔 무드야. 정신 차려.”
“잔 다시 들어 봐.”
“싫어.”
“다시 들어 보라고.”
상호는 효은의 등쌀을 못 이기고 한숨을 쉬며 잔을 들었다.
효은도 잔을 들고 속삭였다.
“눈.”
상호는 유리잔 위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효은의 눈동자 속에서 촛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실제의 촛불은 전혀 흔들리고 있지 않았다.
계속 마주치고 있자니 심히 부담스러웠다. 결국 그는 창문을 향해 슬쩍 시선을 피해 버렸다.
‘경치 좋네.’
불빛이 넘실대는 야경이 퍽 인상적이었다.
효은이 벌컥 짜증을 냈다.
“왜 자꾸 피하는데!”
“오글거려, 씨바…….”
“뭐 어때? 할 거 다 해 놓고서. 너랑 나 이제 사귀는 거 아냐?”
상호는 귀를 의심했다.
“뭐?”
“입술까지 가져가놓고 아니라고 할 셈이야?”
“니가 훔쳐가서 돌려받은 거지 뭘 내가 가져가? 그리고 고작 입 몇 번 맞춘 거 가지고 사귀긴 뭘 사귀어.”
“너 진짜…… 그러기야?”
“너 시한부라며.”
효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 나 알잖아. 남들은 몰라도 넌 나 알잖아. 그런데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너무한 거 아냐? 나보고 또…….”
그의 손이 무릎을 아프도록 꽉 움켜쥐었다.
“또 시한부를 사귀라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 하나와 흔들리는 눈동자 두 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효은은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너랑 나는…… 입만 맞춘 사이고. 너는 시한부랑은 못 사귀겠다…… 이거야?”
“나는 못해.”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두 번은 못해. 곧 죽을 사람이랑 사귀는 건…….”
“그러면 입은 왜 맞췄어?”
효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상호는 어이가 없었다.
“야, 그거는 니가 시한부라고 말하기 전의 일이고.”
“그럼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도 했잖아.”
“니가 했지 내가 했냐? 지금까지 한 거 다 니가 먼저 나 붙잡고 한 거잖아.
불쌍해서 몇 번 대줬더니 이젠 아주…….”
쫘악
상호의 얼굴에 와인이 뿌려졌다.
“…….”
상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효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씨발놈.”
그러고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주 성난 발걸음으로.
상호는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소리쳤다.
“야! 밥은 먹고 가야 할 거 아냐!”
하지만 효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떠나 버렸다.
그는 당겨오는 뒷목을 몇 번 주무른 후 검을 잡고 일어섰다.
‘염병, 정말로 나랑 사귀려고 했던 건가…….’
그리고 서둘러 효은의 뒤를 쫓았다.
***
“아이씨, 이년 어디 있어…….”
상호는 차를 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걸어갔다면 멀리 가지 못했겠지만, 택시나 버스나 지하철 등 탈 것은 많았다.
번화가라서 눈으로 찾기도 쉽지 않았다. 오늘은 수녀복도 아니라서 더 알아보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결국은 찾았다.
좀 쉽게 찾았다.
“어헝헝헝…….”
세상 무너진 듯 펑펑 울며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환장하겠네 진짜.’
상호는 인도 가까이로 차를 몰며 조수석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야!”
그러자 효은이 울음을 뚝 그치고 살기 넘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뉴월을 넘어 7월이 되었는데 서리 수준이 아니라 한파가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상호는 심장이 살짝 졸아들었지만 꿋꿋이 소리쳤다.
“계속 걷게? 타! 어차피 학교 갈 거잖아.”
“…….”
“눈 퉁퉁 부어가지고는 그 꼴로 돌아다닐 거야? 타라니까?”
“…….”
“아오…….”
빠아아앙
뒤쪽에서 경적이 울렸다. 상호는 어쩔 수 없이 효은을 앞서 지나쳤다.
한 블록을 빙 돌아 다시 돌아오려는데, 모퉁이에 파티 용품을 파는 가게가 보였다.
그는 가게 유리창 안에 있는 용품들을 훑어보다가 잠시 고뇌에 빠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돼?’
결국 그는 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갔다.
***
효은은 훌쩍이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처량하고 궁상맞게.
‘나쁜 새끼…….’
나이도 어린 게 여자 마음을 가지고 논다. 입까지 맞춰 놓고는 안 사귄다느니. 불쌍해서 대줬다느니.
하지만 상호의 말이 맞았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라고는, 아무리 양심 따지지 않는 효은이라도 요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쁜 새끼…….’
효은은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별안간 옆에 차가 와서 섰다. 그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아가씨.”
효은은 옆을 돌아보았다가 코와 입에서 공기를 뿜었다.
“쿠흡……!”
상호가 운전석에 앉아 그녀를 돌아보고 있었다.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코주부 안경을 쓰고.
효은은 웃은 걸 감추려고 황급히 손등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염병하지 말고 빨리 타, 아가씨.”
상호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섭물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효은은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조수석에 앉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자.”
그녀의 앞에 장미 한 송이가 들이밀어졌다. 효은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놈이 이런 걸 해줄 인간이 아닌데.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꽃을 받아 향기를 맡았다. 그 때 상호가 손을 뻗어 장미의 이파리를 잡아당겼다.
팡
효은의 얼굴에 정통으로 폭죽이 터졌다.
“꺅! ……씨발새꺄!”
“졸라 잘 낚이네. 낄낄낄…….”
상호는 폭소를 터트리며 효은의 뺨을 꼬집었다.
효은은 분통을 터트리며 차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잠금장치를 풀어도 마찬가지였다. 허공섭물로 붙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 문 안 열어?!”
“또 어딜 가. 배는 채워야 될 거 아니야.”
상호는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사 줄 테니까 그냥 먹어. 또 뛰쳐나가지 말고.”
웬일로 밥을 사준다고 한다.
효은은 약간 기대가 됐지만, 화난 척 퉁명스레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