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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한은 교실 문을 잠그고 돌아섰다.
“걷어.”
석양이 지는 교실에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은율은 칠판 앞에 서서 치마 끝자락을 잡았다. 하지만 올리지는 않았다.
머뭇거리는 입술 사이에서 간절한 부름이 새어나왔다.
“선생님…….”
“왜?”
경한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턱을 어루만졌다.
“싫어?”
“싫어요…….”
은율이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하자 그가 웃었다.
“그러면 아버님한테 연락드릴까?”
은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아니요.”
“어서 걷어.”
경한은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귀에 속삭였다.
“아니면 벗을래?”
은율은 몸서리를 치며 치마를 걷어올렸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다…… 이렇게…….’
어쩌다 이런 뱀 같은 사람에게 얽히게 됐을까.
경한을 담임으로 택한 게 화근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만난 젊은 남선생. 심지어 잘생기고 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인기도 많았다.
실력이 좋은 은율은 단번에 경한의 주목을 받았고, 은율도 그런 그의 관심이 싫지 않았었다. 어떤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둘은 처음엔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내용으로 변질되어 갔다.
무슨 밥을 먹었는지.
어디에 누구와 있는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그때까지도 은율은 마냥 좋았다. 남자를 몰랐고, 다른 아이들과 다른 특별취급을 받는 것이 재미있었다. 여자든 남자든 비밀은 언제나 달콤한 법이었다.
그러나 경한은 점차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처음은 손과 발에 난 굳은살의 사진. 그 다음은 검술 자세를 잡는 사진.
결국에는 몸의 근육을 봐야겠다며, 속옷만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게 했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되도록 은율은 가족에게 알리지 못했다. 칼을 닮은 아버지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
누가 잘못했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담임과 은밀한 관계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연애에 정신이 팔렸다고 혼이 날 게 뻔했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될 터였다. 그것만은 싫었다.
경한도 그 사실을 알고 더 대담하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찰싹
회초리가 은율의 엉덩이에 닿았다.
경한은 회초리를 휘두르지 않고 꾹꾹 눌러 문질렀다.
“은율아.”
“……네.”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 알지?”
거짓말이었다.
처음에는 성적이 좋은 아이라서 제대로 가르쳐 좋은 대학을 보내고, 자신의 경력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어린데도 늘씬한 몸과 도도하면서도 뇌쇄적인 얼굴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망가뜨리고 길들여 노리개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서서히 끌여들었다. 늪으로, 진창으로.
더러운 몰골이 되어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도록.
“은율아, 대답은?”
경한이 되물어도 은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한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은율아.”
“네.”
“벗어.”
은율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둘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뒤이어 해일처럼 밀려들어온 강대한 기의 물결이 교실을 가득 채웠다. 경한과 은율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경한은 이 느낌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크윽…….”
자물쇠가 저 혼자 부서지고 문이 열렸다.
“이렇게까지 쓰레기일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안대를 쓴 청년이 검을 짚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경한과 은율은 가슴을 부여쥐며 몸을 수그렸다. 청년이 말을 이었다.
“좋은 제자 받아 놓고 이렇게 망칠 거면 나한텐 왜 그랬어?”
상호는 혀를 차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경한은 애써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강 선생.”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
교실 한구석에서 핸드폰이 날아와 상호의 손에 안착했다. 상호는 핸드폰을 돌려 녹화중이라는 것을 경한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다 찍었으니까.”
“강 선생이 날 협박했잖아?”
“뭐?”
경한은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 찍혔을 거 아냐. 강 선생이 우릴 공격하는 거 말이야.”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상호는 피식 웃어넘겼다.
“어지간하면 자수하라고 하겠지만, 그러면 억울해지는 사람이 너무 많아. 나도 그렇고, 애도 그렇고. 그러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판검사님들한테 잘 빌어봐. 그 말밖에 못해주겠다.”
“겨우 그 동영상만으로?”
경한은 은율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 애는 내 편이야. 2대 1이 되겠군. 아마 판검사한테 비는 건 네가 될 것 같은데.”
“미안한데…… 처음부터 듣고 있던 사람들이 더 있어.”
상호의 말과 동시에 경한의 코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잠자리 날개가 달린, 손바닥 크기의 반투명한 요정 소녀.
바람의 하급 정령이었다.
경한은 정령을 보고 당황했다.
“이건…….”
“문 선생.”
설미와 해련이 문가에 나타났다. 경한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정확히 두 배로 강해졌다.
해련의 눈이 이글거렸다.
“학생한테…… 손을 대요?”
“교, 교장선생님. 그게 아니…….”
경한은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검지가 상호를 가리켰다.
“다, 다 저놈이 꾸민 겁니다. 저놈이 협박해서…….”
“강 선생은 이미 내가 24시간 지켜보고 있어요. 헛소리 하지 말고.”
해련이 손을 뻗자 경한의 몸이 들어올려졌다.
“윽……!”
“얌전히 체포되세요.”
해련은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은율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아…….”
해방이다. 해방인데.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이제 자신이 얼마나 더럽혀졌는지 세상이 알게 될 테니까. 은율은 주저앉아서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등을 다독였다.
은율은 고개를 들어 그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세희였다.
은율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네, 네가 왜 여기…….”
“나가자.”
세희가 나직하게 말했다.
은율은 세희의 손에 이끌려 교실을 나섰다.
어른들 사이에 있다가 어른이 없는 곳으로 나오게 되자 비로소 진심이 터져나왔다. 은율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칼과 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설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흑.”
세희의 손이 은율의 머리를 눌렀다.
은율은 그 손에 이끌려 허리를 숙이고, 세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세희가 속삭였다.
“키가 커서 안기가 힘드네.”
은율은 코를 훌쩍이며 더욱 섦게 흐느꼈다.
이 아이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었다. 못나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낮아지고 싶지 앉아서.
같은 위치에서 오직 검으로만 대화하며 함께 걸어가고 싶어서.
그러나 들켜 버렸다.
“다 잊어버려. 이제 괜찮으니까. 네 잘못 하나도 없으니까.”
작은 손이 등을 토닥였다.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내일부터는 울지 마.”
은율은 젖은 눈을 들어 세희를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달리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아온 소녀를. 은율이 목표로 했던 바로 그 이상형이었다.
은율의 얼굴이 붉어졌다.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1등 축하해.”
“고마워.”
세희가 씩 웃었다.
그때 옆 교실에서 태화가 건들거리며 걸어나왔다.
“이야~ 아가씨들 분위기 좋은데~.”
“뭐라카노. 원래 태화 니 자리다 아이가.”
지윤이 뒤이어 따라나오며 핀잔을 주었다. 나빛도 함께였다.
“세희 바람 핀다. 헤헤…….”
“너까지 그러기야?”
세희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은율을 안은 손은 놓지 않았다.
나빛이 은율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은율이 맞지?”
“응.”
“우리 반으로 와. 우리 선생님은 저런 거 안 해.”
지윤도 거들었다.
“저거 이제 선생 짤리면 우리 쌤 허락만 받으면 될기다. 우리가 잘 말해 주께.”
“글쎄.”
갑자기 태화가 초를 쳤다.
“니들 생각대로 안 될걸.”
“이 가스나 또 시작이네. 니는 그래 자신이 없나. 다섯이면 어떻고 여섯이면 어떻고…….”
“그게 아니라.”
태화는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어른들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지 알잖아.”
세희도 태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남들보다 더 세상에 치이며 살아온 둘이었기에.
은율이 같은 반이 되기는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많다.
“……내년엔 될 수도 있으니까.”
세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율의 등에서 팔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율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오늘 정도는 우리 반인 걸로 해도 괜찮잖아. 밥 같이 먹을래?”
“……응.”
은율은 코를 훌쩍이며 씩 웃었다.
두 번은 못해
“……그래서 그놈 경찰에 넘기고, 애들 밥 먹으라고 보내고 왔어.”
상호는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조수석에 앉은 효은이 그를 돌아보았다.
“애는 어떻게 됐는데?”
“몰라. 일단 그놈 반 없어지는 건 확정이고, 아마 경찰조사 좀 받다가 다른 반 가게 되겠지.”
“데려올 거야?”
“나? 됐어, 네 명도 정신없는데…….”
상호는 혀를 내두르며 학을 뗐다.
효은은 수녀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펑퍼짐한 하얀 반팔 박스티에 아주 짧은 반바지. 거기에 운동화와 야구모자. 수녀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차림이었다.
머리를 묶어서 가느다란 목선이 드러났다.
효은이 피식했다.
“진짜 적응 안 된다. 니가 애 넷 가르치는 거.”
“하든가 말든가.”
상호는 콧방귀를 뀌며 차를 몰아 효은이 알려준 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