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501)

***

64강에서 지윤이 떨어졌고, 태화도 32강에서 떨어졌다.

이제 그 둘은 최대한 등수를 올려도 각각 33등, 17등. 반대로 세희와 나빛은 아무리 못해도 16등이 확정이었다.

상호는 스탠드에 앉아서 세희가 또 누군가를 쓰러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점심시간 식후에 세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가장 큰 의문이었다.

1등한 제자를 혼내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런 방식으로 때리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왜 은율이 가만히 있는지였다.

‘약점을 잡혀서?’

강제와 억압인 걸까.

아니면 자의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을까.

뭐가 어찌되었건 상호가 취할 행동은 변하지 않았지만, 궁금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세희는 또 어쩌다 그런 걸 보게 됐는지…… 뭐, 봐서 다행이다만.’

묻히는 것보다는 백 배 나으니까.

세희에게 은율과 경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호는 치를 떨었다. 경한이 세희를 데려갔었다면 세희한테 그 짓을 하려고 했을 게 뻔했기에.

‘오늘 끝장을 봐야지.’

다행히 세희와 은율의 대진표는 처음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계속 이긴다면 결승에서 둘이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은율이 있는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쪽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16강.

은율의 상대는 바로 나빛이었다.

상호는 당연히 나빛을 응원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은율이 이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희와 은율의 진짜 싸움을 보고 싶어서.

그리고 세희가 이기는 데 성공한다면, 그 편이 경한을 더 화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나빛아……, 미안하다.’

상호는 눈을 감고 은율을 응원했다.

중간평가 때는 무기의 강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은율의 검기는 지금도 1학년 최고 수준이었다.

나빛의 방어막이 얼마나 강해졌는지가 승부의 관건. 저번처럼 허무하게 깨져 버린다면 싸움은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은율과 나빛이 목걸이를 걸었고, 결계가 올라왔다.

“나빛이 잘 하고 있냐?”

뒤에서 효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럭저럭.”

효은이 그의 옆에 앉으며 재차 물었다.

“니가 보기엔 어때?”

“뭐가?”

“나빛이. 싸우는 거 맘에 들어?”

상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아니.”

천성.

재능.

둘 모두에 결격사유가 있었다.

“애가 너무 착해. 독기가 없어서 빠릿빠릿하질 않고…… 그렇다고 동체시력이나 반응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니까.”

만약 전투신관이 아니었다면 전교 꼴등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이기어검이나다름없는 성창과 전방위를 막는 방어막이 있으니 저기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효은도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맞는 모양이었다.

“니가 그럴 줄 알았지. 그러면 어떻게 가르칠 거야?”

“때리고…… 혼내야지.”

상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빛은 공포를 모른다. 상호가 자주 때려서 고통이 뭔지는 알 테지만, 그를 너무 믿기 때문에 그 이상의 두려움은 품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공포를 알아야 몸이 빨라지는 건데.

그는 더 설명하려다가 효은의 한심해하는 표정을 보고 말을 바꿨다.

“뭐야, 그 쌍판은. 닌 뭐 더 좋은 생각 있어?”

“니 취향을 알겠다, 이제. 저 착하고 귀여운 애를 때리고 싶냐?”

“그럼 어떡해. 우리처럼 몬스터랑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안 때리고 가르칠 방법을 찾아야지.”

“교생이 뭘 안다고 아는 척이야. 너 애들 가르쳐 봤어? 스승도 없었으면서 무슨…….”

“참나, 누가 들으면 선생질 몇 년은 해본 놈인 줄 알겠네…….”

“어쩌라고. 시합이나 봐.”

둘은 입을 닫고 은율과 나빛을 쳐다보았다.

나빛의 앞에 성창 두 개와 방어막이 나타났다. 성창들은 양 옆으로 떨어져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은율을 향해 날아들었다.

은율이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희끄무레한 인영이 결계의 천장을 박차는 게 보였다.

“앗…….”

나빛은 당황했지만, 금방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집중했다.

그녀를 둘러싼 방어막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만약 회전과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검을 내려친다면, 방어막이 깨지자마자 검의 옆면이 밀려 순식간에 손에서 놓치게 될 터였다.

상호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효은에게 물었다.

“네가 가르쳤어?”

“물론이지.”

나빛의 뒤에 은율이 착지했다.

성창이 다시금 은율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때 은율의 검이 번득였다.

카가각

수평으로 회전하는 방어막에 수직으로 검이 내리쳐졌다.

중간평가 때처럼 쉽게 깨져 버린 방어막.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은율은 회전하는 방어막의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검이 허공을 날았다.

나빛의 눈이 반짝이고, 성창이 은율을 찔러들어갔다.

채앵

금속성과 함께 성창들이 박살났다.

나빛은 은율의 손에 들린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

알 수가 없었다. 허공을 날던 검이 왜 저기 있는 건지.

그래도 방어막은 건재하고, 성창은 다시 만들면 된다. 나빛은 다시 성창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시퍼런 검광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촤좌좌좍

방어막이 검을 뺏어가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수많은 난격이 날아들었다.

나빛은 산산이 부서진 방어막을 보며 손에 성창을 만들어 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면 안 되니까.

“흐읍……!”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순간이었다.

은율의 검이 훨씬 빠르게 나빛의 목을 쳤다.

퍼억

“……윽.”

비틀거리며 쓰러진 나빛의 뒤로 진행교사가 선언했다.

“하나빛, 패.”

‘됐다.’

상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은율의 경공 실력은 그도 놀랄 정도였다. 내던져진 검보다 빠르게 뛰어 검을 잡고, 나빛의 동체시력보다 빠르게 돌아와 성창과 방어막을 부쉈다. 1학년 수준이 아닌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면 하급 헌터들보다도 강할 것 같았다. 내공의 양이 조금 모자랄 뿐.

물론 나빛이 진 것은 안타깝지만 어쨌든 세희와 은율의 시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옆에서 효은이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꼬나보았다.

“너 뭐야?”

“응?”

“나빛이가 졌는데 왜 기뻐하는데? 설마 혼내려고?”

상호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지어냈다.

“등신아, 화…… 화난 거지 뭘 기뻐해.”

“아가리 꼬이지? 와, 니 이런 꼬라지를 애들이 봐야 하는데. 앞에서는 착한 척 하면서 뒤에서는 애들 패고 혼낼 생각만 하는 쓰레기…….”

“진짜 아니라고. 나중에 말해 줄게.”

그가 진지하게 말하자 효은이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상호는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뭐.”

“나중에가 언젠데?”

“나도 정확히는 몰라. 아마 오늘 방과후는 넘겨야 될 것 같던데.”

“그럼 저녁에 밥 같이 먹을래?”

효은이 툭 던지듯 물었다.

상호는 효은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저승부대 때부터 단 한 번도. 정말로 어쩌다가 단둘이서 작전을 나가게 되면,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뒤돌아서 전투식량을 먹었다.

둘이서 밥을 먹으면 심히 어색할 것 같았다.

그래도 저번에 시험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한 것도 있고. 오늘 일도 말해줘야 하니까.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식당 알아서 찾아 놔.”

“니가 찾아. 나한테 맡기면 그냥 김밥의땅 간다.”

“참나…….”

효은이 혀를 찼다.

어느새 경기장에선 4강전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결승. 세희와 은율의 차례였다.

상호는 경기장으로 올라서는 둘을 지켜보았다.

오늘만 우리 반

은율은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키가 작고, 머리를 굵게 땋은 소녀.

“잘 올라왔네.”

그 소녀가 그렇게 말했다.

은율은 대답 없이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땐 이름을 잘 몰랐다. 시합 전에 진행교사가 이름을 부르지만, 그 때는 곧 벌어질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은율은 자신에게 패배한 상대의 이름은 외우지 않았다. 기억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예외였다.

그녀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중간평가 결승전이 끝나자마자 대진표로 쪼르르 달려가 외워둔 이름을, 은율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세희.

“중간에 만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운이 좋았어.”

목소리가 예쁘다. 은율은 멍한 표정으로 세희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이미 두 번을 이겼던 상대였다. 지난날에도, 오늘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허나 은율의 심장은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싸움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싸울 때는 칼처럼.’

은율은 머릿속으로 칼날을 떠올렸다. 그 끝의 뾰족함을 상상하고, 그 심상을 따라 마음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검을 가르치며 한 말이었다.

다만 그녀의 아버지는 싸우지 않을 때도 칼과 같은 사람이었다.

“시작.”

진행교사의 말과 함께 결계가 올라왔다. 은율은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옆걸음이 꼭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반 바퀴를 빙 돌아 서로가 처음 서 있던 자리에 다다랐을 때.

세희의 오른발이 땅을 박찼다.

‘경공을 배웠구나.’

중간평가 때도 빨랐지만, 지금은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은율은 검을 뽑았다.

선을 재는 탐색전은 오전에 끝났다.

오후부터는 진심으로 검을 맞댈 생각이었다.

카아앙

둘의 코앞에서 검이 부딪혔다.

세희는 은율을 올려다보았고, 은율은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키 때문이기도 했지만, 눈빛 속 마음의 위치도 그러했다. 도전하는 자와 도전 받는 자.

‘검기도 강해졌고…….’

그때는 단 한 합 만에 검기의 차이가 드러났는데. 지금은 얼추 비슷한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아직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은율은 세희의 검을 밀어내고 검기를 더욱 강하게 끌어올렸다.

다음 합으로 세희를 쓰러트릴 작정이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지만…….’

오전에 예선전에서 붙었을 때. 세희는 무언가 보여줄 게 있다는 말투였다.

은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보여줘야 할 거야.’

순식간에 끝날 테니까.

은율은 세희의 검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급소를 노리지 않는, 오로지 무기를 파괴시키기 위한 공격이었다.

채애앵

그때와 똑같은 소리.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러진 칼날이 허공을 날았다.

두근거리던 은율의 심장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여기까진가.’

너무 큰 기대를 했을까. 세희는 아직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2학기 중간평가에는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이기를 바라며, 은율은 세희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채애앵

똑같은 소리.

‘어?’

은율은 허공을 날아가는 두 번째 칼날을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첫 번째 칼날보다 훨씬 길었다.

“……어?”

그녀는 눈동자만 아래로 내려 자신이 쥐고 있는 검을 확인했다.

칼몸이 통째로 부러져 있었다. 코등이 바로 위쪽에서부터.

‘어떻게? ……아.’

은율의 머릿속에 수학여행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도 못 뚫던 결계를 홀로 베어갈랐던 세희.

‘나보다…… 강하구나.’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강한 검기를 만들었을까. 단시간에 강한 검기를 만드는 기술이라도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파도처럼 휩쓸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선생 차이가 여실하다는 것.

세희의 검이 은율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은율은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으.”

입술에선 침음이 흘러나오고, 눈동자는 덜덜 떨렸다.

졌다.

졌다. 져 버렸다. 오늘 방과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은율의 마음속은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끓어올랐다. 은율은 자신의 목에 부러진 검을 댄 세희를 아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치고,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터질 것 같아.’

입학 후 첫 패배의 쓴맛과, 자신보다 약하던 상대에게 추월당했다는 부끄러움도 분명 있었지만.

가장 큰 감정은 역시 동경이었다.

그 열렬한 시선이 부담스러웠을까. 세희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으흠!”

그때 결계가 내려가고 주변의 풍경이 드러났다.

“1등.”

진행교사가 마지막 선언을 내렸다.

“천세희.”

“끄아아악! 이거 다 조작이야, 조작! 말도 안 돼! 야! 도은율이! 토토에 얼마 박았냐?!”

“마, 세희야. 고맙데이. 진짜 1등 했구마.”

경기장 밖에서 뿔 달린 소녀가 방방 뛰고, 까무잡잡한 소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회색 머리 소녀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안대를 쓴 세희의 담임이 조용히 씩 웃고 있었다.

세희는 경기장에서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친구들의 품에 안겼다.

……아니, 친구들에게 가는 게 아니라.

친구들을 어깨빵으로 날려버리고 담임의 품에 안겼다.

“야이씨, 안 떨어져? 이년 핑계 잡았네. 비켜! 쌤도 곤란해하잖아!”

“놔 두라, 태화야. 지금 냅둬야 나중에 우리가 1등할 때 똑같이 할 거 아니가.”

“선생님. 1등 나온 기념으로 헹가래 해요. 헤헤…….”

“아니 얘들아, 니들이 날 어떻게 던지…… 켁!”

네 명의 소녀가 선생을 공중으로 던졌다. 힘이 균일하지 않은지 선생이 자꾸 빙글빙글 돌았다.

은율은 그들이 환호하고 신음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바닥의 부러진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경기장에서 내려가기가 싫었다.

“은율아.”

몸이 선뜩해지는 목소리. 은율은 덜덜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담임, 경한이 싱긋 웃고 있었다.

“잘했어. 내려와.”

하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전혀 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은율은 경기장에서 내려와 그를 향해 다가갔다.

경한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세희가 상호에게 안긴 것처럼.

하지만 손길은 사뭇 달랐다.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되지.”

경한의 손이 은율의 등을 눌렀다. 더 깊이 안겨들도록.

“……네.”

은율은 빛을 잃은 눈으로 가만히 몸을 내주었다.

그러다가 경기장 건너편의 세희와 눈이 마주쳤다. 은율은 세희의 차가운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맞다, 1등 축하한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경한이 은율의 고개를 그의 품에 파묻었다.

은율의 눈앞에는 그저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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