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501)

***

오전 예선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상호는 옆에 앉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만 먹어.”

“네~.”

아이들이 식사를 시작했다.

태화가 숟가락으로 국을 뒤적거리며 세희를 쳐다보았다.

“너 몇승했어?”

“9승.”

“벌레야?”

세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옆에서 지윤이 물었다.

“태화 니는?”

“당연히 10승이지.”

“으아, 내는 또 8승인디…….”

“나빛이 너는?”

태화의 물음에 나빛이 밥을 꿀꺽 삼키며 웃었다.

“11승.”

“얘 왜 이래 갑자기. 안 그러던 애가 사기를 치네. 누가 물들였냐?”

“너한테 배웠어. 헤헤…….”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상호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술사조에 배정된 나빛은 당연하다는 듯이 무쌍을 찍었고, 태화도 무난한 압승. 지윤은 중간평가 때와 같은 성적을 유지했고, 세희는 은율을 제외한 다른 상대를 모두 쓰러트렸다.

다른 반 아이들도 중간평가 때보다 확연히 성장했지만, 이 넷은 좀 더 많이 강해졌다.

가장 상승폭이 큰 것은 나빛. 오후가 되자 광속으로 탈락했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세희와 태화 같은 상위권 아이들과도 충분히 대등하게 싸울 실력이 되었다.

그런 나빛을 전투력 낮은 주술사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마 2학기부터는 다른 조에 배정될 터였다.

“쌤.”

태화가 그를 불렀다. 상호는 밥을 씹느라 대답을 못하고 눈만 마주쳤다.

“저희 1등하면 뭐 없어요?”

그럴 줄 알았다. 상호는 밥을 삼키고 핀잔을 주었다.

“또 상이 필요해? 밥도 사주고 옷도 사줬는데…….”

“그러게요. 이제 집도 해주고 의식주 채우죠. 1등하면 쌤 집 주세요.”

태화가 눈웃음을 쳤다.

“옵션으로 쌤까지 포함해서.”

“됐어, 인마. 1등이나 찍고 말해.”

“선생님.”

이번엔 세희였다. 상호는 뜨려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응?”

“저 1등하면…… 오늘 잠깐만 어디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세요?”

“어디를?”

“지금은 말씀 못 드려요.”

나빛과 지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태화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세희를 흘겨보았다.

“왜 말 못해? 범죄야?”

그 말에 세희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범죄야.”

“뭔…….”

태화는 할 말을 잃고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쌤.”

“응?”

“저도 같이 갈래요.”

상호는 세희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돼?”

“네.”

세희가 태화를 흘끗했다.

“얘가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몇 명 더 있는 게 좋을 것도 같고……. 선생님 설미 선생님하고 친하시죠?”

“친하긴 하지.”

“교장선생님하고도 친하시죠?”

“친하다……라고 물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분들도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여자 어른이 필요해서.”

상호는 곤란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무리한 부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희야, 아무리 친해도 어른들끼린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거야. 이유를 안 말해주면 그 두 분은 힘들어. 물론 중요한 일이니까 네가 교장선생님까지 말하는 거겠지만…….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될까?”

세희는 눈동자를 양옆으로 굴려 주변의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이내 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고 알려드릴게요. 둘이서만요.”

꼭대기를 향해서

“……망했다.”

지윤은 대진표를 보며 중얼거렸다.

오전에 8승을 해서 오후 본선까지 올라온 것은 좋은데.

하필이면 상대가.

“세희야.”

“응?”

“살살해라이.”

“오늘은 안 돼.”

세희가 고개를 저었다. 지윤은 그 모습을 보고 침음했다.

“끄응…….”

토너먼트의 단점. 재수가 없으면 강한 상대를 너무 일찍 만나게 된다.

64강에서 떨어지면 패자조에서 아무리 잘해 봤자 33등.

목표인 10등은 택도 없다.

“세희야.”

“응.”

“어떻게 봐주믄 안되긋나?”

그 말에 세희는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지윤은 이때다 싶어 세희의 손을 잡았다.

“진짜로 져달라는 게 아니고…… 쬐끔만 살살 하라 이 말이다. 니랑 뜨면 내가 당연히 지지. 근디 쌤헌티 변명할기 필요하니까. 응? 응?”

“조금만?”

세희가 되묻자 지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응!”

***

“안되는구마…….”

지윤은 결계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단 한 방에 끝났다.

시작한 지 5초 만에.

진행교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지윤, 패.”

너무 빠르다. 손도, 발도.

수련한 시간은 분명 비슷할 텐데, 어떻게 이렇게 격차가 벌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허탈해서 구름만 보는 지윤의 눈앞에 세희가 손을 내밀었다.

“미안.”

“괘안타.”

지윤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대진 짠 인간이 잘못이지 니가 잘못이가. 기왕 이리 된 거 꼭 1등하래이.”

“당연하지.”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같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갈 곳은 달랐다. 세희는 남았고, 지윤은 패자조로 향했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지윤의 시선이 세희를 향했다.

‘나는 쟬 언제 이겨보나……. 에휴.’

어쨌든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

비록 패자조라도, 모든 전투를 실전처럼 최선을 다해서.

지윤은 조금 더 힘차게 바뀐 발걸음으로 패자조 경기장을 향했다.

***

태화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시합 상대를 쳐다보았다.

“헤헤.”

나빛이 웃었다.

“우리도 우리끼리 만났네. 신기하다. 헤헤…….”

“그러게.”

태화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32강전. 이전 시합에서 무예가를 가볍게 꺾고 올라온 참이었다.

대진표에서 바로 옆 조에 나빛이 있는 것을 보고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로 만나게 될 줄이야.

태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얘는 너무 껄끄러운데…….’

나빛의 실력은 중간평가 때와는 천지차이.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태화는 나빛과 싸우면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반반. 자유자재로 쏘아지는 성창과 단단한 방어막은 공략하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하지만 태화도 모든 밑천을 나빛에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경기장 밖에서 진행교사가 외쳤다.

“준비.”

둘은 동시에 목걸이를 걸었다.

“시작.”

결계가 올라오자마자 태화는 양 손바닥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 손을 중심으로 검은 불꽃이 경기장 바닥에 퍼져나갔다.

일단 불부터 질러놓고 나빛을 그쪽으로 몰아붙일 심산이었다.

방어막에 올라타서 불을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말로 태화가 바라는 바.

성창 두 개보다는 성창 하나와 방어막 하나가 훨씬 상대하기 쉬우니까.

예상대로 나빛은 방어막을 타고 날아올랐다.

쉬익

그런 나빛을 향해 검은 결정의 창이 쏘아졌다.

나빛은 자신의 앞에 방어막을 하나 더 소환했다. 창이 방어막에 세차게 꽂혔다.

카캉

창을 전부 막아낸 방어막은 태화를 향해 날아가며 형태를 바꿨다. 뭉특한 성창으로.

태화는 순간이동으로 성창을 피하자마자 뿔 사이에 에너지를 모았다.

붉은 눈동자가 나빛을 노려보았다.

‘지금!’

성창을 피했을 때가 타이밍. 뿔 사이에서 보랏빛 광선이 발사되었다.

광선은 정확히 나빛을 향해 날아갔다. 뒤쪽에서 성창이 다시 날아들고 있었지만 태화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성창이 닿기 전에 나빛이 먼저 광선을 맞고 격추당할 터였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콰앙

“나이스! ……어라? 히익!”

태화는 광선이 폭발한 것을 보고 어퍼컷을 날리다가, 나빛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급히 몸을 수그렸다.

성창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그녀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어떻게……, 헉.’

태화는 어안이 벙벙해하다가, 폭발의 연기 사이로 드러난 나빛의 모습을 보고할 말을 잃었다.

둥그런 원형의 방어막이 나빛을 감싸고 있었다.

나빛이 태화를 보며 방긋 웃었다.

“짜잔~.”

“야이씨…….”

간단하게 타고 있는 방어막을 확장시킨 것만으로 마법을 막았다. 꼴을 보니 원래 저렇게 쓸 수 있는데 그동안 숨겨왔던 모양이었다.

태화는 성질이 확 뻗치는 것을 느끼며 팔을 쭉 뻗었다.

땅에서 사슬이 튀어나와 나빛의 방어막을 휘감았다.

촤라라락

수없이 솟아난 사슬은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성창까지 붙잡았다. 옴짝달싹을 못하도록 단단히.

나빛의 모든 수단을 봉쇄시킨 태화는 뚜벅뚜벅 걸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빛을 올려다보았다.

“끝이야.”

나빛은 말없이 웃었다.

태화는 방어막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너는 내가 이걸 못 뚫을 거라고 생각하지?”

태화의 손끝에서 시뻘건 불꽃이 휘몰아쳤다.

불꽃은 차츰 꽃의 형태를 갖추었다. 가시 돋친 장미의 모양으로.

민정에게서 배운 가장 강한 마법이었다.

“착각이야.”

태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순간이동을 쓸 준비를 했다. 장미를 땅에 떨어트리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허나, 장미를 놓으려는 순간.

퍼억

무언가가 등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큭……!”

태화의 손에서 장미가 떨어졌다. 마법이 유지되지 못한 장미는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녀는 쓰러지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분명 나빛의 방어막은 그대로인데.

성창도 사슬에 묶여 있는데. 저게 사라지면 그 때 다시 조심하려고 했는데.

도출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속였구나…….’

세 개까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안 그러던 애가 사기를 친다.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건지.

‘씨바, 내가 또 속나 봐라…….’

태화는 이를 갈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