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501)

***

“무슨 말을 했던 거야?”

종례가 끝난 직후. 상호가 효은에게 물었다.

효은은 교탁 옆에서 출석부를 뒤적이는 중이었다.

“그냥. 별 말 안 했어.”

“애들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마.”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말평가 6일 남았어. 다들 집중해야 된다고. 이상한 말이 아니더라도 시험끝나고 해.”

“그랬어? 몰랐지.”

“일정표 좀 보고 살아.”

효은이 고개를 돌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달력 보기 싫어.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배나 까봐. 어떤지 보게.”

그 말에 효은이 수녀복을 걷어올렸다. 이미 볼 것 다 본 사이라 거리낌이 없었다.

검은 속바지 위 하얀 아랫배 한가운데. 주변이 샛노랗게 물든 푸른 멍이 딱 주먹 크기만큼 나 있었다. 배꼽 바로 아래 부분이었다.

그는 낮게 신음하며 손끝으로 멍을 살살 쓸었다.

“치료……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싫어.”

효은은 실쭉 웃었다.

“니 미안해하는 표정 계속 볼 거야.”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다. 상호는 멍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려 했다.

그때 효은이 그의 머리 위로 수녀복을 뒤집어씌웠다.

그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야, 뭐 하는…….”

효은이 그의 입을 틀어막음과 동시에 누군가가 교실 문을 열었다.

상호는 효은의 수녀복 안에 쪼그려 앉은 모양이 되었다. 교탁에 가려져서 보이진 않을 터였다.

“아, 수녀님.”

나빛의 목소리였다.

효은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웬일이야?”

“핸드폰을 두고 와서…….”

나빛이 헤헤 웃었다.

“아직 익숙하질 않아요. 핸드폰 들고 다니는 게……. 그런데 선생님은 어디 가시고 수녀님만 계세요?”

“잠깐 어디 갔어.”

“수녀님.”

교탁 쪽으로 나빛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아까 하신 말씀 있잖아요.”

“응.”

“얼마나…… 얼마나 남으신 거예요?”

상호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갑자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효은이 그의 귀를 잡고 방어막을 친 것이었다.

그는 그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러는 순간 효은이 비밀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대신에 숨을 멈추고 내공을 끌어올려 땅과 몸의 진동으로 나빛의 말을 들었다.

“가르쳐줄 시간이 얼마 안 남으셨다면서요. 그러니까 날개 만드는 거 잘 봐두라면서요……. 얼마나 남은 거예요? 저 바보라서, 시간 많이 필요해요…….”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 울먹이고 있으리라.

상호는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거였냐.’

시한부.

그의 머리 위에서 효은이 피식했다.

“그건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나마 최근에 살짝 길어지긴 했는데……. 모르지. 갑자기 훼까닥 갈지도.”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가 뭘 돕니? 너 좀 있으면 시험이라며.”

“전 시험보다 수녀님이 더 중요해요.”

효은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수도 있지.”

“정말요?”

“응. 뭐, 죽으러 온 건 아니니까. 저번에 말했잖아. 치료하는 방법.”

“그렇지만…….”

나빛이 한탄했다.

“우리 선생님도 엄청 바보란 말이에요…….”

나빛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선생님도 시간 엄청 많이 필요할 거예요…… 어쩌면 저보다 더.”

“그렇더라.”

효은이 쓴웃음을 지었다.

“5년인가. 확실히 많이 필요하더라고, 너희 선생님은.”

“5년이요? 선생님 만난 지 5년 되셨어요?”

“아니. 만나긴 훨씬 오래 전에 만났지.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너는 모르나 보구나.”

상호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예경이 준 검을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걱정 말고 이만 들어가. 훼까닥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야.”

“……네.”

문가로 걸어간 나빛이 허리를 푹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응. 들어가.”

그녀가 나가자마자 상호는 수녀복 밖으로 나왔다.

벌떡 일어선 그는 귀에 붙은 방어막을 손짓 한 번으로 박살내며 효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귀를 막기 전에 들었던 내용에 대해 물었다.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얼마 안 남았다는 게 뭐야?”

“뭘까?”

효은은 능청을 떨었다. 상호는 이를 갈았다.

“물어봤자지 뭐. 시간 말고 뭐 있나.”

“알면서 왜 물어봐?”

“그래서 시간이 왜 안 남은 건데? 얼마나 남은 건데?”

“나도 몰라. 근데 아마…….”

효은이 그의 왼쪽 다리를 힐끔했다. 그 찰나의 눈빛에서 속뜻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태 그녀가 했던 말들. X급이 더 필요하다느니, 가르칠 시간이 얼마 없다느니.

상호는 효은이 이 학교에 온 게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나빛을 위해서임을 깨달았다.

“야.”

그는 효은을 칠판으로 밀치고 머리 옆에 손을 짚으며 몰아붙였다.

“나도 시간이 없어.”

상호의 검지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애들 시험 끝나고 다시 이야기해. 그때까지 딱 기다려. 어디 이상한 데 가지 말고.”

효은은 다크서클 진한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응.”

“그렇다고 진짜 아픈데 참거나 하진 마. 그럴 땐 바로바로 이야기해. 알아들었어?”

“응, 븅신아.”

그녀가 그의 멱살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상호는 효은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드르륵

둘은 화들짝 놀라서 서로를 밀쳐냈다.

문을 열고 선 나빛이 그들을 보며 떠듬거렸다.

“저어, 그…… 이야기하다가 핸드폰을 또 깜빡……해서…….”

“…….”

“방해해서…… 죄송해요.”

서로에게만 집중하느라 나빛이 다가오는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상호는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을 했다.

“그, 그냥 멱살 잡은 거야.”

“저 바보 아니에요.”

‘바보라며…….’

그는 나빛을 보며 진땀을 흘렸다.

그녀가 책상 아래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선생님도 바보 아니었네요.”

“아니야…….”

“괜찮아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아니라니까…….”

하지만 나빛은 귓구멍으로도 듣지 않고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상호가 아니라 효은을 향하고 있었다.

효은이 코웃음을 치며 나빛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걱정 말랬지?”

“네.”

나빛은 서둘러 교실 밖으로 달려다가, 문 안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엄청 잘 어울려요. 두 분.”

그리고는 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바로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가 깨져버렸다. 상호는 혀를 차며 교탁에서 출석부를 챙겼다.

“야, 교무실 가자.”

“해조.”

“뭘 해줘야, 씨바……. 니랑은 분위기 안 잡히면 못해.”

“그럼 아가리 벌려.”

효은이 그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훅 들어와 가지고는 무슨 박치기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 그는 자꾸 입술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효은의 혀를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담배 맛 난다니까…….’

그저께는 케이크가 있었으니까 할만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냄새가 덜했다.

결국 상호는 살짝 혀를 맞대다가 입을 떼고 물었다.

“오늘 담배 안 폈어?”

“응.”

“웬일이야?”

“치료중이라서.”

효은이 키득거렸다.

“치료중엔 술담배 금지잖아.”

상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내가 의사야?”

“니는 의사가 아니라 약이지.”

효은의 손이 그의 뒤통수를 잡았다.

“먹는 거니까.”

“미친년…….”

“좀 잘해 봐, 새끼야. 니가 나보다 훨씬 많이 했잖아.”

“시꺼, 나도 안해본 지 5년 됐다고…….”

그는 그녀가 그의 혀를 먹도록 내버려두었다.

1학기 기말평가

“준비 다 됐지?”

“네.”

세희가 검을 살짝 뽑았다가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상호는 교실에 서 있는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다들 나름대로 결의에 가득차 있었다.

성적의 고저에 상관없이, 쓴맛을 심하게 느낀 순서대로 눈빛이 날카로웠다.

특히 세희가.

“그동안 많이 맞았지?”

그동안 다른 반과는 다른 특이한 교육도 하고, 맞춤 과외도 붙여 줬지만, 결국 주된 골자는 하나.

진짜로 팬다.

치료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몸에 흉터나 멍 따위는 남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남았다. 경험이라는 형태로.

상호는 그게 제일 중요한 자산이라고 여겼다.

“여태 맞은 게 억울하지 않으려면 오늘 열심히 해야 한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거짓말은 안 하겠지만…… 열심히 해. 항상 실전처럼. 1학기라고 대충 하지 말고, 여기서 경험을 쌓아야 학년평가 때도 잘 할 수 있는 거야.”

“네.”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걱정인 태화도 오늘만큼은 진지한 표정으로 임하고 있었다.

“시험만 잘 치면 1학기는 끝이다. 월말부터 방학이야. 물론 나는 너희 계속 굴릴 거지만…… 그래도 방학은 쉬라고 있는 거니까. 학기만큼은 안 하겠지. 그러니까 이번 시험만 집중하고, 고생해라. 알았지?”

“넵!”

“파이팅 한번 해요.”

나빛이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래. 모여 봐.”

그러자 세희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손등 윗자리를 차지했다. 태화가 세희의 손등을 후려쳤다.

“야, 비켜.”

“싫어. 니가 늦은 거잖아.”

이럴 것 같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상호는 손을 하나 더 얹어 모두가 자신의 손과 닿도록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전투 후에는 꼭 머리 식혀. 화나도 화내지 말고 선생님한테 와서 풀어. 다 들어줄게. 싸움을 실전처럼 하라고 해서 악감정까지 품으라는 말은 아니야.”

“네.”

“대신에…… 전투는 진짜 죽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해. 안전은 선생님들이 책임질 거니까. 걱정 말고 마음껏 싸워.”

“네.”

“하나둘셋 하면 위로 파이팅 하는 거야. 하나…… 둘, 셋!”

“뽜이팅!”

태화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확 타올랐다.

옆에 서 있던 세희와 지윤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가, 곧 무기를 들어 태화를 후드려 팼다.

“사람 타뿐다, 이 미친 가스나야!”

“맞을래? 미쳤어?”

“아야! 때리면서 맞을래가 뭐야, 멍청아! 불꽃처럼 파이팅하자는 거지, 꺅!”

태화와 거리가 있던 나빛은 태연한 얼굴로 헤실거리며 상호와 짝짜꿍을 하듯 양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파이팅~.”

“……그래. 나빛이 열심히 해.”

상호는 나빛을 향해 웃어준 뒤 계속 싸우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얘들아, 그만 싸우고 나가자.”

“금방 따라갈게요. 먼저 가세요.”

“그냥 얘 지금 묻어불고 제 등수나 올릴랍니더.”

“쌤……. 살려주세요…….”

상호는 간신히 세희와 지윤을 진정시키고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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