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501)

***

“아니…… 개빡대가리야.”

상호는 효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대체 왜 순서대로 쓰여있는 걸 안 따라하고 가나다순으로 바꿔놓는 거야?”

그녀는 안경과 베일을 쓴 채로 그의 교무실 자리 옆에 앉아서 함께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효은의 무표정한 얼굴이 상호를 향했다.

한참을 그대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상호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책상에 놓인 종이를 두드렸다.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이거 생년월일 순서대로 쓰인 거란 말이야. 차트에 생일 안 써놔서 자동정렬도 안 되는데……. 손으로 고치는 수밖에 없다고.”

“해줘.”

“……야.”

그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졌다.

“일 배우러 왔잖아. 배워야지. 실수를 했으면 직접 때우고…….”

“좆까. 나 컴퓨터 몰라.”

“모르니까 배워야 되는 거 아냐. 그 나이 먹고 이것도 못하겠다고 하는 게 말이 돼?”

그러자 효은이 입술을 쭉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

“해조.”

“어우 씨…….”

상호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키보드를 잡았다. 당장 하지 않으면 손발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너 나보다 누나 맞냐?”

“몰라. 애기야. 해조.”

옆에서 설미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이 좋네. 상호 씨랑 수녀님.”

상호와 효은은 화들짝 놀라며 멀리 떨어졌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분위기는 십년지기야. 상호 씨. 후배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설미의 눈빛이 어째 냉랭했다. 하지만 상호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맘에 들어요. 그럭저럭.”

“좋~겠네.”

설미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상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도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이나 하자…….’

그의 손가락이 열심히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렸다.

옆에서 가만히 보기만 하는 효은이 꽤나 아니꼬왔지만, 딴청 안 부리고 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효은이 물었다. 여전한 무표정으로.

“그럭저럭 맘에 들어?”

상호는 대충 대답했다.

“어.”

“그럭저럭?”

겨우 그것밖에 안 되냐는 말투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많이.”

그때서야 효은이 활짝 웃으며 그의 코에 입김을 내뿜었다. 담배를 안 폈는데도 담배 냄새가 훅 풍겼다.

상호는 마우스를 내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나와. 따라나와. 버르장머리를 그냥……!”

“흥. 어제는 존나게 빨아 놓고선……. 이제 와서 냄새난다고 지랄이야.”

둘은 투닥거리며 교무실을 나갔다.

설미의 서운한 눈빛이 그들의 등 뒤에 꽂혔지만, 아무리 상호라도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지는 않았다.

먹는 약

한숨을 쉬지 않은 날이 없다.

한숨이 나오지 않는 날이 없다.

상호는 올해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효은에게 핀잔을 날렸다.

“수녀님. 수업 집중하세요.”

“아 예.”

그녀가 나빛의 볼따구를 주무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교생 신분으로 수업을 참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들으라는 수업은 안듣고 나빛의 뒤에 서서는 뺨을 조물조물거리며 놀고 있었다.

나빛이 백치미가 듬뿍한 미소를 지었다.

“헤헤.”

다른 사람들은 그녀 뒤의 여인을 교생 김효은으로 알고 있었지만, 나빛은 여인이 나효은 수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호도 나빛이 효은을 알아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효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이사장, 교장, 나빛. 그리고 상호. 지윤도 긴가민가 하는 것 같았지만 아직 상호에게 물어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빛이 효은의 배에 머리를 기대는데 갑자기 효은이 몸을 움츠렸다.

“윽……!”

“앗, 수녀님…….”

나빛은 당황하며 급히 머리를 뗐다.

칠판에 글씨를 쓰던 상호는 소란을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효은이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왜 그래요?”

“배가 좀 아파서.”

“화장실 가시…….”

가시든가, 라고 말하려던 상호는 그저께 자신이 그녀의 배를 쳤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물백묵을 내려놓고 뒤통수를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효은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고 교실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아이들을 등진 채로 조용히 효은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치료 안 했어?”

“응.”

“왜? 성력으로 금방 하면 되잖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그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때려놓고 치료하면 되지 않느냐니. 나중엔 맘놓고 패겠다? 치료하면 되니까.”

“아니 시바…… 후우.”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그치?”

효은이 웃었다.

상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닿은 듯 만 듯 하게.

“그래도 치료해. 아프잖아.”

“됐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녀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수업이나 해.”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아이들이 잔뜩 얼은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여. 분위기가 왜 이래.’

아이들의 시선이 효은의 배에 붙박혔다.

뭔가 큰 오해를 산 것 같았다. 하긴 애들이 보기엔 아프다고 하니까 바로 달려가서 배 쓰다듬어 주는 걸로만 보였을 터였다.

그는 교실 앞으로 돌아와서 칠판을 탕탕 쳤다.

“얘들아, 수업하자. 수업…….”

“몇 개월이에요?”

태화가 물었다. 늘 그렇듯 브레이크를 부숴버린 10톤 트럭 같은 저돌성이었다.

상호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냐, 임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근데 왜 배를 만져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 배를?”

“다 사정이 있어.”

“엄청 조심스럽게 만지던데……, 꼭 안에 뭐가 있는 것처럼.”

태화의 눈빛이 상호를 꿰뚫었다. 하지만 전혀 틀린 내용이었다.

아니, 뭐가 있긴 할 터였다. 애가 아니라 멍이.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칠판에 글씨를 써 나갔다.

“수녀님한테 무슨 말이야.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수업이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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