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기맛은 다 팔렸어요. 죄송합니다.”
카페 여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호는 지갑을 꺼내며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물었다.
“어떻게 하나만 만들어 주실 수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조각케익이 하나만 만들 수가 없는 물건이라서요…….”
“그럼 한 판 만들어 주실 수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상호는 지폐를 꺼내 계산대에 쌓았다. 그래도 직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더 쌓았다.
“죄송합…….”
다른 대답이 나올 때까지 쌓았다.
“안 되는데…….”
결국 직원은 한숨을 쉬며 지폐 다발에서 케이크 한 판만큼의 가격을 집어갔다.
직원은 지폐를 세어 계산대에 넣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여자친구……를 울려서요. 걔가 여기 걸 잘 먹었어서.”
“저런.”
직원이 주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여자 울리지 마요. 결혼하면 나중에 다 돌아오니까요.”
“……명심할게요.”
결혼 상대는 절대로 아니지만.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케이크를 만드는 데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쨌든 선물은 준비했다. 상호는 차를 몰아 구원교단의 본부 성당으로 향했다.
그가 건물 안에 들어서자 마침 일전에 봤던 중년 사제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이 상호를 향했다.
“앗!”
사제는 상호를 알아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헌터님은 혹시 저번에……?”
“아, 예. 맞습니다.”
“그때처럼 또 부수시면 곤란합니다. 저희가 예산이 그리 여유롭지 않은…….”
“안 부숴요, 안 부숴요. 들어가겠습니다.”
상호는 그를 지나쳐 안쪽 성당으로 걸어갔다.
역시나 안쪽 성당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스테인드글라스가 은은히 빛났다.
그는 이미 한 번 와 봤던 길을 지나 예배당 문 앞에 섰다.
‘뭐라고 사과하지?’
머릿속이 캄캄했다.
효은에게 사과한다는 것을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젠장, 어떻게든 해야지, 뭐.’
상호는 문을 열었다.
예배당과 길쭉한 예배 의자. 중앙의 넓은 단과 신앙회 문양. 전부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이 복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때 효은이 앉아있던 맨 앞줄의 의자는 지금 텅텅 빈 채였다.
‘어디 갔지?’
그는 안으로 들어서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구석에 쪼그려 앉은 효은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베일을 벗어 새치 섞인 머리가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 앞쪽에서 연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아직 그가 온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 무시하는 건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코를 훌쩍일 뿐.
상호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뚜걱 뚜걱
검을 짚을 때마다 소리가 난다. 가까이 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효은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몸을 구부린 채로 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작은 등이 애처로워 보였다.
상호는 뒤쪽 의자에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았다.
“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이런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어. 궁상맞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효은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발치에는 꽁초 30개비 남짓이 떨어져 있었다. 점심때부터 피고 또 피고, 또 핀 것이다.
제정신을 유지하고는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
대답은 없고.
“효은.”
반응도 없다.
상호는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호칭을 꺼냈다.
“효은이 누나.”
그러자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뚝뚝 흐르는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애미없는 새끼야.”
상호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담배를 조심스럽게 빼내어 바닥에 떨어뜨리고 손을 잡았다.
“배 괜찮아?”
“때려놓고 그런 소리를 해?”
효은이 그에게서 손을 빼려 했다. 상호는 억지로 힘주어 잡는 대신 그녀가 당기는 대로 따라갔다.
“미안해.”
그의 목소리에 짙은 후회가 묻어났다.
“내가 잘못했어. 때린 것도, 욕한 것도……. 진심 아냐.”
“됐어, 새끼야.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미안해? 그럼 끝나?”
“끝 안 나. 평생 사과할게. 옛날에 때린 것도…… 다 사과할게. 미안해.”
상호는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고해성사를 하듯이.
“나 미친놈인거 알잖아.”
“그게 변명이야?”
“미안해, 나는…… 그냥 내 생각만 하는 놈이라. 누나 입장 한 번도 생각 안 하고…… 그런 말 했어. 절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내가…….”
효은의 턱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떨어졌다.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해? 한 번도 안 했다고 알려주니까 그런 말을 들어야 해? 너는…… 그동안 날 그렇게 보고 있었어?”
“내가 미친놈이라고.”
상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팍에 얹었다.
“내가 개소리 한 거라고. 누나는 절대 그런 사람 아니고, 나도 알고 있다고.
어떻게 하면 믿을래?”
“그 말.”
효은이 그를 노려보았다.
“남들 앞에서도 할 수 있어?”
“하지.”
“언니오빠들 데려오면 그 앞에서도 할 수 있어?”
“할게. 얼마든지 할게.”
“전화해서 해봐.”
상호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핸드폰을 꺼냈다. 효은은 그가 전화를 거는 꼴을 지켜보았다.
곧 연결음이 끊기고 도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받았다. 또 뭐 필요해서 전화했지? 니는 인마 꼭 지 필요할 때만 전화하고…….]
“형.”
[응?]
그는 손가락을 문질거렸다.
“내가 그…… 효은이 누나한테. 잘못한 게 있거든?”
[뭐?]
도현이 크게 당황했다.
[니가 웬일이냐? 걔한테 누나라고 다 하고?]
“그게…… 내가 진짜 큰 잘못을 했거든. 좀 많이 큰 잘못……. 그래서 말인데, 지금까지 했던 거 다 미안하다고, 내가 다 틀렸다고…… 전해줄 수 있어?”
[효은이한테? 연락 안 한 지 좀 됐는데……. 대체 뭔 일이야? 니들 어지간해선 안 그러잖아. 칼 들고 싸우는 것보다 심한 짓을 했어? 너 설마…….]
“뭐.”
[덮쳤냐? 아니지?]
상호는 핸드폰을 집어던질 뻔했다.
“아니야. 뭔 소리야, 시바……. 그냥 이제 그만하고 사과하려고. 내가 잘못 했으니까.”
[하긴 네가 그럴 리는 없지. 그래, 니들도 어른 다 됐구나. 뭐 이번 기회에 한번 하지. 형한테 맡겨, 짜샤.]
“부탁할게.”
[믿어라, 인마. 금방 끝내고 연락할게.]
상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효은의 전화가 울리지 않았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녀도 살짝 당황했는지 자꾸 상호를 흘끗하며 눈치를 살폈다.
“너 오빠한테 뭐 잘못했냐?”
“……바쁜가 보지.”
한참을 기다리니 드디어 효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뭐야. 어째 전화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말투다? 몇 달 만에 걸었는데…….]
미련한 호인이어도 바보는 아니었다. 도현이 폭소를 터트렸다.
[너 상호랑 같이 있구나!]
“아, 아니야.”
[이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들이 내 손바닥 안이지. 그래서 막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게…….”
효은이 코를 훌쩍였다.
“나보고 창녀래.”
[너희가 겨우 그거 가지고 싸워? 아니, 싸움이야 항상 하지. 그거 가지고 뭐, 울기라도 했냐? 너희 평소에 훨씬 심한 말도 하잖아.]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뭐, 심한 말이긴 한데, 효은이 네가 좀 봐 줘라. 너도 많이 그랬잖아. 네가 더 자주 시작하기도 했고……. 그리고 상호 고놈이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잘 안 하잖아. 누나라고까지 하면서 사과하면 진심인 것 같은데…… 받아 줘라. 누가 뭐래도 전우 아니냐.]
“……됐어.”
효은이 중얼거렸다.
“내가 알아서 할게. 끊어.”
[상호 옆에 있지? 야, 상호야! 난 다 해줬다? 꼴을 보니까 그거 하다가 처녀막 없다고 창녀 이야기 나온 거 같은데…… 그런 거 다 의미 없다. 거 혼자 하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그런 거야. 신경 쓰지 말고, 이참에 화해해라. 화해 해서 우리 국수 한 번 먹여주…….]
도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효은이 급히 통화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상호는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버린 효은을 보았다.
“미안해.”
“됐어, 이제.”
그녀는 혀를 찼다.
“이제 알았으니까 꺼져.”
“선물 가져왔어.”
상호는 몸을 뒤로 뻗어 뒷자리에 놔뒀던 케이크 상자를 집으며, 은근슬쩍 안대를 뒤집어 썼다.
“이거. 저번에 잘 먹더만.”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아 케이크를 내밀자 효은이 뭔가를 뿜었다. 그의 안대에 그려진 고양이 캐릭터를 보고서.
“푸웁……! 콜록콜록. 으…….”
하지만 아직 화가 안 풀렸다고 농성을 할 셈인지, 금세 웃음을 지우며 케이크박스를 집었다.
어째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은 멈추지를 못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이미 화가 다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딸기맛이네.”
효은이 포크로 케이크를 뒤적이며 말했다.
“저번에 먹어봐서 다른 맛 먹고 싶었는데.”
“나중에 사줄게. 먹고 싶을 때 말해.”
상호는 그녀가 케이크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보기만 하고 있으니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저건 뭔 맛일지.
“좀만 줘봐.”
그의 말에 효은이 포크로 케이크를 떠 내밀었다.
상호는 별 생각 없이 받아먹었다가 포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담배 절은내, 아니 절은맛에 입에 담은 케이크를 전부 뱉어내고 말았다.
“으퉷! 아오, 씨!”
튀어나간 케이크 파편이 효은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그는 흙 씹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뭔 입에서 담배 맛이 묻어나냐!”
“…….”
“살다살다 담배 케이크를 먹을 줄은 몰랐네, 씨바……. 너 맛은 느껴져?”
상호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케이크가 통째로 날아들었다.
퍼억
“그럼 이렇게 처드시던가.”
효은이 툴툴거렸다.
“…….”
그는 얼굴에 케이크가 박힌 채로 가만히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는…… 당해줄 수 있지. 나도 저번에 했으니까…….’
케이크 받침대가 스르르 떨어졌다. 생크림에 시야가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입술에 따뜻한 기운이 다가왔다.
상호는 깜짝 놀라 눈가의 생크림을 닦아냈다.
눈앞에서 효은이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빠는 중이었다.
“맛만 좋구만. 담배는 무슨…….”
그녀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상호는 알았다. 손가락이 아니라 입술이었다는 것을.
그가 멍하니 바라보자 효은도 들켰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시선을 피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볼일 다 봤으면 꺼져.”
“야.”
그는 소매로 얼굴을 닦고 효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나 때문에 예현여고 온 거지?”
“아니.”
“거짓말하지 마. 학교가 한두 곳도 아니고. 나 아니면 굳이 우리 학교로 올필요가 있어?”
효은은 말을 하지 못했다.
“참나…….”
상호는 혀를 차며 손에 묻은 케이크 크림을 그녀의 입술에 발랐다.
“담배 끊어. 맛없으니까.”
그리고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가 아무리 가까이 다가와도 효은은 몸을 빼지 않았다.
그저 살며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