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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어.”
상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민정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을 본 민정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머, 어머머……, 다들 상호 제자니?”
“안녕하세요.”
태화를 제외한 세 명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지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성철이 형 딸.”
“어머! 진짜?”
민정이 깜짝 놀랐다.
지윤과 세희도 그 대화를 듣고는 눈앞의 여인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둘이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진짜네. 살짝 있다, 아저씨 얼굴이……. 어서 앉아, 앉아.”
민정이 그들을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상호와 아이들은 거기에 앉았다.
그녀가 차를 내오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어?”
“태화가 좀 강한 마법을 배워보고 싶대.”
상호의 대답에 민정은 고개를 기웃했다.
“강한 마법……이라.”
주전자와 잔이 저 혼자 두둥실 떠올라 아이들의 앞에 차를 따랐다.
“위력이 강한 마법을 원하는 거니?”
민정이 묻자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조건 짱쎄고 강한 마법이요. 무예가고 신앙인이고 다 한방에 쓰러트릴 수 있는 마법.”
“강한 마법…….”
민정은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연신 매만졌다.
“태화야. 강한 마법이란 건 사실 쓸모가 없어.”
“네?”
태화가 눈을 멀뚱멀뚱하게 떴다.
“왜요?”
“마법사가 싸울 때 필요한 건 위력이 아니라 속임수거든. 똑똑한 마법이 필요하다는 뜻이야. 아무래도 직접 싸우면서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민정이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상호는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들한테 한번 보여 줘. 근데 어디 좋은 데 있어?”
“사람이 많아서 멀리 가긴 힘들구, 옥상에서 하자. 결계 치면 괜찮으니까. 다들 일어나 봐.”
아이들은 그 말대로 했다.
소파 주변 바닥에 파란 빛줄기가 빠르게 돌아다녔다.
빛줄기는 거대한 원을 그리고는 기하학적인 문양 속에 마법 문자를 빼곡히 써넣기 시작했다. 그 문자를 읽던 태화의 눈이 핑글핑글 돌아갔다.
“이거…… 무슨 마법이에요?”
민정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을 감고 집중하던 그녀가 한참 후에 손뼉을 짝쳤다.
주변의 풍경이 확 바뀌었다. 어둑한 하늘. 시원한 바깥바람.
그리고 바닥에 크게 그려진 동그라미 속 H.
“우와.”
순식간에 옥상 헬리포트로 공간이동했다. 나빛이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엄청 높아요…….”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야경이 퍽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경치도 잠시 후 하얀 결계에 막혀 사라졌다.
민정은 결계가 바닥까지 잘 덮인 것을 확인하고는 태화를 향해 웃었다.
“시작해 볼까?”
“아, 누나. 잠시만.”
상호는 다른 세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얘들도 같이 가르쳐 줘. 똑똑한 마법사는 어떻게 싸우는지.”
“그럴까? 음…… 그래. 다 같이 시작하자.”
흔쾌히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세희와 지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눈앞에서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미인이 사실은 지옥을 거쳐온 괴물이란 걸 알고 있기에.
둘은 경공을 펼치며 달려들 준비를 했고, 나빛도 성창 하나와 방어막 하나를 만들었다.
태화는 가만히 서 있었지만 시선은 민정에게 붙박혀 있었다.
“언제든 들어와.”
민정이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
네 명의 아이들은 슬금슬금 움직여 민정의 사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민정이 당황하며 상호를 보았다.
“얘들 엄청 진심인가 봐…….”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공격할 거면 죽이라고.”
“그래도 오늘 처음 본 애들인데……. 뭐, 상관은 없지만.”
그녀는 여유롭게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나빛의 성창이 민정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걸 신호탄으로 삼았는지, 세희와 지윤도 동시에 달려들었다.
“어머. 보호 목걸이를 깜빡했네.”
민정은 중요한 내용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는 순간이동을 했다. 서 있던 곳 바로 옆으로.
세희의 검과 지윤의 주먹이 빗나갔다.
그녀들을 향해 뒤늦게 성창이 날아들었다.
“앗!”
나빛의 당황은 늦었다.
원래대로라면 성창이 세희와 지윤을 때렸을 터였다. 비록 창날은 없지만, 보호 목걸이가 없는 상태에서 얻어맞으면 뼈 하나쯤은 부러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허나 성창은 둘에게 닿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작은 방어막이 성창을 막은 것이었다.
나빛의 것과는 달리 푸르스름했다.
“계속.”
민정은 짧게 말하며 다시 날아드는 세희의 검을 순간이동으로 피했다.
세희의 등 뒤에 나타난 민정의 손에는 시뻘건 불덩이가 들려 있었다.
“아웃.”
민정이 불덩이를 세희에게 내리치며 외쳤다.
“읏!”
워낙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세희는 반응도 못 하고 화염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불이 붙지는 않았다.
민정은 세희에게 즉석으로 펼쳐준 보호 마법을 거두며 염동 마법으로 세희를 공중에 띄워두었다.
그녀의 뒤로 지윤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얍! ……어라?”
주먹은 민정의 몸에 닿는 데 성공했지만, 마치 비눗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맥없이 미끄러졌다. 지윤은 이번엔 발차기를 날렸다.
한 번 더.
두 번 더.
몇 번을 더 휘둘러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아웃.”
민정이 지윤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튕기자 섬광이 번쩍했다. 지윤은 얼굴을 싸쥐며 바닥에 넘어졌다.
“으악……!”
지윤도 염동 마법에 이끌려 공중에 띄워졌다.
상호는 태화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민정과 아이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근거리에서는 무예가가 마법사보다 유리하다는 믿음. 그 고정관념이 눈앞에서 깨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웃!”
땅에서 반투명한 사슬이 튀어나와 나빛과 나빛의 성창에 얽혀들었다.
민정이 태화를 보며 웃었다.
“태화는 포기한 거야?”
태화의 목에 힘줄이 돋았다.
검붉은 뿔 사이에 보랏빛 에너지가 모여들었다.
“크으……!”
평소보다 훨씬 양이 많았다.
태화는 뿔을 민정에게 겨눴다. 상호는 태화가 곧 마각초살포를 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진 태화가 민정의 뒤에 나타나더니, 머리를 푹 숙이며 에너지를 바로 폭발시켰다.
“이야아압!”
콰앙
보랏빛 폭발이 일어나며 후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상호는 태화가 새로 선보인 기술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조금만 더 빨리 쓸 수 있으면 쓸만하겠는데. 다만…….’
연기가 걷히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민정의 품에 태화가 얼굴을 박고 있었다.
“이건 자폭이잖아, 태화야.”
민정이 쓰게 웃었다.
“네가 안전할 방법을 찾아야지. 무조건 쓰러트릴 생각만 하면 어떡해.”
“끄응…….”
“어쨌든 태화도 아웃.”
민정과 태화의 몸을 감싼 보호 마법이 사라졌다.
“그래도 태화 네가 제일 곤란했어. 음……, 다른 아이들처럼 간단하게 상대해 주려고 했는데, 자폭을 할 줄이야……. 덕분에 그냥 힘싸움이 되어버렸네.”
이래서는 보호 마법이 강한지 공격 마법이 강한지, 위력을 겨루는 싸움밖에 되지 않았다.
상호는 그녀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똑똑하게 싸우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거야. 자폭 같은 거 쓰지 말라고.”
“그렇긴 해.”
민정은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세희와 지윤을 땅에 내려주고, 나빛을 묶은 사슬을 없앴다.
“잘 알았지? 너희 수준에서 무예가를 상대할 때는 큰 기술이 필요 없어. 물론 저어기 선생님 같은 사람을 상대할 땐 필요하지만…… 그것도 마법 집중 시간을 버는 노하우가 쌓였을 때 이야기지. 무턱대고 큰 기술을 쓰면 단칼에 썰리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화를 향해 마법진을 몇 개 띄웠다.
“다 간단한 마법들이야. 코앞으로 순간이동하는 마법. 마찰력을 줄이는 마법.
찰나의 시간에 빛을 집중시키는 마법. 외워 두면 복잡한 계산도 필요 없어.
순간이동보다 훨씬 쉬운 마법들이잖아. 그치?”
마법진을 바라보는 태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이것 말고도 많이 있어. 잡기술이라면 잡기술들이지만…… 배우면 재밌을 거야. 큰 기술도 원하면 몇 개 가르쳐줄게. 배워 볼래?”
“네.”
태화가 보기 드문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그 모습을 흐뭇해하며 바라보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세희랑 지윤이는 내가 가르친 게 맞고, 나빛이한테도 싸우는 방법은 내가 가르쳤고…….’
하지만 태화에게는 결국 민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무리 악마 융합체라 해도 결국은 마법사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상호는 고민에 빠졌다. 역시 마법사를 무예가가 가르치는 건 무리일까.
‘그건 인정해야겠네.’
상호는 속으로 수긍했다. 그 혼자서 마법사를 가르칠 수는 없다.
하지만 포기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을 쓱 둘러보며 생각했다. 내년에 받을 학생들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 네 명만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강하게 키우겠다고.
인맥이니 뭐니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강하게만 키우겠다고.
그런 다음에 아이들이 헌터가 되어 실전 경험을 쌓고 나면, 자신처럼 선생이 되는 건 어떻겠냐고 넌지시 떠 볼 것이다.
‘선생을 키워내는 게 세상에 훨씬 도움이 되겠지.’
그에게 마법사를 가르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더 이상 신경쓸 문제가 아니었다. 태화 한정으로는.
상호는 그렇게 마음을 다졌다.
대토론회
“강 선생.”
밥을 먹던 상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해련이 의자를 당겨 그의 옆에 앉는 중이었다.
어째 얼굴이 또 젊어진 것 같았다. 이제는 20대 후반 정도의 외모.
“아, 네, 교장선생님.”
“수요일에 대토론회 있잖아요.”
“예.”
반마다 한 명씩 대표가 나와 강당의 전교생 앞에서 토론을 하는 행사. 조리있게 잘 말한 학생에게는 상도 준다.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련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눈을 마주쳤다.
주름 하나 없이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하얀 백발이 굽이쳤다.
“나랑 같이 심사위원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제가요?”
그는 고개를 기웃했다. 전투 관련이면 몰라도 논술 관련으로는 딱히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게 없는 그였다.
“토론 잘 모르는데…….”
“그냥 어떤 의견이 마음에 드는지만 보면 돼요. 전쟁을 해 본 사람 입장을 들어보고 싶은 거니까.”
해련이 씩 웃었다.
“물론 내 옆에서 나한테만. 참전자끼리 모여서.”
“……으음.”
상호는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아이들이랑 수업을 하는 시간도 아니고 다 같이 강당에 모이는 행사이니까.
“그럴게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해련은 앞머리를 살짝 매만지며 자리를 떴다. 상호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기웃했다.
‘요즘 자꾸 머리카락을 만지시네. 원랜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그는 급식실을 나서는 해련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