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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 선생인 윤향은 자리에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천색창염에 대한 내용은 남이 있는 곳에서 말하기 싫었다.
그는 수건에 찬물을 적셔 세희의 얼굴과 목을 닦았다.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수건이 미지근해지면 다시 차게 해서.
머잖아 세희가 눈을 떴다.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저 또 쓰러졌어요?”
“그럼 왜 있겠어?”
그는 세희에게 정수기에서 떠온 찬물을 건넸다.
“몸조리 잘해. 아무리 무예 실력이 좋아도 몸이 약하면 의미 없으니까.”
“죄송해요.”
“저번에 말했잖아. 내가 아니라 네 몸에 미안해해야 된다니까.”
“네…….”
세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상호는 말을 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날은 덥고, 옷은 길고, 공격이 계속 날아들어서 쉬지 않고 뛰어야 했고, 내공을 강하게 뽑아낸 다음에 급히 달려들었으니까. 보통 사람한테도 무리였을 거야.”
그는 세희가 얼굴을 들고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결국 네가 진 거야. 마지막에 쓰러지면 아무리 유리했어도 다 소용 없어.”
세희는 거기에 대해서는 반박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가 창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빛이…… 갑자기 강해진 것 같아요.”
“걔는 이제 시작이야. 성창도 만든 지 얼마 안 됐고, 두 개 만드는 것도 오늘 처음 보여줬잖아. 나빛이가 성창을 다루는 거에 익숙해지면 너희 절대 쉽게 못 이긴다. 성창이 세 개가 되고 네 개가 되면 훨씬 어려워지겠지.”
상호는 세희의 손을 잡았다.
“그렇지만 기죽진 마라. 너도 이제 시작이니까.”
그리고 그녀의 내공이 얼마나 쌓였는지를 확인했다.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다. 부지런하게 축기를 하긴 했지만 천색창염의 효율이 워낙 떨어지는 탓이었다. 분명 중간평가 전에는 지윤보다 훨씬 많던 내공이 이제는 한참을 추월당해 있었다.
은율의 내공은 제대로 살핀 적이 없지만, 아마 비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느려터졌구나.’
천색창염을 익힌 사람은 예경과 상호, 세희. 그런데 세희를 제외한 두 사람은 몬스터를 죽여 마나를 얻었기 때문에 마나의 부족을 몸으로 느낄 일이 없었다. 그래서 상호도 오늘에서야 천색창염의 비효율성을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상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천색창염을 고른 것은 세희의 선택. 힘든 길이라 말해줬지만 고집부린 것도 그녀의 의지.
자신이 지금 내공을 줘 버리면, 다른 심법을 익힌 아이들은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지윤이.
‘그래도 경공을 쓸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지윤은 이미 경공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쌓였다. 하지만 세희는 아니었다. 세희가 수업을 따라오려면, 그리고 몸을 금방 건강하게 만들려면 내공이 필요했다.
그러나 강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무공의 요소를 배우기 힘들어진다는 것이 천색창염의 고유한 특징.
그런 특징을 싸그리 무시하고 좋은 것만 챙겨주는 것이 과연 선생으로서 옳은 일일까.
결국 그는 결정을 내렸다.
‘조금만 몰래 주자.’
상호의 손에서 세희의 손으로, 천색창염의 내공이 조금씩 흘러들어갔다.
개미오줌처럼 찔끔찔끔 주고 있었지만, 내공의 순도가 달라서 세희에겐 뜨겁게 느껴질 터였다. 하지만 열사병을 앓은 직후라 그런지 세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몸 속에 뜨거운 것이 흘러들어도 더위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상호는 안심하고 계속 내공을 주입했다.
그런데 갑자기 세희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응?”
손만 내려다보던 상호는 태연한 척 고개를 들어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세희의 눈시울은 붉었다.
“이렇게 많이 주시면…… 제가 어떻게 갚아요?”
상호는 당황해서 내공 주입을 끊었다.
“뭐, 뭐가?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지만 세희는 다 알아차린 눈치였다.
“선생님.”
“응.”
“평생 갚을게요.”
“됐어, 뭘 평생이야……. 그리 많이 주는 것도 아닌데.”
들켰으니 어쩔 수 없다. 상호는 그녀에게 다시 내공을 흘려보냈다.
세희가 그의 손 위에 다른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 뚜렷해서 꼭 내공을 주입하는 것 같았다.
상호는 그 손 위에 다른 손을 올렸다. 그러자 세희가 손을 빼어 다시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호오…….’
무예가, 그것도 쾌검을 선호하는 그녀라서 손이 빨랐다. 상호는 짓궂은 호승심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또다시 그녀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은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서로의 손등을 차지하려고 조용히 싸웠다. 일반인에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결국은 상호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손이야 그가 훨씬 빨랐지만 누가 끝까지 물러나지 않느냐의 싸움이라서.
“항복, 항복. 네가 위에 해.”
세희가 키득거리며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상호의 내공 주입이 끝날 때까지, 둘은 그렇게 손을 잡고 1교시를 고스란히 보냈다.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힘차게
“늘 말하지만 전투의 기본은 강도와 간격이다.”
상호는 지윤과 세희를 쳐다보았다.
셋은 방과후의 텅 빈 운동장에서 따로 수업을 하는 중이었다. 세희의 턱에서 땀이 한 방울 떨어졌다.
“으…….”
“간격을 조절하려면 체술, 보법, 경공이 필수지. 체술과 보법은 대략 가르쳤으니까…… 이제는 경공을 배울 차례야.”
두 아이는 운동장에 박힌 길다란 장대 위에서 한쪽 발로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는 장대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으아악! 쌤! 그러다 떨어집니더!”
“떨어지면 혼난다. 계속 버텨.”
평소보다 엄한 목소리에 지윤은 기를 쓰고 자세를 유지했다.
“끙…….”
“경공을 배우고 나면 몸이 엄청 가볍게 느껴질 거야. 내공이 고강해지면 정말로 가볍게 만들 수도 있고.”
내공을 이용해서 몸을 누르는 것이 천근추의 수법. 그걸 반대로 응용하면 몸을 내공으로 들어올려서 가볍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질량이 줄어드는 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허공을 걷고 물 위를 달리는 일이 가능했다.
“그렇게 몸이 가벼워지고 나면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져. 힘은 센데 몸은 깃털처럼 가벼우니까. 그래서 경공을 배우려면 균형감각이 필수야. 잔근육을 이용해서 세밀하게 중심을 잡는 능력이 필요하단 뜻이야.”
상호는 다시 장대를 흔들었다.
“읏……!”
세희도 기우뚱거리며 비틀거리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대를 후려쳤다.
“됐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확인하자.”
“으악!”
“꺅!”
장대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휘영청 구부러졌다. 세희와 지윤은 허둥대다가 결국은 떨어지고 말았다.
둘은 허공섭물에 붙들려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바닥에 발이 닿자 세희가 시무룩한 얼굴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실패예요?”
“아니. 방금 건 궁금해서. 너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거든.”
상호는 둘에게 손짓해서 가까이 오도록 했다.
“사실 경공이란 건 별 거 없어. 걷고 뛸 때 쓰는 모든 근육에 기를 담을 수 있다면 그게 경공이야. 나중에는 발바닥에서 기를 내뿜고 몸을 들어올리는 수법이 필요해지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니까 넘어가자. 하여튼 경공은 그 자체로도 쓸모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보법과의 연계야. 막말로 경공은 내공만 많으면 연습 안 해도 얼마든지 상승의 경지로 올라갈 수 있다.
결국은 복잡한 보법을 사용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일 뿐이야.”
“경공만 연습하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 경공을 쓰면서 보법을 연습하라……
는 말씀이죠?”
“그렇지. 말 나온 김에 경공의 경지를 좀 정리해야겠다.”
그가 물구나무를 서자 아이들은 당황하면서도 똑바로 집중했다.
상호는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체면은 좀 구겨도 애들은 가르쳐야 했다.
“지금 나는 제일 기초적인 경공을 쓰는 중이야. 근육을 강화시키는 단계지.
지윤아, 나 들어 봐.”
지윤이 다가와서 그의 말대로 허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진짜로 들릴 줄은 몰랐는데 힘이 워낙 셌다. 그래도 설명하는 데엔 지장이 없었다.
“무겁지?”
“네.”
“이런 식이야. 기초 경공은 실제로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게 아니라, 몸이 가볍다고 느껴질 정도로 근육을 강화시키는 것뿐이야. 하지만 경지가 올라가면 이렇게 된다.”
지윤은 갑자기 상호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진짜 깃털 같네예.”
“이게 내공으로 몸 안쪽에서만 돌리는 게 아니라, 몸 바깥쪽으로 꺼내서 몸을 들어올리는 경지야. 이게 한 단계 더 올라가면…… 지윤아, 이제 놔 봐.”
그녀가 손을 놓고 물러서도 상호는 공중에 떠 있었다.
“이렇게 공중에 뜨지. 또 한 단계 더 올라가면…….”
그의 몸이 위로 쭉 솟구쳐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상호는 몸을 돌려 오른발로 착지하며 설명을 마쳤다.
“도약도 할 수 있게 돼. 정리하면,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경지, 몸이 실제로 가벼워지는 경지, 허공에 뜨는 경지, 허공에서 도약하는 경지. 이렇게 네 가지가 되는 거지.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면 그 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동력이 생겨. 운용할 수 있는 보법도 무궁무진해진다.”
아이들 입장에선 차력쇼였을 텐데, 세희도 지윤도 별로 신기해하진 않는 눈치였다. 은근히 반응을 기대하고 있던 상호는 머쓱해서 뒷목을 긁었다.
“별로 재미없지? 다리가 멀쩡했으면 이것저것 많이 보여줬을 텐데…….”
“재미라기보단…… 어차피 쌤한텐 기본일 거 아닙니꺼.”
“선생님께는 당연한 거잖아요.”
그 말이 맞긴 했다. 둘 다 그의 출신을 알고 있으니까 놀랍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지윤이 짝짝짝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마, 박수치라, 세희야.”
세희도 뻔뻔한 무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말 그대로 엎드려 박수 받기. 상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만 쳐, 그만.”
짝짝짝.
“그만…….”
짝짝짝짝짝.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아이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서 해맑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박수만 칠 뿐이었다. 상호는 쪽팔려서 얼굴을 붉혔다.
‘아이씨, 애들 앞에선 계속 무심한 척 해야겠다…….’
그는 한숨을 쉬고 경공 수업을 계속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