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501)

***

세족식은 무사히 끝났다. 발을 씻겨지는 세희에게 태화가 다른 반 대야를 들고 와서 또 물을 끼얹긴 했지만.

이후에는 해련의 훈화가 예정되어 있었다.

상호는 교탁 앞에 서서 교실 앞에 놓인 벽걸이 TV를 켰다.

‘이거 하고 나면 종례인가. 채널이 몇 번이더라…….’

채널을 맞추자 해련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마이크의 위치를 조정하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교장 이해련입니다. 짧게 말하고 끝내겠습니다. 선생님들도 집중해 주세요.]

상호는 뒤돌아서서 TV를 마주했다.

뒤쪽에서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이들이 조용히 가방을 여는 소리를 듣고 해련이 왜 선생들에게 집중하라고 했는지 알아차렸다.

‘교장선생님이 학생들한테 시켰나 보구만. 에이, 어지간히 팔푼이가 아닌 이상 속을 리가…….’

마법사, 주술사, 신앙인이라면 모르겠지만 무예가라면 A급 정도만 되어도 이런 이벤트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물론 선생이라면 모른 척 해야겠지만.

그래서 그는 TV만 보았다.

[스승의 날은 스승을 위한 날이죠. 그래서 스승의 날이고, 제자의 날과 학생의 날은 따로 있지요. 하지만 스승의 날을 만들어 준 건 학생들이었어요.

1958년에 한 여고에 다니던 학생들이 5월 8일에 아프거나 퇴직한 스승들을 찾아가 위문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날짜가 바뀌어 지금의 스승의 날이 된 거예요.]

상호의 뒤에서 아이들이 살금살금 다가왔다.

[스승의 날은 제자가 만들어서 이처럼 큰 행사까지 열리는 특별한 날이 됐는데도, 제자의 날이나 학생의 날은 어른들이 이름만 지어주고 구색만 갖췄을 뿐, 실상은 아무것도 안 해주죠. 스승은 제자한테 감사할 줄 알아야 해요.]

해련이 양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세족식을 했어요. 제자의 발을 씻기면서 오늘 받을 감사를 미리 갚으라는 의미로. 물론 제자들에게 발이 씻겨진 선생도 있지만…… 그건 그 선생이 평소에 얼마나 잘 했는지 알려주는 증거겠죠. 흠, 슬슬 됐으려나?]

그녀가 박수를 짝 치며 씩 웃었다.

[짠!]

“짠!”

해련과 함께 아이들이 소리쳤다. 동시에 TV가 꺼졌다.

상호가 뒤를 돌아보자 나빛이 웬 종이를 내밀었다.

“상장!”

그녀가 방실방실 웃었다.

“위 교사는 학생을 가르침에 있어 몸과 마음을 다함이 여실히 증명되었으므로 이 상장을 수여함! 반 대표 천세…… 어라?”

명랑하게 상장을 읽어나가던 나빛은 맨 밑에 수여자를 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는 세희를 돌아보았다.

“왜 세희야……? 교장선생님한텐 내가 갔다왔는데…….”

“내가 출석 1번이니까.”

세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옆에서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이씨고 네가 천씬데 왜 네가 1등이야?”

“네가 신청서 늦게 냈겠지.”

“마, 태화야, 걱정 마라. 오려버리면 된다 아이가.”

지윤이 세희의 칼을 뺏으려 했다. 세희는 눈을 부라리며 칼을 껴안았다.

“뭘 오려! 빨리 드려.”

“힝…….”

상호는 나빛이 건넨 상장을 받아들며 씩 웃었다.

굳이 따지자면 상장을 만든 건 해련이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이 주는 거니까.

“고마워.”

“아, 이것도.”

세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오늘 하루 달고 다니세요.”

카네이션이었다.

아래에 달린 리본의 두 끄트머리에는 각각 천세희와 이태화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본 지윤과 나빛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 가시나들 지들만 썼네.”

“우리는 왜 없어……?”

“우리 둘이 샀으니까.”

태화가 세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킥킥거렸다.

“니들은 저번 주에 엄마아빠한테 줬잖아. 그래서 우린 오늘 쌤한테 주는 거야.”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

그 말이 더 의미가 있는 아이들. 상호는 카네이션을 받아들고 두 아이의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맙다, 둘 다.”

그는 꽃을 가슴에 달았다.

태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세희 넌 상장에 적혀 있잖아. 니 이름은 뺄게.”

그리고는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검지를 들어 천세희라고 적힌 끈을 꾹 눌러서 태워버렸다.

세희가 분통을 터트렸다.

“야아아아!”

“메롱~.”

상호는 교실에서 펼쳐지는 2차 추격전을 지켜보며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리본뿐만이 아니라 옷까지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다.

‘분명 선물을 받았는데 돈을 더 쓰게 생겼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잿가루를 털었다.

더운 날

5월 말.

여름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덥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가만히 서 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었지만, 정오 즈음이 되면 따사로운 햇살이 땅을 은근히 달궜다.

하지만 죽어라 뛰고 구르는 아이들에게는 이미 여름이나 다름없었다.

“아이고…….”

지윤이 손을 부채처럼 파닥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땀을 흘리는 걸 좋아하는 그녀도 공기가 더운 건 참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옆에 앉은 다른 아이들도 상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방금 전 야외수업을 하고 돌아온 탓이었다.

상호는 아이들의 하얀 하복이 땀에 푹 젖어드는 걸 보며 당황했다.

“많이 더워?”

“네.”

“에어컨 언제 틀어요?”

“에어컨은 6월에 틀어줄 건데…….“

교실 천장에선 이미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했다.

그는 태화에게 물었다.

“얼음 마법은 없어?”

“안 배웠어요.”

“하나도 몰라?”

“비슷한 거 있긴 한데…….”

태화가 자신없어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곧 마나가 살짝 움직이며 교실 한가운데에 검은 결정으로 만들어진 창이 떨어졌다.

“안 차가워서 문제예요.”

악마의 마법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는 바스라지며 다시 마나로 돌아가는 결정창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지. 조금만 참아.”

“쌤요. 저 쫌만 벗으면 안됩니꺼?”

지윤이 교복 앞섶을 잡고 들썩거리며 바람을 넣었다. 안쪽에 회색 옷이 보였다.

“그래. 더우면 벗어.”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윤이 기다렸다는 듯 단추를 풀었다.

“하이고, 이제야 살겄네.”

그녀는 평소 운동할 때처럼 배가 드러나는 민소매 윗옷을 입고 있었다. 교복을 벗던 태화가 지윤을 보며 눈을 퉁방울만하게 떴다.

“너 그거 브라 아냐?”

“뭐 어떻드나. 운동할 때 입는 긴데.”

“아이씨, 나도 담엔 그거 입고 와야겠다. 벗고 다니게…….”

상호의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렸다. 지금 막지 않으면 또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급히 덧붙였다.

“오늘만이야. 어차피 6월 별로 안 남았잖아. 내일부턴 다시 교복 똑바로 입어.”

“내일도 야외수업 많잖아요~.”

“갈수록 더 더워질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상호는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내일부턴 제대로 입어.”

“힝……, 네.”

태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고, 지윤은 더위 먹은 개처럼 혀를 내밀었다.

하지만 제일 안절부절못해 하는 건 세희였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참을성 많은 세희가 저렇게 힘들어하다니.

‘세희가 더위를 많이 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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