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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선은 다시는 태화를 찾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상호의 구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목적을 달성한 상호는 트렁크를 끌고 현관문을 나왔다.
‘이제 학교엔 안 오겠지. 오면 끝장을 보는 거고…….’
빌라를 나서는 걸음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가 중선을 흠씬 두들겨 패도 태화의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차에 도착해 조수석에 앉아있는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는 뒤집어 벗은 고무장갑을 앞치마 위에 놓은 채로, 멍하니 먼 곳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멍들지 않은 오른쪽 눈으로만.
상호가 뒷좌석 문을 열고 트렁크를 넣자 그때서야 그녀도 상호가 온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그가 운전석에 앉아도 태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쉬고 싶나 보네.’
상호는 허공섭물로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 태화가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요.”
둘 다 가만히 앞만 바라보았다.
캄캄한 도로, 굽이굽이 꼬인 길목들을.
상호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꿈?”
“그냥, 주말에 가족끼리 외식도 하고.”
태화는 고무장갑을 문질거렸다.
“특별한 날엔 선물도 받고. 쌤이 가정방문도 오고…….”
말을 할수록 태화의 고개는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고운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나, 나도, 남들한테 자랑할 수 있는 부모가, 있었으면, 해서…….”
상호는 조용히 안대를 벗었다.
“그런 꿈을 꿨는데…… 꿔 버렸는데.”
태화가 딸꾹질을 하면서 키득거렸다.
“될 리가 없죠. 나는 안 되나 봐요…….”
상호는 손을 뻗어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이거 써.”
방향이 달라서 한 번 뒤집어야 했다. 상호는 뒤집은 안대를 태화의 왼쪽 눈에 씌워주었다.
안대를 쓴 태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호의 오른쪽 눈을 쳐다보았다.
세로로 난 흉터와 혼탁해진 눈동자. 그걸 본 그녀의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갔다.
“쌤 엄청 나쁜 남자처럼 생겼어요.”
“칭찬이야?”
“네.”
상호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네?”
“가족이랑 외식하고 싶었다면서.”
그는 엄지로 스스로를 슬쩍 가리켰다.
“둘이서만 가자.”
“……아.”
태화가 손뼉을 쳤다.
“저 그럼 먹고 싶은 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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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양꼬치를 내려다보았다.
“먹고 싶다는 게 이거야?”
“네.”
늦은 밤, 어린 여자아이와 단둘이 양꼬치집에 오니 남들의 시선이 자꾸 달라붙었다. 하지만 상호의 흉터와 검 때문에 아무도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했다.
안대를 벗기 전에도 험악한 데가 있었지만, 벗고 나니 더욱 그랬다.
그의 안대를 쓴 태화의 앞에는 마파두부와 고추잡채, 꽃빵, 가지튀김도 놓여 있었다. 그녀가 양꼬치 하나를 집어 뜯었다.
“한 번도 못 먹어봤어요. 비싸기도 하고, 애들끼린 오기 힘드니까.”
“그래. 많이 먹어.”
“그런데…….”
태화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눈웃음을 쳤다.
“양꼬치는 꼭 술이랑 같이 먹으라던데요.”
“야이씨…….”
상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오늘 그런 일이 있었는데 술은 무슨 놈의 술.
“너는 그런 말이 나와? 내가 사줄 것 같아?”
“딱 반의 반 잔만요. 맛이 궁금해서 그래요.”
태화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술을 쌤 아니면 누구한테 배워요? 그리고 쌤 앞이 아니면 어디에서 마셔요?”
“어른 되면 마셔.”
“소원권.”
상호는 말문이 막혔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진짜 몇 방울만 줄 거야. 이모, 여기 새벽이슬 하나.”
직원이 소주와 잔을 가져오자 태화가 잔을 들어 내밀었다.
상호는 소주 뚜껑을 따며 그녀가 한 손으로 잔을 든 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른한텐 다른 손으로 받쳐서 내밀어야 해.”
태화가 그 말대로 하자 그는 술을 따르며 덧붙였다.
“근데 나한텐 안 그래도 돼.”
작은 소주잔의 반의 반의 반 잔.
진짜로 맛만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태화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잔을 내려다보았다.
“소원권까지 썼는데 너무 적은 거 아녜요?”
“그럼 먹지 마.”
“쌤은 안 마셔요? 건배 해볼래요.”
“난 운전해야지.”
몸에 내공 한 번 싹 돌리면 만독불침까진 아니어도 술기운 정도는 몰아낼 수 있었지만, 애 앞에서 그럴 순 없었다. 상호는 물컵을 들었다.
“이걸로 해. 건배.”
“건배사 제가 해도 돼요?”
“해 봐.”
“선제사격!”
“그게 뭔데?”
태화가 잔을 부딪히며 씩 웃었다.
“선생과 제자의 사랑이 격렬…….”
“너 잔 내놔.”
“잇힝~.”
그녀는 혀로 똑 소리를 내며 잔을 꺾어 술을 마셨다. 마셨다기보다는 혀에 묻혔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상호는 양꼬치를 들며 물었다.
“어때? 생각했던 맛이야?”
태화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써요.”
“당연히 쓰지.”
“달다고 들었는데…….”
“쓴 맛에 익숙해지면 살짝 나긴 나. 단맛이.”
“쓰기만 해요.”
그녀의 눈이 점점 젖어들었다.
“이게 좋다면서…… 그렇게들 마시는 거예요?”
상호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태화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대체 뭐라고…….”
“그러게 말이다.”
그는 맞장구를 치며 태화의 접시에 다 익은 양꼬치를 덜어주었다.
태화는 코를 훌쩍이며 그가 주는 고기를 덥석덥석 받아먹었다.
‘잘 먹네.’
상호는 손을 들며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이모, 여기 마라탕도 하나.”
***
밤이 많이 늦었다. 사감 선생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학교에 돌아온 상호는 뒷자리에서 트렁크를 꺼내고 태화에게 말했다.
“순간이동으로 조용히 들어가.”
“네.”
태화는 트렁크를 끌며 이화관 가까이로 가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왜?”
“안대는 언제 드리면 돼요?”
“너 나을 때까지 써.”
“이거 혹시 귀한 거예요?”
그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기웃했다.
“아니, 안대는 딱히 소중하거나 한 건 아닌데. 너 가지고 싶으면 가져. 난 따로 사지 뭐.”
“그런 건 아니구요.”
태화는 혀를 쏙 빼물었다.
“내일 봐요, 쌤.”
그리고는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상호는 이화관 한쪽 방의 창문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다 하품을 했다.
‘어우, 오늘은 뭔 학부모 공개수업도 하고, 학부모 비밀수업도 하고…… 피곤해 죽겠네. 빨리 자야겠다.’
그리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남교사 숙소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