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501)

***

오후의 정상 수업도 끝나고, 종례도 마쳤다.

상호는 문을 나서는 태화를 불렀다.

“태화야, 잠깐만.”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상호는 다른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교실 문을 닫았다. 태화가 문에 기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집 안 가는 게 낫지 않아?”

그는 태화와 눈을 마주쳤다.

“너 아무리 봐도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질 않아서 그래. 그냥 기숙사로 돌아와.”

“……좀 더.”

태화는 방긋 웃었다.

“조금만 더 해보고요.”

또 웃는다. 상호는 답답해서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러다가 그녀가 다시는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그런데도 그것이 그녀의 선택이라서, 노력이라서.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알았다. 가도 돼.”

그는 교실 문을 열어주었다.

“조심해서 가.”

“네.”

태화는 눈웃음을 치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상호의 시선은 그녀의 등에 박혀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

그날 밤.

10시를 넘으면 학교는 조용해진다. 학생들의 통금 시간이기도 했고, 교사들도 그 때쯤에는 숙소에 들어가 쉬었다.

그렇게 조용한 밤중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씻고 나와서 침대에 누워 쉬던 상호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았다.

태화에게서 문자가 몇 통 와 있었다.

-쌤

-쌤

-쌤

첫 문자는 30분 전이었다. 그가 씻고 있을 때 온 모양이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답장을 보냈다.

-미안해, 태화야. 이제 봤어.

그 직후에 태화의 문자가 도착했다.

-보고싶어요

상호는 잠시 그 문자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옷을 챙겼다.

방금 씻고 나온 참이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태화는 평소에도 그에게 실없는 말을 자주 했지만, 오늘 본 중선의 눈빛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는 검을 집어들고 문을 나서며 태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통화는 금방 연결됐다.

“태화야, 어디야?”

대답이 바로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상호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큰일이 난 건 아닐지.

곧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태화가 웅얼거렸다.

[집…… 집 앞이요.]

“집? 이사 간 집 말하는 거지? 거기가 어디야?”

[영치동 장광빌라요…….]

“금방 간다.”

상호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

태화가 말한 주소에 도착한 상호는 차에서 내려 건물로 다가갔다.

가로등도 별로 없는 거리의 어둠 속, 건물 입구에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머리에 뿔이 달린 소녀의 그림자.

상호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자 그녀도 그를 향해 다가왔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쌔애앰…….”

태화가 빛이 닿는 곳까지 나오자 상호는 당황했다. 허리에 두른 분홍색 앞치 마와 손에 낀 빨간 고무장갑 때문에.

태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뭐야, 설거지하다가 나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하던 말을 끊고 욕을 내뱉었다.

“……이 씨발, 그거 뭐야.”

태화의 왼쪽 눈에 새까만 멍이 들어 있었다.

상호는 이를 갈며 태화에게 다가가 그녀의 앞머리를 쓸어올려 눈의 상태를 확인했다. 퉁퉁 부어서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대충 휘두르다 스친 게 아니라 아예 노리고 꽂아버린 거다.

그의 속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아빠가 때렸어? 아니 바보야, 헌터가 일반인 공격을 왜 못 피해!”

상호는 너무 답답해서 그녀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화를 냈다. 하지만 손으로는 연신 태화의 멍 주변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태화가 울먹이면서도 웃었다.

“진짜로 또 때리는지 궁금해서요.”

“바보야, 아니…… 하아……. 궁금할 게 따로 있지…….”

상호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학교 가자. 넌 더 이상 여기 있으면 안 돼.”

“짐이 다 집에 있어요…….”

“순간이동으로 가져오면 되잖아.”

“그 인간도 그거 알아서…… 지키고 있을 거예요.”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태화에게 중선을 또 대면시킬 수는 없다. 상호는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 그녀의 팔을 놓았다.

피가 거꾸로 솟아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차에 타. 내가 가져올게.”

그는 몸을 돌려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대

제일 먼저 보인 건 바닥을 구르는 소주병이었다.

문고리를 힘으로 부숴버리고 들어온 상호는 그 초록색 유리병을 보자마자 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간암이라는 새끼가…….’

중선이 나빛의 가족을 보고 열등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래도 막상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로 안에 들어섰다.

현관에서 주방과 거실이 바로 보이는 작은 집이었다. 주방 바닥에는 깨진 접시 파편이 흩뿌려져 있었고, 거실에는 소주 대여섯 병이 놓인 탁자가 보였다.

그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에, 한 남자가 기대어 앉아 소주를 병째로 꿀꺽꿀꺽 들이키고 있었다.

상호는 눈을 감았다.

‘민간인 때리지 마라.’

기억 속 저편에서 늙은이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다시 눈을 뜨고 그 작은 방으로 걸어갔다. 거기가 태화의 방일 터였다.

중선은 그때서야 상호가 집에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붉은 얼굴을 들어 상호를 노려보았다.

“뭐야, 이 새끼. 남의 집에 어떻게…….”

그러다가 상호가 짚고 있는 검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상호는 중선을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 옆에 태화가 끌고 갔던 트렁크 가방이 보였다. 그는 그 트렁크를 열어 옷장에 있는 옷과 방에 있는 잡다한 물건들을 싹 쓸어담았다.

뒤에서 중선의 발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고 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들어먹을 리가 없지.”

소주병이 상호의 뒤통수를 때리고, 초록색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지만 그 중에 상호의 피가 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중선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엇……?!”

“아내 말도 안 듣고, 딸 말도 안 듣는데, 다른 놈 말을 들을 리가 있나. 말을 하는 게 시간 낭비야.”

상호는 태화의 옷에 묻은 유리 조각을 방바닥에 털어냈다. 남는 것이 없도록 정성스럽게.

“그렇지만 특별히…… 아가리로 가르쳐 주지. 그게 내 직업이니까.”

그는 몸을 돌리자마자 중선의 아구창에 주먹을 날렸다.

뻐억

“크헉!”

입을 제대로 얻어맞은 중선이 비틀거리다가 문지방 위로 넘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깨진 소주병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내공은 한 자락도 싣지 않았지만 근육으로는 전력을 다해 날린 것이었다.

상호는 트렁크를 닫고 현관을 향해 던져 놓았다.

“군인은 민간인을 때리면 안 된다. 헌터는 일반인에게 마나를 쓰면 안 된다.

내가 존경하는 두 사람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준 말이다. 그렇지만……

맞고 살으라는 말은 한 적이 없어.”

먼저 당했으니까 이제 정당방위다.

그가 한 손으로 중선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리자 중선이 발을 버둥거렸다.

“끅……!”

“당신 딸이 그런 말을 했었어. 애만 낳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거냐고. 아니야. 어른이 지켜야 할 미덕이 있지. 그 중 하나가 존중이야. 겸손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

상호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어른이라면…… 상대가 아무리 못나 보여도, 사실은 나보다 강할 수도 있다고, 나보다 훌륭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그런 생각을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고 살아야지. 당신처럼 내키는 대로 힘을 쓰는 사람은…… 그런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사는 거야. 실제로 태화는 당신보다 강해.”

그의 주먹이 중선의 왼쪽 눈에 틀어박혔다. 태화의 멍이 있는 자리였다.

중선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눈을 부여잡고 상호에게 발길질을 했지만, 바위를 때리는 듯이 자기 발만 아플 뿐이었다.

“컥……!”

“태화도 알고 물었을 거야. 어른이라는 말이 뭘 뜻하는 건지. 당신보다 훨씬 잘 알고 있는 거지. 당신보다 강하고, 당신보다 똑똑하다고. 그런 딸을 만나 놓고 씨발!”

상호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중선을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퍼억

땅에 등을 부딪힌 중선은 숨을 다 토해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채로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런 그를 향해 상호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이 없다느니, 다른 집이 운이 좋은 거라느니. 그런 소리를 해?”

“끄으……으으…….”

“당신이 똑바로 살기만 했어도…… 간암만 안 걸리고, 태화를 때리지만 않았다면, 태화가 훌륭하게 자라서 당신 돌봐줬을 거야. 그런데 그걸 걷어차 놓고 운이 없어? 이런 씨팔놈의…….”

상호는 더 말을 이으려다가 중선이 킬킬거리는 것을 보고 입을 닫았다.

중선은 웃음을 멈추고 충혈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랄…… 어린 놈의 새끼가 뭘 안다고 지껄여.”

상호는 잠시 그의 말을 들었다.

중선의 양손이 덜덜 떨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여자한테 배신당하고, 하나 남은 가족은 속만 박박 긁어대고……. 간신히 버티려 해도 한 순간에 세상이 박살이 나고. 그런 인생을 너 같은 어린 새끼가 살아 봤냐? 살아 봤느냐고.”

“아내가 도망친 건 니 잘못이고 씨발아.”

그는 검집으로 중선을 후드려 팼다.

“억! 컥!”

“이따구로 할 거면 애는 왜 다시 부른 거야? 설마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는 샌드백이 필요해서? 대답 잘해, 새끼야. 뒈질 수도 있으니까.”

“크윽……!”

“대답 못 하지. 패배자 술벌레 새끼…….”

상호는 검집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니 입에서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어. 지금까지 때린 이유가 그거야. 그 한 마디만 하면 나도 이제 이 짓 그만하고 간다.”

“크윽…… 죄…… 씨발…….”

“아니야 병신아. 다른 거야. 술 끊겠다느니 딸 안 때리겠다느니 그런 건실한 대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야. 니가 그럴 리가 없잖아.”

“모, 모르겠…… 끄윽!”

“모르면 맞아야지.”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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