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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가 중선의 집에 간 지 사흘째가 되는 날의 아침이었다. 상호는 교무실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제까지의 분위기를 보니 태화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즘들어 표정을 많이 숨기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힘들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옆에서 설미가 그를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상호 씨 준비 다 했어? 누구누구 오시는지 알아? 주차 어디 하는지 말씀은 드렸어?”
“네. 저는 몇 명 없잖아요. 진작 다 했죠.”
오늘은 학부모 공개수업일. 아침부터 교사들은 수업 준비를 하고 학부모들을 신경쓰느라 바빴다.
설미가 부러워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좋겠다……. 그래서 몇 분 오셔?”
“일단 두 명이요. 아이 한 명 부모님.”
확실히 오겠다고 한 것은 봉진과 유연 둘뿐이었다.
지윤의 어머니는 장사 때문에 바쁘다며 오지 못했다. 그리고 중선에겐 어제가 되어서야 겨우 알렸는데 아직까지 대답이 없었다.
‘오긴 할까……?’
오면 오는 대로 골치가 아플 것 같았지만, 태화가 중선을 다시 아버지로 받아 들였다면 그에게 말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고민으로 속을 썩이는데 갑자기 설미가 울먹이며 멱살을 잡았다.
“이 월급 도둑! 나는 80명 앞에서 수업하게 생겼는데……!”
“진정해요, 선생님…….”
“나 어떡해? 도망치고 싶어……. 우리 같이 도망칠까? 응?”
“선생님은 작년에도 했잖아요.”
“작년엔 나도 초임이라 1학년 열몇 명밖에 없었단 말이야……. 그땐 할만했는데, 흐윽…….”
“에이, 뭘 또 울라 그래요. 틈만 나면 어른 행세해 놓고는……. 뚝 그쳐요, 뚝.”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설미를 달랬다.
***
교실에 도착해 보니 아이들은 아침 일찍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상호는 교탁 앞에 섰다.
나빛은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고, 지윤과 세희는 눈빛이 반짝이는 것이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필시 친구들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것이 리라.
태화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쌤. 저희는 누구누구네 온대요?”
“오겠다고 하신 건 나빛이네 부모님 두 분. 지윤이네 어머님은 바빠서 못 오시고, 태화네 아버님은…… 답장이 없으시네. 내가 너무 늦게 알려드리긴 했어.”
“아마 안 올걸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교과서를 교탁에 올렸다.
딱히 특별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평소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사실 전투를 제외한 나머지 수업들은 수준이 깊지 않아서 준비를 하고 싶어도 할 게 없었다.
“수업 하다 보면 알아서 오실 거야. 너희는 신경쓰지 말고 그냥 수업 들어.”
“네.”
아이들도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상호는 교과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하필이면 가정 수업이네.’
“자. 76쪽. 가족의 문제와 해결.”
그렇게 1교시를 시작하자마자 뒷문이 살짝 열리고 두 사람이 조용히 들어왔다. 유연과 봉진이었다. 둘 다 눈에 튀지 않는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다.
상호는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 수업을 이어나갔다.
“사람은 누구나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하는 때가 온다.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세도, 시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가 없지. 때로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법칙을 무시하고 세상이 완전히 뒤집혀 버리기도 하고.”
괴물이 쳐들어오고 마법이 생길 줄 누가 알았으랴. 그 사실은 여기 있는 모두가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살고…….”
대다수란 표현은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었지만, 상호는 세희와 태화를 위해 덧붙였다.
“……이 때문에 문제의 위험성은 배가 된다. 가족에 속한 개인의 문제는 가족 내 다른 구성원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야.”
그 때 뒷문이 또 열렸다.
누가 또 올 줄은 몰랐다. 상호는 중선이 교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살짝 놀랐다.
뒤를 흘끗한 아이들도 덩달아 놀랐지만, 아이들도 상호도 티를 내지 않고 금방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건강한 가족에게 문제가 발생한다면 서로 도와서 혼자일 때보다 훨씬 쉽게 해결해 나가지만, 건강하지 못한 가족에게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가족은 문제에 부담을 느끼고 또다른 문제를 만들게 된다. 그러면 그 문제가 또 문제를 낳고. 결국에는 수많은 문제가 생겨서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거지.”
상호의 눈동자는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실제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중선의 표정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감당할 수 없는 문제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까지 문제를 전이시키는 건 잘못된 거야. 없던 문제를 만들어서 가족을 힘들게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 사람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 자체는 안타깝지만, 가족에게 잘하냐 못하냐는 별개인 거지.”
중선은 놀랄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무엇이 건강한 가족을 만드느냐. 이게 오늘 핵심이다. 뭘까? 나빛이가 대답해 봐.”
“어, 음…….”
나빛은 교과서를 쭉 살피고 대답했다.
“신뢰, 존중, 노력이요.”
“그래. 가족은 결국 조직이고, 조직에선 그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미덕이야.
신뢰의 구체적인 예도 나빛이가 들어 보자.”
아이들에게 한 가지씩 발표를 시키려는 심산이었지만, 세희에게는 묻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빛에게 한 번 더 물었다.
나빛은 떠듬거리는 듯하다가도 또박또박 잘 대답했다.
“제 옷에서 담배 냄새가 나도…… 안 피웠을 거라고 아빠가 믿어 주시는 거요.”
예시가 어째 구체적이다. 상호는 나빛이 주말마다 효은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당황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듯했다.
“……그래. 그런 거지. 존중의 예는 지윤이가 말해 줘.”
“지가 가끔 친구들이랑 노는 날에는 어무이가 장사 일찍 끝내고 동생들 보러 왔심더.”
“그래. 양보가 존중이니까. 마지막 노력은 태화가 답해 봐.”
태화는 입은 열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닫고, 다시 입을 열고, 그러다가도 대답을 하지 못해 우물거리기만 하다가, 결국은 웃었다.
“모르겠어요.”
상호는 처음으로 눈을 들어 중선과 시선을 마주쳤다.
중선은 석상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는 얼굴으로 상호만 쳐다보았다. 딸이 안중에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럴 수 있지.”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셋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게 노력이니까. 가족이 알 수 있을 만큼 노력하긴 참 힘든 일이다. 누구나 나름의 노력을 하는데도…… 많이들 그걸 모르고 오해 하고 싸우곤 해.”
지윤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렇지만 노력을 끊어버린 사람도 분명 있는 법이지. 그런 사람은 사는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고, 원하는 걸 가질 수도 없는 사람이야.”
그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는 그렇게 되지 마라.”
“네.”
태화가 제일 크게 대답했다.
아주 잠깐 동안 중선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상호는 그때서야 비로소 중 선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볼 수 있었다.
예상 외의 눈빛이었다.
원한도 아니고, 애증도 아니다.
딸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상호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타인을 못 보는 인간이다. 눈을 떠도 자기 세상밖에 안 보이는…….’
태화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덤으로 그녀의 어머니도.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칠판으로 돌아섰다.
“자, 77쪽에 나오는 회복탄력성을 읽어보면…….”
멍
쉬는 시간이 되어도 부모에게 향하는 아이는 한 명 뿐이었다.
나빛은 조용히 일어나서 봉진과 유연에게 걸어갔다.
봉진도 나빛에게 다른 아이들의 사정을 들었는지, 방정맞게 칭찬이나 애정표현을 하진 않았다.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그런 나빛의 가족을 쳐다보았고, 상호는 그런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눈빛에 동경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나.’
허나 나빛의 가족을 주시하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상호의 시선이 중 선을 향했다.
중선도 아이들과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눈빛 또한 아이들과 닮았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과, 가질 수 없음에 의한 절망이.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행복한 가정을 원해도…… 그게 스스로만을 위한 거라면 당연히 될 리가 없지.’
가족을 자기 부속품으로 아는 인간.
아내는 장식품이고, 아이는 애완동물.
그런 식으로 살 거면 속이기라도 잘 해야지, 그것도 못해서 밑천 다 까발려지고 이제 와서 주워 담으려 한다.
“자. 이제 야외수업 하러 가자.”
상호의 말에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나가고 나빛의 부모가 나가고, 그러는 동안에도 중선은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호는 그를 향해 말했다.
“아버님도 가시죠.”
중선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서.”
‘남의 교실에서 뭔…….’
상호는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그리고 교실 문을 향해 걸었다.
돌아서기 직전에, 중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질투와 시기, 열등감이 한 가지 색깔로 합쳐진 채.
상호도 이해는 했다. 중선은 유달리 불행한 운명을 맞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욱 깊은 구렁텅이로 기어들어간 건 순전히 중선의 잘못이었다.
‘혼자 살았으니 혼자 해결해야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도와줬을 것을.’
상호는 혀를 차며 교실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