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따라 열심이네요.”
세희가 태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태화는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목각인형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뿔에서 쏘아진 광선이 목각인형의 발치를 타격했다.
꽈앙
인형이 그 충격파를 이용해 뛰어올라서 태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태화는 순간 이동으로 공격을 피했지만, 곧바로 따라온 인형에게 뒤를 잡혀 버렸다.
“윽……!”
그녀는 온몸을 비틀며 간신히 목각인형의 나무 주먹을 피해내고 꼬리로 검은 불꽃을 내뿜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상호의 옆에서 지윤이 말했다.
“엄청 집중했는갑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사기치네 뭐네 했을 것인디.”
“그러게…….”
나빛이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맞장구를 쳤다.
태화가 뭔가 달라졌다는 것은 아이들도 다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태화가 계속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아이들에게 말했다.
“잘 하고 있잖아. 여기서 수군거리면 방해된다. 너희도 보고 배워.”
그런데 갑자기 태화가 우뚝 멈춰섰다. 상호는 그녀를 향해 날아가던 인형의 주먹을 즉시 정지시켰다.
태화의 눈은 인형이 아니라 다른 곳에 붙박혀 있었다.
‘설마…….’
상호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본관 교무실 창문에 한 인영이 슬쩍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게 누구였는지는 태화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짜증과 분노, 공포가 한데 섞여 휘몰아쳤다.
‘……사실은 집중 못 하고 있었구나.’
목각인형이 태화의 코앞에서 박수를 짝 쳤다. 그녀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상호는 인형의 주먹을 가볍게 휘두르며 말했다.
“집중해. 또 한눈팔면 안 멈추고 때릴 거야.”
“……네.”
태화는 다시 순간이동으로 거리를 벌리고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붉은 눈동자가 또다시 본관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면 좋냐, 태화야…….’
***
그냥 가 줬으면 좋으련만.
결국 태화의 아버지는 진짜로 방과 후까지 기다렸다. 이쯤 되니 상호도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종례 때 세희와 지윤에게 태화 옆에 붙어 다니라고 부탁한 후 교무실로 돌아왔다.
태화의 아버지는 한쪽 구석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부외자를 향해 교사들의 시선이 몰려들었지만, 한나절 동안 있었으니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상호는 그 앞에 가서 섰다.
중년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수업은 끝났습니까?”
“예.”
“딸아이는?”
“기숙사 갔습니다.”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더 계셔 봤자 시간 낭비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아는 겁니까?”
“압니다. 창문 밖으로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태화도 봤습니다. 그런데도안 만나러 오는 겁니다.”
“기숙사는 어딥니까?”
“……아버님.”
상호의 목에 힘줄이 솟았다.
“태화는 이미 선택을 했습니다. 그걸 아버님이 돌려놓을 수는 없고, 애초에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건 전적으로 아버님 잘못입니다. 대체 뭔 짓을 했기에 그 착한 애가 이 지경이 됐습니까?”
언성이 올라가자 설미가 파티션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많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상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웃는 거 좋아하고 장난치는 거 좋아하는 아이가 아버님 이야기만 나오면 벙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아버님이 찾아올수록 태화는 힘들어한다고요. 만약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냥 조용히 떠나주시는 게, 그 아이를 위한 겁니다.”
태화의 아버지가 퀭한 눈으로 창문 밖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선생은 내 말을 들어주긴 하는군요.”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초연했다.
이 사람이 딸을 때리는 사람이 맞을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의문을 계속 들게 만들었다.
“내가 보여줄 게 있습니다. 혹시 집에 좀 같이 가줄 수 있습니까?”
상호는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뭔데 그러십니까?”
“보면 압니다. 여기서 말하기도 좀 그렇고, 직접 보지 않으면 안 믿을 것 같아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부녀간의 배경에 무슨 일들이 있는지 알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상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가 보죠.”
***
집은 작은 아파트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삿짐이 다 꾸려져 있었다. 그냥 들어서 옮기기만 하면 되도록. 좀 많이 허전한 것을 보면 이미 이사를 시작한 것 같기도 했다.
비닐로 싸인 소파에 앉은 상호의 앞에 태화의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상호는 그 종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뭡니까?”
대학병원 진단서.
이름에는 이중선이라고 적혀 있고, 나이에는 45세.
거기까지는 알아보겠는데 병명이 영어로 쓰여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간암이오.”
중선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호는 당황하며 물었다.
“어쩌다 그렇게……?”
“술에 빠져 살았으니까요. 개벽 때 회사가 망하고 인생이 망하고. 그래서 한참 마시기만 했습니다.”
“심각합니까?”
“길면 2년. 짧으면 반년.”
“……으음.”
시한부란 뜻인가.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요즘 같은 세상엔 그런 환자는 별로 없는데.
“성력 치료는요?”
“모르고 살았는데, 나한테도 악마의 인자가 있더군요. 개벽 때 같이 있어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악마는 성력 치료를 받지 못한다. 그때서야 상호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설마 이 집도…….”
“팔았습니다. 정리할 거 다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좀 편하게 살고 싶어서.”
“입원은 안 하십니까?”
“나는 이제 사는 의미가 없어요.”
중선은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더 살아 봤자 누릴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원하는 건 딸아이와의 관계회복이 답니다.”
사기를 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 말들이 사실이고 진심이라 해도, 판단은 태화가 하는 것이고 상호에겐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
그는 중선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그런 눈빛으로.
그러자 중선이 그의 손을 잡았다.
“좀 도와주십시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곧 죽을 사람 소원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거 다 필요 없으니까, 태화한테 잘 좀 말해주세요. 아버지하고 한 번만 이야기해 달라고. 그거면 됩니다.”
“직접 말하세요. 편지에 그렇게 썼으면 될 것 아닙니까.”
“딸한테는…… 최대한 비밀로 하고 싶습니다.”
중선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내가 평생 해준 게 하나도 없어서 이럽니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딸을 위한 마음이 지극해 보여도, 중선을 잘 아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태화였다. 그녀가 도망친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는 가만히 진단서를 내려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집 구경 좀 하면서 생각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중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검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태화 방이 어딥니까?”
“저쪽인데…… 지금은 다 정리해놔서 별 거 없습니다.”
그는 중선이 가리킨 방으로 들어갔다.
중선의 말대로 방은 휑했다. 아무런 용품도 없이 책상 하나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상당히 좁아서 바닥으로 남은 곳이 거의 없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그곳도 텅 비어 있었다. 아마 태화가 집을 나갈 때 다 정리했던 것이리라.
‘볼 게 없군.’
그는 밖으로 나와 다른 방으로 향했다.
“여기는 어딥니까?”
“서재입니다.”
서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책장과 책상 뿐.
방 한켠에 작은 벽장이 보였다. 상호는 중선이 거실에 앉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벽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 있었다.
동화책.
작은 지구본, 모빌, 인형.
사진첩.
‘먼지 봐라, 어우. 몇 년 동안 열지도 않았나 보네.”
방마다 깔끔하게 이삿짐을 싸 놨으면서 왜 여기는 치우지 않았을까. 다 정리 했다고까지 말했으면서.
아마 여기에 벽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아버지란 그런 생물이니까.
좋은 아버지도 자기 집에 대해서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은데, 술 먹고 딸패다가 간암까지 걸린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이 갔다.
‘그럼 여기는 태화네 어머니만 알고 쓰던 곳인가.’
상호는 사진첩을 집어들어 먼지를 털었다.
펼쳐보니 네다섯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방긋 웃고 있었다. 뿔도 꼬리도 없는 평범한 여자아이.
‘아……, 개벽 전이지, 참.’
어머니와 찍은 사진.
아버지와 찍은 사진.
혼자 찍은 사진. 다같이 찍은 사진.
다양한 인원이 다양한 장소에서 찍었지만, 하나같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태화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상호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사진을 몇 장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갖고 있을 것도 아니고 뭐. 나중에 태화한테 줘야지. 여기 놔둬 봤자 저 양반은 챙기지도 않을 것 같구만.’
덤으로 작은 인형도 하나 챙겨서 외투 안에 넣었다. 허공섭물로 잘 찌그러트린 상태로.
그는 매무새를 내려다보며 티가 안 나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중선이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은 끝났어요?”
“예.”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강하다.
스스로 판단하고, 힘으로 해결할 수도, 도망칠 수도 있다.
“말은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의 말에 중선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
상호는 곧바로 현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