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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아무런 문제 없이, 아이들에게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고, 물 흐르듯 평범한 날처럼 지나갔다. 지윤과 나빛에게만 살짝 귀띔해줬을 뿐.
허나 문제는 다음 날 일어났다.
“계십니까?”
누군가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칠판 앞에서 수업하던 상호는 교실 문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예, 누구십니까?”
“태화라는 아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상호와 태화는 눈을 마주치고 끔뻑거렸다.
“너 뭐 사고쳤냐?”
“사고는 쌤이랑 친 것밖에 없는데…….”
“야이씨……. 들어오세요.”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30대 정도 되어 보였다. 태화도 사내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의 손에는 편지봉투와 작은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상호는 사내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로……?”
“태화 학생이 누구죠?”
“전데요.”
태화가 손을 들자 사내가 상호에게 봉투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태화 학생한테 전해주라고 해서 왔습니다.”
“누가요?”
“아버님께서.”
태화의 얼굴에서 피가 썰물처럼 쫙 빠졌다.
다른 아이들도 사정을 대충 알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태화와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상호는 당황하며 일단 그 봉투와 상자를 받았다.
“일단 알겠습…….”
“받지 마요.”
태화가 붉은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뭐예요, 그게?”
사내는 곤란해하며 교실 문으로 향했다.
“나는 부탁만 받아서 잘 몰라요.”
“내가,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미안합니다. 그만 갈게요.”
그는 손사래를 치며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상호는 봉투와 상자를 든 채로 굳어 버렸다. 태화는 아버지한테 학대를 당한 걸로 아는데.
이 물건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태화가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자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하지만 태화는 말없이 상호의 손에 들린 봉투를 노려보았다.
상호는 그녀에게 다가가 봉투와 상자를 내밀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 둬.”
태화는 바로 봉투를 뜯어 편지를 확인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갈수록 태화의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마음이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았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그녀는 편지를 다 읽자마자 찢어 버렸다.
상자의 포장을 뜯어 보니 최신형 핸드폰이었다. 태화는 상자 속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살 돈은 또 어디서 났어? 보나마나 기둥서방질이나 했겠지…….”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교탁 앞으로 돌아왔다. 이런 분위기로 수업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태화야, 수업…… 해도 괜찮아?”
“네.”
태화는 얼굴색을 싹 바꾸고 웃었다.
“신경쓰지 마세요.”
하지만 그 눈에 총알보다 빠르게 스쳐지나간 증오를, 상호는 놓치지 않았다.
***
방과 후.
상호는 태화와 둘만 남았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야 뻔했으리라. 태화는 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앞에 마주앉은 상호는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태화야.”
“네.”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
“쌤은 몰라도 돼요.”
태화가 빙긋 웃었다.
“쌤이 제 가족은 아니잖아요.”
선을 긋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상호는 심장이 쓰려오는 것을 느끼며 다시 말했다.
“쌤은 너 돕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태화가 의자를 옮겨 그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제 가정사 알려주면. 쌤이 제 가족 할 거예요?”
“네 생각대로 해. 내가 가족보다 많이 도와줬으면 알려주고. 아니라면 알려주지 마.”
상호는 억지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그녀의 판단에 따를 뿐.
태화는 말없이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사간대요.”
“아버지가?”
“네. 돈에 여유가 생겨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간다면서, 같이 살재요. 핸드폰도 그래서 보냈나 봐요. 내 알바비도 뺏어가던 인간이 대체 어디서 그런 돈이 생겼는진 모르겠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키득거렸다.
“웃기지 않아요? 돈 없을 땐 인간이 바닥을 보여주더니, 돈이 생기니까 다시 잘하겠다는 거. 난 그런 인간이 제일 웃긴데.”
“……글쎄.”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물론 딸을 때리는 아버지를 옹호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큰 일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다야? 그러면 선생님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렇다니까요. 애초에 쌤이랑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내가 안 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태화의 눈에는 아직도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상호는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냐는 말.
“아버지는 네가 여기 있는 걸 모르셨어?”
“그런 줄 알았는데…….”
태화는 말꼬리를 흐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입학도 혼자서 절차 다 밟았고 핸드폰 요금 같은 것도 다 제 통장으로 바꿨는데. 부모란 이유로 이렇게 쉽게 찾아내는 게…… 많이…… 좆같아요.”
“집을 언제 나왔댔지? 2년 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중2 때요.”
“그 후로 연락 안 했고?”
“전화도 문자도 다 차단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편지로 지랄하는 거죠.”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오면 어떻게 할 거야?”
지금 둘의 걱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것.
하지만 태화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분명 자기도 그걸 염려하고 있었을 텐데도.
“괜찮아요. 전 순간이동으로 도망칠 수 있잖아요.”
“교실까지 찾아오면?”
“그건…….”
상호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이 도울 수 있는 데까진 도와줘도 될까?”
“쌤이요?”
태화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상호는 그걸 보고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네가 부담스럽다면 당연히 안 할 거고.”
“아뇨, 그게 아니라…… 그 인간, 쌤 생각보다 훨씬 말이 안 통할 거라서.”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네. 쌤이 도와주세요. 제가 제일 먼저 해결해 보겠지만…… 제가 감당할 수 없다면……, 그 땐 부탁드릴게요.”
“그래.”
상호는 태화가 받은 핸드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도 핸드폰 받아서 좋겠네. 기왕 받은 거 잘 써.”
“아, 이거요?”
태화는 새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 팔죠. 기분 나빠서 안 써요. 보나마나 위치추적 앱 깔려있을 것 같은데.”
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태화의 아버지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건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했기에 아이가 이토록 싫어하게 됐는지.
직접 만나 보기 전엔 알 수 없겠지만, 되도록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상호의 바람이었다.
“태화야.”
“네.”
“저녁 같이 먹을래?”
태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평소 같았으면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는 게 상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도 그 말이 그녀를 기쁘게 해 주긴 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죠.”
태화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먹는 거 맞죠?”
“……아니, 급식 같이 먹자는 말이었는데.”
“우씨, 오늘 같은 날은 사주시면 안 돼요?”
“나중에 사 줄게, 나중에…….”
둘은 다시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아옹다옹하며 교실을 나섰다.
부서진 가족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다음날 바로 만날 줄은 몰랐다.
“태화 아비 되는 사람이요.”
그렇게 말하는 사내를 상호는 쓱 훑어보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난 중년인이었다. 몸은 말랐고, 눈은 어딘가의 누구처럼 퀭하다. 상호는 그 눈을 보고 사내가 무언가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술인지 담배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이 쪽 빠져서 더 늙어 보인다는 것만 빼면 상당한 미중년이었다. 태화의 미모에는 부친의 피가 한몫한 모양이었다.
상호는 조례를 위해 출석부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이 좀 보러 왔습니다.”
“태화는 아버님을 만나기 싫어하던데요.”
딸에게 버림받은 아비가 아니라, 딸을 버린 아비다.
아이를 때려서 도망치게 만들어 놓고 끈질기게 찾아오는 자를 학부모로 볼 수는 없다. 태화는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기도 했고.
상호는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저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한 번만 얼굴 보게 도와주세요.”
“그건 태화 선택입니다. 아버님 얼굴 보고 말고는 그 애가 알아서 할 겁니다.
그리고 제 말도 잘 안 듣거든요, 태화는.”
“딱 한 번만…….”
태화의 아버지가 그를 따라오려 했다.
상호는 내공을 뻗어 그를 그 자리에 붙들었다.
“따라오지 마세요. 이제 수업해야 합니다. 기껏 면학 분위기 잡아 놨는데 이런 일로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습니다. 정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방과 후에 다시 오세요.”
“……교무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태화의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의외로 조용한 사람이다.
허나 입과 주먹은 엄연히 다른 신체부위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올라 3층 끄트머리의 교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아이들이 평소처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 선생님.”
“꿀모닝~.”
태화도 여느 때처럼 깨방정을 떨었다.
그는 차마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애꿎은 교탁만 출석부로 두드리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얘들아. 오늘은 교무실 오지 마.”
“무슨 일 있어예?”
“선생님들 바빠서 그래. 방해하면 안 되니까.”
태화는 눈치가 빨라서 이미 감을 잡은 듯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걸 보면.
상호는 다른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태연하게 웃었다.
“자, 수업 준비하고.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