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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나빛이는 수행원이 데려갔고, 다른 아이들은 상호의 차에 탔다.
한참 운전하고 있는데 뒷자리에서 갑자기 태화가 말을 걸었다.
“쌤.”
“응?”
“나빛이네는 잘 살지 않아요?”
“잘 살지.”
“그러면 쌤은…… 불쌍한 순서대로 더 잘해주는 거예요?”
아무도 말이 없고,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만 났다.
상호는 곰곰이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약간은.”
“약간이요?”
“나도 너희랑 비슷하니까. 동병상련같은 느낌이…… 조금은 있지.”
“그러면 다른 이유도 있어요?”
빨간불이 보이자 상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세희와 태화, 지윤이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태화 네가 보기엔 쌤이 너희한테 우선순위를 두는 것 같아?”
“아니에요? 얘도 알고 있을 걸요.”
태화가 세희의 볼을 검지로 콕 찔렀다.
세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도 알고 있어요. 쌤이 저랑 세희한테 특히 잘해주는 거. 지윤이는 그래도 엄마랑 사이 좋고, 나빛이는 말할 것도 없고……. 맞지 않아요? 불쌍한 순서대로 잘해주시는 거.”
“맞아.”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 없는 순서대로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러면…….”
태화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더 예쁘다, 착하다, 그런 순서는 아니란 말씀이세요?”
“그럼. 착한 걸로 치면 네가 나빛이 못 이겼지.”
“……칫.”
그는 그녀들이 뭐 때문에 그러는지를 깨닫고 몸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태화 네가 뭔가 잘못 아는 것 같은데……. 내가 너희를 불쌍해해서 잘해주는 건 아니야.”
“그럼요?”
“쌤이 가르칠 뻔한 아이가 있었어.”
그는 초록불에 페달을 밟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작년이었으니까 너희랑 같은 나이였을 거야. 검을 쓰는 여자애였는데……
어쩌다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돈을 벌려고 헌터 일을 시작하려는 중이었대.”
“고 1이요? 돈이 왜 필요했대요?”
“그 아이도 부모가 없었어. 학비가 필요했나 봐.”
“그럼 그 언니가 선생님 첫 제자예요?”
“아니. 제대로 가르쳐보기도 전에 죽었어. 너무 쎈 놈들한테 당해서.”
세 아이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내가 너희를 차별했다면 미안하다. 근데 자꾸 그 애가 생각나서 어쩔 수가 없어. 솔직히 말해서…… 지윤이랑 나빛이는 학비를 낼 수 있으니까.
안심하는 중이야. 반대로 태화 너랑 세희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백 퍼센트 안심할 수는 없단 말이야. 그래서 그 불안감 때문에 너희한테 더 잘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세희가 검을 쓰니까 그 애 생각이 나서 더 잘해주게 되고.”
상호는 백미러를 흘끗했다. 세희는 살짝 어두운 안색으로 창밖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이 됐어?”
“그럼…….”
태화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쌤이 진짜로 예뻐하는 순서는요?”
그는 피식 웃었다.
“나빛이.”
태화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치…….”
“나빛이보단 태화.”
“네? 진짜요?”
태화의 표정이 환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태화보단 세희.”
“우씨…….”
“세희보단 지윤이고, 지윤이보단 나빛이지.”
세희와 지윤의 표정이 차례대로 밝아졌다가 팍 식었다.
상호는 킥킥거리며 학교 교문에 들어섰다.
“다 똑같아. 다. 그래도 너희가 성적으로 증명하면 그 순서대로 대우해 줄 거야. 내년부턴 옷 사주고 밥 사주고 그러기는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첫 제자들이니까. 올해는 괜찮겠지.”
“그런 의미에서 내일도 밥 사주세요!”
“넌 급식 좀 먹어.”
“힝…….”
상호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들어가. 그동안 많이 놀았으니까 내일부턴 다시 열심히 하는 거야. 운기조식도 하고. 마법공부도 하고. 알았지?”
“네!”
아이들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이화관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들의 뒷모습을 상호는 난처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내가 편애를 했던가? 나는 나름대로 공평하게 대해 줬는데……. 지윤이랑 나빛이한테 좀 더 신경써야 하나? 지금보다 더? 아이고, 모르겠다…….’
학대
금요일이 어린이날이면 월요일은 어버이날.
상호는 어버이날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수업을 시킬 뿐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간만에 정상적인 수업이 가능해지는 주간이었기에.
운동장에 선 아이들이 그의 옆을 보며 당황했다.
“쌤…… 그건 뭐예요?”
상호는 옆에 서 있는 목각인형을 돌아보았다. 딱 사람만한 크기의 물건이었다. 마네킹처럼 손가락까지 세세하게 구현된.
그 목각인형의 대가리에는 곰인형 대가리가 박혀 있었다.
“너희 수준을 좀 높여야 할 것 같아서. 언제까지고 짤뚱막한 곰인형 가져다가 할 순 없잖아.”
“그건 알겠는데…… 머리는 왜 저래요?”
“엄청 무서워요…….”
“그래?”
아이들의 말에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귀엽다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앞뒤 구별하기 쉬우라고 달아 봤는데. 별로야?”
“끔찍해요.”
“테디 씨가 죽여달라고 하고 있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는 곰인형 머리를 떼어내고 불태워 버렸다. 태화가 합장을 했다.
“내세에는 부잣집 인형으로 팔려가길…….”
타고 남은 잿가루로는 목각인형의 얼굴에 눈과 입을 그렸다. 딱 웃는 이모티콘, ^ㅁ^ 모양으로.
“지윤이 먼저 해보자. 주말에 반탄강권 연습 했지?”
“네.”
상호는 목각인형을 움직여 지윤의 앞에 세웠다.
“간다.”
목각인형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곰인형보다 훨씬 인간에 가까운 형태. 관절 하나하나가 확실히 구분되어 동세를 살피기 편했다. 그러나 보기에만 편할 뿐, 훨씬 길어진 팔다리와 졍교해진 움직임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난이도가 차원이 달랐다.
이전의 곰인형이 그저 간격에 따른 공격과 방어를 가르쳤다면, 지금의 목각인 형은 인간의 무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지윤은 손을 살짝 움직여 목각인형의 주먹을 막았다.
정확히는 가져다 대기만 했다.
턱
반탄강권의 특이한 권법 형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 빠르게 상대의 공격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
충격에 대비해 미리 몸을 긴장시킬 필요가 없다. 따로 힘을 주어 밀어낼 필요도 없다. 만약 반탄강기를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대는 무기가 튕겨나가서 크게 휘청거렸을 터였다.
상호도 일단은 그녀가 반탄강기를 쓰고 있다는 전제하애 목각인형을 움직였다.
아직까지는 잘 따라오고 있었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이게 이 대련의 목적이다.’
목각인형이 지윤의 손목을 잡아챘다.
“윽!”
지윤은 당황하며 몸을 최대한 낮추고 인형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인형은 펄쩍 뛰어 지윤의 머리 위로 넘어가서는, 착지하자마자 그 회전력을 이용해 지윤을 머리 위로 던지듯이 띄워 올렸다.
퍼억
“끄윽!”
결국 지윤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목각인형을 마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쌤요. 이 새끼 웃는 거 맘에 안 듭니더.”
“미안하다……. 어쨌든, 지금 네가 부족한 게 뭔지 알겠지?”
“네.”
“왜 잡히고 나면 항상 기술에 당할까?”
지윤은 눈을 끔뻑였다. 생각해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잡혔으니까 아입니꺼?”
“잡혔다는 건 그냥 상대와 나 사이에 힘의 연결부가 생겼다는 뜻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물론 상대에겐 언제든 놓아버릴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잡혀 있을 때만 따지면 누가 더 유리하고 자시고가 없어.”
상호는 다시 목각인형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저번에 그 애를 생각해 봐봐. 너보다 힘이 약했지?”
“네.”
“네가 팔을 움직여 봐. 좀 불편해도 움직일 수 있지? 힘싸움에서는 오히려 네가 주도권을 잡는 경우가 더 많단 말이야. 그런데 왜 기술에 당할까?”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서예?”
“맞는데, 좀 더 정확한 답이 있어. 더 직관적인 답이야. 보법을 말할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무게중심이예?”
“그렇지.”
목각인형이 지윤을 확 잡아당겨 바닥에 넘어뜨렸다.
“아야…….”
“유도, 유술은 상대의 무게중심을 이용하는 무술이야. 그걸 배운 사람들은 네가 어떻게 움직이든 그 움직임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세를 낮추든, 잡힌 손을 빼든, 상대를 밀든. 너는 네 몸의 균형만 생각하지만, 상대의 머릿속에는 자기 몸과 네 몸까지 전부 계산되고 있는 거지.”
“모르면 맞아라…… 그런 겁니꺼?”
“당연하지.”
“그럼 지도 상대의 무게중심까지 계산해야 하겠네예.”
“응.”
상호는 목각인형으로 지윤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내공이 많아지면 천근추나 경공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너도 유술 공부를 해야 돼.”
“어떻게예?”
“이렇게.”
목각인형을 잡고 일어나던 지윤은 다시 한 번 업어치기를 당하고 땅바닥을 굴렀다.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쌤!”
“미안, 그래도 그래야 빨리 익숙해질 거야.”
목각인형은 지윤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바닥에 한 번씩 굴렸다. 세희는 검집으로 다리를, 나빛과 태화는 주먹으로 각각 명치와 아랫배를 얻어맞았다.
비록 인형이지만 상호의 실력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갑자기 올라간 난이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끙끙댔다.
“아야야…….”
“아이고, 내 아가방 망가지네…….”
“뭘 망가져, 인마.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상호는 그녀들을 둘러보았다.
“맞아야 빨리 는다. 앞으로 다른 반보다 훨씬 많이 때릴 거야. 이미 알고 왔잖아. 그치?”
“네.”
“그래도 많이 아프면 말해.”
그의 말에 아이들이 꾀죄죄해진 얼굴로 씩 웃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