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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어…… 목 다 쉬었다…….”
“그러게 적당히 하고 나왔어야지.”
상호는 좀비처럼 신음하는 태화에게 핀잔을 날렸다.
옆에서 함께 걷던 아이들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치만~ 주는데 안 할 수는 없잖아요~.”
“돈 아깝십니더.”
“그래도 건강 챙기면서 해야지. 너희 그러다 나중에 성대결절 생긴다.”
선생 일을 하다 보니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병이 성대결절이었다. 상호도 요즘목이 아파서 물을 자주 마시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었다. 걸리면 성력으로 치료하면 된다지만.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점심 먹은 직후에 노래방을 갔는데 나와 보니 저녁시간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얘들아. 나빛이도 집 가야지.”
“저녁도 같이 먹어요…….”
나빛이 아쉽다는 듯 웅얼거리고, 세희와 태화가 뒤를 이었다.
“어린이날이니까 더 같이 있어 주세요.”
“선물 사주세요. 저희 엄마아빠 없잖아요~.”
“인마, 무슨 말을 그렇게…….”
상호는 태화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태화가 혀를 쏙 내밀었다.
“저희 오늘 아니면 평생 어린이날 선물 못 받을 수도 있는데요. 야, 세희. 너 받아본 적 있어?”
“없어.”
세희가 대답하자 태화는 거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주 선생을 쪽쪽 빨아먹으려고 하는구나. 그는 한숨을 쉬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선생님이 너희 아빠는 아니잖아.”
“어린이날은 원래 부모 자식 상관없이 아이들을 위한 날이래요.”
“스승의 날에 좋은 거 해 드릴게요.”
“너희가 그러면 나는 무섭다, 이제…….”
그래도 한 번도 못 받았고 앞으로도 못 받을 거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상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보이는 대형마트를 가리켰다.
“알았다. 가자. 옷 하나씩 사줄게. 그런데 비싼 건 못 사줘.”
“넹~.”
아이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
대형마트에 들어서자마자 태화는 당연한 듯이 속옷 코너를 향했고, 이미 반쯤 예상하고 있던 상호는 그녀를 허공섭물로 잡아 곁으로 데려왔다.
태화가 키득거렸다.
“아잇, 쌤 이제 날 너~무 잘 안다니까.”
“평범한 거 사라. 평범한 거.”
그는 아이들이 옷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태화는 제일 먼저 쌩하니 달려갔고, 지윤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태화 옆에 다가가서 함께 옷을 골랐다.
나빛과 세희는 상호의 옆에 남아 있었다. 그는 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도 어서 골라.”
“저는 괜찮아요.”
나빛이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릴 때 부모님한테 많이 받았어요. 이제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니까…….”
“그냥 제자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사.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그, 그럼…….”
나빛은 잰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세희는 그의 곁에 가만히 서 있었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세희 너도 골라. 너하고 태화 때문에 온 거야.”
“저는 쟤만큼 옷을 잘 입질 못해서…….”
세희가 태화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골라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문제는 그도 여자들 패션을 잘 알지 못했다. 상호는 곤란해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런데 그게…… 선생님도 잘 모르거든? 괜찮겠어?”
“괜찮아요.”
세희는 빙긋 웃었다.
상호는 세희와 함께 옷이 진열된 매대로 향했다.
“어떤 색이 좋아?”
“잘 모르겠어요.”
“그럼…… 좀 하늘거리는 게 좋아, 달라붙는 게 좋아?”
“선생님은요?”
세희의 되물음에 상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으음……. 나는 글쎄. 너한텐 하늘거리는 쪽이 어울릴 것 같은데.”
“이런 거요?”
“좀 밝은 색은 없나?”
어쩌다 보니 윗옷뿐만이 아니라 치마에 구두까지 골라 버렸다.
넓은 소매를 팔목에서 좁히는 얇은 소재의 하얀 블라우스. 목에 매인 검은끈. 허리를 길게 조이다 골반에서부터 펑퍼짐하게 내려오는 검은색 긴 치마.
그리고 굽이 낮은 구두.
꾸며주다 보니 너무 많이 꾸며 버렸지만, 상호를 당황하게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미쳤구나…….’
예경의 사복 차림대로 입혀 버렸다.
그가 생각하는 예쁨의 기준이 그녀였으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세희는 그가 왜 우물쭈물해 하고 있는지 의아해했다.
“선생님?”
“아, 미안. 아무것도 아냐.”
그는 혹시나 들킬까봐 대충 얼버무리고, 지갑을 꺼내며 직원에게 말했다.
“다 계산해 주세요.”
이번엔 세희가 화들짝 놀랐다.
“선생님, 저어…… 이렇게 다 살 생각은…….”
상호는 그냥 무시하고 계산해 버렸다. 다 입혀 놨는데 안 사주기도 좀 그렇고 해서.
“전교 2등 선물이야. 대신 다음에 꼭 1등 해.”
“……네.”
세희는 굳건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잖아 옷을 다 고른 태화와 지윤, 나빛이 그에게 돌아왔다. 그녀들은 한껏 차려입은 세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세희 너 뭐야?”
“가스나 와 이리 이쁘게 입었노?”
“그, 그냥…….”
세희가 시선을 피하자 태화가 상호의 앞에서 발을 굴렀다.
“또! 또! 또! 세희만!”
“태화 너도 사 줄게. 5등 했으니까.”
“진짜요? 그럼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사 주세요!”
“혼난다.”
“그럼 저도 세희처럼 선생님이 꾸며 주세요!”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옷을 집어들었다.
“태화 넌 치마만 입는댔지?”
“네.”
“위에는 상관 없고?”
“뿔 들어가야 돼서 목은 넓어야 돼요. 단추로 열든가.”
“보자…….”
태화는 그가 골라준 옷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어깨 한쪽이 살짝 드러나는 분홍색 블라우스에 연한 색 짧은 청치마. 신발은 굽이 살짝 높은 흑백의 운동화였다.
그녀는 거울에 스스로를 이리저리 비춰보더니 한 번 빙글 돌아 상호를 마주보았다.
“어때요?”
“난 여자 패션 몰라.”
“뭐예요, 세희는 저렇게 예쁘게 입혀 놓고 나는 대충, 대~충…….”
“모르는 걸 어떡하냐. 세희는 내가 익숙한 대로 입혀본 거야.”
“치, 내가 더 옷태 쩌는데…….”
“쌤요, 지도예.”
지윤이 궁시렁거리는 태화를 밀치고 상호의 앞에 섰다.
상호는 그녀의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피했다.
“지윤이는 10등 안에 들면 해 줄게.”
“엑…….”
51등밖에 못 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을까. 지윤은 울상을 지었지만 곧 군말없이 수긍했다.
“후딱 강해지겠심더. 미리 생각해 두이소.”
“그래. 지윤이랑 나빛이는 오늘 하나씩만 사.”
“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카드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계산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