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501)

***

결국 상호네 반은 꼴찌였다. 물량에 장사 없는 법이었기에.

“우와…….”

나빛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퍼질러 누웠다.

“꼼짝도 못 하겠어요…….”

넷 중에 제일 체력이 약하니 당연했다. 다른 아이들도 지친 표정이었다. 하루종일 뛰고 구르고 소리지르고 하다가 이제야 저녁 먹고 쉬러 온 것이었다.

상호는 문지방에 서서 말했다.

“수고했다. 이제 쉬고 있어.”

“저희 또 뭐 해요?”

“뭐겠어?”

“하는구나, 정말.”

태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30분밖에 못 놀겠네요.”

“그렇겠지.”

바깥에선 아이들 몰래 선생들이 운동장에 나무를 쌓고 있었다. 8시쯤 되면 모두 모여서 캠프파이어를 할 터였다.

그는 아이들의 꾀죄죄한 몰골을 보며 말했다.

“지금 미리 씻어 두면 편하지 않을까? 갔다와서 바로 놀고 자게.”

“으음…… 그래도 씻고 나서 밖에 나가긴 싫어요.”

“편할 대로 해.”

앉아 있던 지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쌤요. 그럼 지금 놀면 된다 아니에요?”

“나도 나가서 준비해야지.”

“아…….”

“갈게. 너희끼리 놀고 있어.”

상호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

높게 쌓인 장작더미 위에서 불꽃이 춤을 췄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의 형상을 한 불꽃이 느리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모습으로. 상호는 불의 정령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캠프파이어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아이들이 연신 훌쩍거렸다. 왜 울고 있는고 하니 수련원 직원이 하는 말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내가 평소에 부모님께 어땠나 생각해 보세요. 평소에 반찬투정안 했는지…… 옷 사 달라고 떼쓰진 않았는지…….”

나빛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옆에서 태화가 어이없어하면서 한 마디 했다.

“니는 맨날 보면서 왜 질질 짜? 하루이틀 못 본 거 가지고…….”

“그냥, 보고 싶어서…….”

“내일 보잖아, 멍청아!”

감수성 풍부한 아이들이 있는 반면, 현실에 찌든 아이도 있는 법이었다. 우는 아이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기숙사로 처음 출가를 한 1학년들이었다.

다만 성격과는 상관없이 좀 더 깊은 사연을 품은 아이도 있다.

상호는 지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고요하게 불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세희가 검을 만지작거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직원의 말이 이어졌다.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해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비록 혼을 내더라도 언제나 여러분이 바른 길로 나아길 바라는 뜻으로…….”

“웃기고 자빠졌네.”

태화가 중얼거렸다.

“결국 다 자기 생각만 하면서 사는 거지…….”

그 후로도 직원의 말은 이어졌고, 우는 아이들은 조금씩 늘어났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며 자신의 반 아이들을 보았다.

다들 안색이 어두웠다.

부모를 모르는 아이.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이. 부친을 잃은 아이.

“상상해 보세요. 부모님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를. 여러분이 입는 옷, 학비, 핸드폰 요금…… 다 스스로 해결해야 해요. 그걸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큰…….”

상호는 아이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너흰 들을 필요 없다.”

그의 손이 그녀들의 등을 토닥였다.

“잘 모르는 애들이 말이야, 질질 짜는 게 웃기지 않냐. 자기들은 잃어 본 적도 없으면서. 그치?”

“흑…….”

지윤이 그의 품에서 훌쩍였다.

세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아예 모르겠어요. 저 말들이 무슨 뜻인지……. 부모님을 만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이미 어릴 때 많이 울어서. 더 이상 울 수가 없어요.”

“만나서 뭐해?”

태화가 코웃음을 쳤다.

“곱게 버렸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그거 생각한다고 돈이 생기냐 내공이 생기냐. 생각하지 마.”

상호는 그녀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아이들의 머리가 금세 산발이 되었다.

“사랑은 다른 걸로 채우면 되는 거야. 그게 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친구끼리 잘 놀면 그게 제일이지 뭐. 놀러 왔는데 그런 거 생각하지 마라.”

그러자 셋은 그의 품에 더 깊이 안겨들었다. 셋 다 코를 훌쩍이는 것이 셔츠에 콧물이 묻는 건 아닌가 싶었다.

옆에서 혼자 안기지 못한 나빛이 울먹거렸다.

“저도 안아 주세요…….”

“나빛인 오늘 하루 왕따야.”

“뭐예요……. 그런 게 어딨어요…….”

“집에 가면 부모님 안아 드려.”

하지만 나빛은 기어코 달려들어서 품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상호는 그녀들의 머리를 꼭 안아주며 귀를 막았다. 직원이 하는 말과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

“그만 짜, 이년아!”

“흐잉…….”

태화가 나빛의 등을 찰싹 후려쳤다.

“빨랑 놀아야 될 거 아니야. 그만 울고! 앉아! 어제 못한 게임 해야지!”

“으응.”

나빛은 울음을 뚝 그치고 방바닥에 앉았다.

상호는 아이들을 따라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뭘 하려는 거야?”

“진실게임!”

태화가 검지로 그를 가리키자 상호는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비밀이 워낙 많은 그였다. 부득불 거짓말을 하게 될 텐데.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한 사람한테 나머지 네 명이 질문하는 거예요.”

“다섯이 다 하자고? 한 명한테 한 번씩 질문하게 되겠네?”

“그렇죠.”

“대답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런 거 없어요! 무조건 진실!”

“……그래. 일단 해 봐.”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윤이 주먹을 내밀었다.

“그럼 가위바위보로 순서…….”

“그냥 쌤부터 돌자. 이렇게 시계 방향으로.”

그는 앉아있는 아이들을 검지로 빙 둘러 가리켰다. 순서대로 지윤, 태화, 나 빛, 세희.

첫 순서, 지윤이 신이 나서 물었다.

“쌤 여친 있어예?”

“없어. 다음.”

“야, 바보야! 언제부터 언제까지 사귀었냐고 물었어야지!”

태화가 지윤을 타박했다. 지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니가 물어바라.”

“난 딴 거 물어볼 거야. 쌤 첫키스 언제 했어요?”

상호는 이걸 대답해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17살.”

“어…….”

아이들은 살짝 놀란 듯하면서도 눈을 반짝였다.

“저희 나이 때요? 누구랑요?”

“그건 다른 질문이잖아. 안 돼.”

그가 발뺌하자 나빛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럼 누구랑 하셨는지 가르쳐 주세요.”

말하기 곤란한데. 상호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

“에이, 너무 당연하잖아요!”

“쌤 은근히 치사하네예.”

태화가 불평하고 지윤이 웃었다. 그 사이로 세희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상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제가 아는 그분이에요?”

“아…….”

상호는 당황하며 세희의 시선을 피했다. 세희는 예경의 얼굴도 알고, 나이도 알고, 그녀가 그의 스승이었단 사실까지 알았다.

지금 대답하면 ‘내가 너희 나이 때 지금 내 나이인 스승하고 사귀었어’라고 고백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세희는 그 사진을 봤다. 검의 원래 주인도 알고 있고.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맞아.”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화가 세희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뭐야? 왜 너하고 쌤만 아는 거야? 뭔데!”

“그만큼 날 믿으신다는 거지.”

세희는 새침한 웃음을 지었다.

태화는 속이 터지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상호에게 소리쳤다.

“뭔데요! 뭔데요! 왜 얘만 알아요? 지윤이는 늦게 왔고 나빛이는 바보라 쳐도, 왜 저는 안 알려줘요? 저한테만 알려준다고 하신 비밀들도 사실은 다 구라 아니에요?!”

“아니야, 임마. 세희도 모르는 거 많아. 너만 알고 있는 것도 있고…….”

그 말을 하니까 이번엔 또 세희가 억장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상호는 답답해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아니 얘들아. 너희가 내 뭘 알면 어디까지 안다고 그러냐!”

“쌤요! 그럼 지는 세희보다 많이 알아예? 태화보다 많이 알아예?”

“저, 저도…… 태화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윤과 나빛까지 끼어들자 태화가 폭발했다.

“아악! 몰라! 나한테만 말 안해줘! 나만 미워해애애!”

“아니라니까…….”

“그럼 누군데요? 세희만 아는 쌤 첫키스 도둑이 누구냐구요!”

“뭘 도둑이야, 인마. 내가 준 건데……. 그리고 죽어도 말 못하니까 그리 알아.”

“끄악……!”

태화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엎어졌다. 상호는 그녀를 무시하고 아이들을 보았다.

“자, 지윤이 차례.”

“태화는 빼고 합니꺼?”

“알아서 일어날 거야. 걱정 마.”

그 말대로 그녀는 자기 차례가 되자 몸을 일으켜서 조용히 끼어들었다.

이후로도 진실게임은 계속되었고, 정신없이 놀다 보니 어느새 30분을 훌쩍 넘겼다.

상호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이제 씻고 자.”

“더 놀면 안 돼요? 내일 가잖아요…….”

“조금만 밤 새면 안 돼요?”

아이들이 애원해도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방에 가야지. 너희도 씻고 자. 물론…… 안 들키고 놀 수 있으면 놀아도 되지만. 그래도 씻고 놀아.”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네!”

“야, 빨랑 씻어!”

아이들이 옷가방을 향해 달려갔다. 하루종일 그렇게 구르고도 또 놀 힘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상호는 쓰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권법과 권투

“크아…….”

뒤쪽에서 아이들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옆자리에서 설미가 웃었다.

“갈 땐 시끄럽더니 돌아올 땐 조용하네.”

“밤 새서 놀았겠죠.”

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아이들과 찍은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설미 선생님은 사진 많이 찍었어요?”

“응. 한번 볼래?”

둘은 핸드폰을 서로에게 넘겼다.

설미가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단체사진이었다. 반 전체가 찍거나, 친한 무리끼리 모여 찍은 것들. 겉도는 아이들도 빠짐없이 찍긴 했지만, 한 아이를 여러 장 집중적으로 찍은 것은 없었다.

반면 상호의 사진은 한 아이를 여러 장 찍은 것이 많았다.

“어머, 상호 씨 사진 잘 찍는다.”

“그래요?”

“무슨 화보 같아. 아닌가? 애들이 예쁜 건가?”

설미는 나빛이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하는 사진을 보며 감탄했다.

“이 사진이 특히 예뻐.”

“나빛이가 예쁘기야 하죠.”

“아니, 분위기 말이야. 머리카락이 회색이라 빛 받으면 반짝이는 게 엄청 예뻐.”

“그런 거예요?”

상호는 그녀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자신의 것도 돌려받았다.

그리고 나빛을 찍은 사진들 중에서 괜찮은 것을 골라 봉진에게 보냈다. 설미가 예쁘다고 한 사진을 포함해서.

머잖아 답장이 도착했다.

-더 없나?

-다 보내 드리겠습니다.

-더 고화질은 없나?

-핸드폰으로만 찍어서 없습니다.

-카메라 필요한가?

-저 그런 건 안 받습니다.

-학교에 기증하면 되지. 몇 개든 줄 테니까 그냥 필요하면 말하게.

-예,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고맙네.

맘에 든 모양이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어깨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옆을 돌아보니 설미가 그새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상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쿨…….”

선생도 피곤했나 보다.

상호는 가만히 어깨를 내어주며 창밖의 경치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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