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501)

***

시간이 흘러 9시 55분이 되었다. 상호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둘러앉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만 자자. 태화랑 지윤이도 씻고 자고.”

“앗.”

지윤은 들켰다는 것을 깨닫고 상호의 눈길을 피했다. 태화는 오히려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쌤. 게임 하나만 더 하면 안 돼요?”

“내일도 있는데 굳이 오늘 해야겠어?”

“내일요? 음……. 수련회 마지막 날이라고 밤늦게 깜짝 캠프파이어 이벤트하고 끝나면 늦었으니까 일찍 자라고 할 거잖아요.”

“너 천재냐?”

듣고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지금은 잘 시간이다. 상호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일찍 자. 내일은 오늘보다 이것저것 많이 할 거잖아. 만약 내일 일정이 네 말대로 늦게 끝나면 딱 30분만 놀게 해 줄게. 셋째날은 일정 별거 없으니까.”

“네!”

태화도 별 이의 없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

상호는 방을 나서며 안에 대고 말했다.

“잘 자고. 알람 맞춰서 제때 일어나. 그러라고 핸드폰 주는 거니까.”

“네~.”

“안녕히 주무세요.”

“응. 잘 자.”

그는 아이들의 인사를 듣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수학여행이라면 당연히

다음 날.

오전 9시부터 아이들은 구르고 굴렀다. 풍선처럼 바람을 넣은 구조물에서 마나를 쓰지 않고 온갖 장애물 돌파하기, 장난감 화살 손으로 잡아내기, 풀장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

덕분에 아이들은 완전히 흙투성이가 되었다. 물에 빠져 푹 젖은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기 전, 마지막 활동.

“이게 뭐여.”

태화가 양 옆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주변에는 둥그런 결계가 쳐져 있었다. 결계 안에는 태화뿐만이 아니라 같은 반 아이들도 함께였다. 넓은 운동장에서는 각각의 반이 그렇게 결계에 갇힌 채였다.

상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반 선생들과 함께 모여서 아이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꽤 단단해 보이는데.’

학생이 깨기에는 만만치 않을 듯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수련원 직원이 소리쳤다.

“이 결계는 예현여고 선생님들이 특별히 준비해 준 결계예요. 딱 봐도 감이 오죠? 먼저 깨뜨리고 나올수록 높은 점수 줄 겁니다. 자, 시작!”

그 말과 동시에 아이들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얍!”

“이익!”

결계에 검이 부딪히고 불꽃이 작렬했다.

하지만 푸르스름하고 반투명한 마나의 보호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명에서 30명 정도 되는 인원이 한 지점에 집중 공격을 가해도, 결계는 깨지기는커녕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4명밖에 없는 상호의 반은 꽁한 표정으로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상호는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왜 안 해? 얼른 해 봐.”

“그치만…….”

나빛이 속상한 눈빛으로 옆 반들을 쳐다보았다.

2학년들도 못 깨고 쩔쩔매고 있는 와중에 1학년 넷이서 결계를 깰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나마도 지윤과 나빛은 화력이 강하지 않았다.

기댈 곳은 세희와 태화뿐이지만, 그 둘도 자신감은 없어 보였다. 이전에 줄다리기에서 물량의 한계를 맞닥뜨려 버린 탓이었다.

“그래도 해봐야 아는 거지. 마지막 게임이라 점수 많이 줄 거야. 열심히 해 봐.”

“끄응.”

상호의 격려에 태화가 머리를 푹 숙였다.

“끄으으응…….”

그리곤 주먹을 꽉 쥐며 뿔 사이에 보랏빛 에너지를 모았다. 평소보다 훨씬 큰 크기였다.

“흐야아압!”

기합과 함께 보라색 광선이 결계를 향해 쏘아졌다.

꽈아아앙

결계가 뒤흔들리고 흙먼지가 일었다.

다른 반보다 훨씬 격렬한 진동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던 선생들이 한 마디씩 했다.

“어머, 누구 반이야?”

“아깝다. 좀 더 하면 깨졌겠는데?”

그 말대로 결계에는 살짝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그 균열은 얼마 안 가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스스로 복구를 하는 결계였기에.

흙먼지가 잦아들자 탈진해서 쓰러진 태화와 넋이 빠진 나빛과 지윤, 눈살을 찌푸린 세희가 보였다.

“오, 강 선생 반이네. 평가 때 보니까 저 악마 애가 세던데. 쟨가 보다.”

“화력은 2학년만큼 나오네. 얘들아, 너희도 저만큼 할 수 있지? 열심히 해 보자!”

다른 반 선생들은 각자의 반 아이들을 응원하며 단합력을 이끌어내었다.

그런 와중에 상호는 세희의 눈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그렇지…….’

그곳에선 은율이 검으로 결계를 찌르고 있었다.

은율도 결계를 깨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몇 번 더 결계를 베거나 찌르더니 경한의 눈치를 보며 검을 내렸다.

상호는 경한이 은율을 노려보는 것을 보며 혀를 찼다.

‘약해빠진 놈이 학생을 데리고 뭔 자존심을 세우겠다고…… 지부터 강해질 것이지.’

은율은 경한의 눈빛을 피하다가 세희를 발견하고 눈을 마주쳤다.

세희는 비로소 검을 뽑았다.

“선생님.”

“응?”

상호는 세희가 갑자기 부르는 것에 당황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검기 강하게 만드는 법 가르쳐 주세요.”

“……지금?”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이 결계를 파훼하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비밀은 땅 아래 숨겨져 있는 마법공학 결계기관. 땅 깊숙한 곳에 마법진을 펼쳤기 때문에 마법사가 집중하고 있지 않아도 강력하고 스스로 수복되는 결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해답은 땅을 파서 기관을 직접 부수는 것.

결계는 아이들이 부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도 뭐, 해보고 싶다면야…….’

“눈 감고, 물총을 상상해봐.”

세희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물총의 방아쇠를 천천히 누르면 물이 약하게 나가지?”

“네.”

“구멍이 크면 또 약하게 나가고.”

“네.”

“그러면 물총을 강하게 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좁은 구멍에 빠르게요.”

“그래. 검기도 마찬가지야. 내공의 양이 같다면, 그리고 강기의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니라면, 좁은 부분에 짧게 집중시켜야 강한 검기가 나오겠지.”

세희는 검을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

“좁고 짧게요.”

“응.”

“좁고 빠르게…….”

“아니……, 뭐 빠르게라면 빠르게랄 수 있겠지만.”

“빠르게…….”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결계를, 그리고 그 너머의 은율을 바라보았다.

“칼날에 집중시키면 되나요?”

“음……. 그렇지.”

상호는 팔짱을 끼고 턱을 괴었다.

그는 세희가 검의 일부분에만 기를 집중시킬 수준이 될 거라고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깨달음의 문제이니 감각을 타고났다면 될 수도 있겠다만.

하고 싶다면야 말리진 않았다.

“네 손이 물총이고, 칼날이 구멍. 휘둘러 닿기 직전에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네.”

세희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해볼게요.”

그리고 결계를 향해 검을 날렸다.

상호에게는 그 칼날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실제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집중하자 세상이 멈추고, 오직 세희의 칼만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칼날이 결계에 닿는 순간.

사아악……

하늘거리는 한지를 베는 것처럼, 매끄럽게 결계를 갈랐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칼날 끝부분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물처럼 흐르는 기운이 보여서.

흐릿해도 맑은 하늘색임은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녀의 쥐꼬리만한 내공으로는 턱도 없는데.

아니, 가능은 했다. 방금 그가 가르친 내용을 정확히, 완벽하게 수행하면 아주 작은 강기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듣기만 하고 해낼 줄이야.

‘천재는 천재네. 나 어릴 때보다도 더…….’

세희가 검을 거두자 상호가 보는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결계는 깨지지 않았다. 너무 빠르고 깔끔하게 베어서 결계가 부서질 틈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결계를 베었다는 것을 알고 씩 웃었다.

“이렇게요?”

“응.”

상호도 살짝 웃었다.

“잘했어.”

주변은 그들을 신경쓰지 않고 소란스럽기만 했다.

“땅! 땅 속인가 봐.”

“파내! 빨랑 파내!”

다른 반 아이들은 진실을 깨닫고 땅을 파는 중이었다.

아무도 세희가 결계를 베었다는 것을 몰랐다. 딱 한 명, 처음부터 바라보고 있던 은율만 빼고. 그녀는 상호와 세희가 서로를 향해 웃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동경이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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