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들은 강당에서 앞으로의 일정을 듣고 안전 교육을 받은 후,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밥은 예현여고의 것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맛은 있었다.
식후에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강당에 모였다. 단상에서 직원들이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늘상 하는 소리였다.
“저번 학교는 엄청 잘해줬는데~. 심지어 중학생들이었는데~. 여러분 지면 안되겠죠~.”
“여러분 여기 놀러온 거 아니죠? 뭔가를 얻어 가야겠죠?”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와…….”
듣고 있던 나빛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상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빛아, 왜?”
“태화가 말한 거 그대로 다 나왔어요.”
태화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들어올렸다.
“훗.”
“뭘 훗이야. 뻔한 거잖아.”
세희의 핀잔에 태화는 콧방귀를 뀌었다.
첫째 날에는 활동적인 계획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프로 헌터들의 강연이었다. 저녁 먹은 후까지 쭉.
수련원 직원이 단상 옆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첫 번째 강사님을 모시겠습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직원은 강사가 누군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태화가 세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얏! 뿔 안 치워?”
“좀 박을게.”
세희는 태화를 떼어내려 했지만, 태화가 끈질기게 어깨에 달라붙었다. 결국 세희는 포기하고 태화를 무릎에 눕혔다.
상호는 그런 그녀들에게 한마디 했다.
“얘들아, 똑바로 들어.”
그러나 다음 순간, 상호는 단상으로 올라오는 강사를 확인하고 고쳐 말했다.
“아니다. 자라 그냥.”
“앗!”
나빛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른 학생들도 시끄럽게 꺅꺅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단상에 선 수녀가 마이크를 잡고 웃었다.
“안녕하세요. 예현여고 여러분.”
TV에 나올 때처럼 밝고 명랑한 목소리였다.
“신앙인 헌터 나효은이에요. 저 모르는 사람 없지요?”
“네!”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대답이 강당을 울렸다.
상호는 효은의 눈이 학생들을 쭉 훑다가 그에게 고정되는 것을 보았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여고생들 사이의 안대 쓴 남자 찾기가 그리 어렵진 않았을 터였다.
“저를 처음 만난 사람도 있고, 몇 번 만난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할 이야기는 처음 들어볼 거예요.”
아이들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X급 헌터가 처음 말하는 이야기. 그게 어떤 의미를 갖든, 어떤 가치를 갖든, 어린 아이들을 궁금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선생들도 집중하는 표정이었다.
“세상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대뜸 뱉은 한마디에 정적이 흘렀다.
상호는 이년이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헌터는 이미 많이 있어요. 충분히 많아요. 갈수록 사람은 우세해질 거고, 몬스터들은 약해질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한순간에 뒤집히는 때가 와요.”
상호의 왼쪽 다리가 욱신거렸다.
“지금 세상에 돌아다니는 잔챙이들 따위가 아니라, X급 헌터들도 어쩌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몬스터가 언젠가는 분명히 다시 나타날 거예요. 여러분은 그때를 대비해야 해요. S급 따위에 만족하고 몬스터 잡는 걸 돈벌이로만 아는 헌터는 세상에 필요 없어요.”
효은이 좌중을 노려보았다.
“여러분들은 X급을 목표로 해야 해요. 그러려면 몬스터를 많이 잡아야 하고요. 돈이 부족할 때만 설렁설렁 걸어가서 토벌 몇 번 뛰고 돌아오는 헌터가 아니라, 한 놈 한 놈 강한 놈들을 찾아 죽여가면서 그 마나를 내 몸에 쌓는.
그렇게 힘을 추구하는 헌터가 되어야 해요.”
상호도 이제야 그녀가 말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아직 학생들에게 말하기는 이른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여러분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지 보여줄게요.”
효은의 등 뒤로 수십, 수백 개의 성창이 떠올랐다.
성창은 강렬한 성력을 내뿜으며 작은 태양처럼 찬란히 빛났다. 기운을 아직 잘 느끼지 못할 1학년들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
기운을 느낄 줄 아는 2학년과 선생들에게는 훨씬 더했다.
“이 창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중에 없어요. 손짓 한 번에 모두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말이에요. 여러분은 이런 강함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거야말로 진짜 세상을 지키는 일이이고, 그게 헌터의 업인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여러분은 진짜 헌터가 되어 주세요.”
효은은 달변가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선 딱히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도 상호처럼 딱히 배운 것 없이 참전한 소녀였었기에.
그래도 그녀의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도 공중을 꽉 채운 성창들 때문인지, 아이들도 선생들도 박수를 쳤다.
상호만 빼고.
‘말은 쉽지…….’
X급 헌터를 만드는 것은 전쟁뿐이다. 그만큼 많은 몬스터를 죽여야 그들처럼 강해질 수 있었다. 요즘처럼 비교적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도 논조 자체에는 상호도 동의를 했다. 일부 세세한 내용에서는 의견이 좀 달랐지만.
효은은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나빛이 상호의 옷자락을 잡고 속삭였다.
“선생님. 같이 인사하러 가요.”
아는 사람을 만나 잔뜩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상호는 별로 만나러 가기 싫었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얘들아. 쌤 나빛이랑 잠깐 이야기하고 올게.”
“네.”
지윤이 잘 알겠다는 듯 씩씩하게 대답했다. 세희와 태화는 어리둥절해했지만 그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상호는 나빛을 데리고 강당 밖으로 빠져나왔다.
복도에서는 효은이 해련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머, 강 선생.”
해련이 나빛을 흘끗하고는 상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수녀님한테 용건이 있나 보죠?”
상호는 뭐라 대답도 못하고 우물거렸다.
해련은 효은의 손을 잡았다.
“하여튼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녀님.”
“아니예요. 교장선생님. 또 불러주세요.”
효은은 사람 좋은 척 웃었다.
해련은 다시 강당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강당 문을 열기 전에 상호에게 눈을 찡긋했다. 전우끼리 회포 잘 풀고 오라는 뜻인 듯했다.
둘이 실제로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리라.
문이 닫히자마자 효은이 담배를 꺼내들었다.
“휴우, 참느라 죽을 뻔했네.”
“애들 있는데 미쳤냐?”
상호는 담뱃갑을 뺏어들었다.
“그 길지도 않은 시간을 못 참고……. 좀 끊지 그래.”
“그거 안 주면 나 진짜 죽는다.”
효은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말은 쉬이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전에 들은 내용이 있어서.
상호는 마지못해 담뱃갑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바로 한 개비를 뽑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쓰읍……. 어째 맛이 없네. 야, 쩔뚝이 인간라이터.”
“꺼져.”
“흥…….”
담배를 빠는 그녀에게 나빛이 손을 번쩍 들어 인사했다.
“수녀님.”
효은은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지냈어?”
“네. 헤헤. 강연 잘 들었어요.”
상호는 혀를 찼다. 마침 강연 이야기로 할 말이 있었다.
“애들 놀러 온 건데 굳이 그렇게 군기를 잡아야겠어?”
“군기는 무슨…….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야.”
“세상에 필요없다느니 할 필요는 없잖아. 자기 몸하고 옆사람 지킬 만큼으로 충분할 수도 있는 거지. 애들한테 뭘 바라는 거야?”
“니가 그런 말 할 처지냐?”
효은이 눈을 치켜떴다.
“너한테 제일 필요한 이야기잖아. 너 계속 그렇게 살 거야? 언젠가는 해결해야지. X급은 아니더라도 좀 비빌 만한 헌터들이 나와야 할 거 아니야.”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나빛에게 말했다.
“잠깐 들어가 있어.”
나빛은 강당으로 총총 걸어가면서도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싸우시면 안 돼요.”
“안 싸워. 여기서는.”
그는 나빛이 안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허공섭물로 주변의 모든 문을 걸어잠궜다. 효은도 방어막을 펼쳐 소리를 막았다.
상호의 눈이 효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저번부터 이상해.”
“뭐가?”
“저번엔 머리카락이니 술담배니 하더니 오늘은 무슨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하잖아. 말해 봐. 무슨 문제 있어?”
“……눈치가 빨라졌네.”
효은은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모르는구나.”
“말을 하라니까?”
상호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이를 갈았다.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너 어디 아파? 왜 말을 못 하는 건데?”
“내가 그걸 말해버리면…….”
잠깐 동안 효은의 눈빛이 쓸쓸하게 보였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으니까.”
“내가 너까지 걱정해야겠어?”
상호의 짜증에 효은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피식 웃어버렸다.
“네가 나를 걱정해?”
“물론 아니지 씨발년아. 나빛이도 너랑 같은 증세잖아. 그거 때문이지 뭔 니걱정이야. 무슨 병이야?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말을 해!”
“병…… 그래. 병이지.”
그녀는 다 태운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쿡쿡 웃었다.
“병이고, 중독이야. 병이면서 중독인 거. 그게 뭔지 잘 생각해 봐. 너도 아마 알고 있을 거야. 아니……. 네가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지도.”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됐어. 좆까. 어차피 그렇게 계속 놀려먹을 생각이지?”
“뭐라는 거야, 븅신아. 지가 눈치없는 걸 탓해야지……. 근데 너.”
“뭐.”
“교사 일은 재밌냐? 할만해?”
상호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뭔가 수상한 낌새를 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교사하게?”
“그냥 물어보면 안 되냐?”
“아니, 뭐…… 힘들어도 할만해. 난 나름 만족중이고……. 그래서 왜?”
“그냥이라고. 그냥.”
효은은 꽁초를 즈려밟고 돌아섰다.
“어쨌든 알았어. 나쁘지 않은가 보네. 난 간다. 눈치 좀 기르고, 고민 잘 해보고, 나빛이한테 잘하고.”
주변을 감싸던 보호막이 풀어졌다.
상호는 문을 막던 기를 거두고, 멀어지는 효은의 뒷모습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나 있는 줄 뻔히 알면서 강연 와 놓고는…….’
은글슬쩍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일 테다.
이제 그녀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윤곽은 잡히는데, 무엇을 원하는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계속 만나려 하는 것 같은데.
‘지가 말 안하면 나는 모르는 거지, 시발…….’
그는 찝찝한 마음으로 강당에 돌아갔다.
첫날밤
“와~ 진짜 하루종일 강연만 들었네.”
“넌 자기만 했잖아.”
태화는 진이 다 빠져서는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이불 위에 쓰러졌다. 신발을 벗던 세희가 한 마디 했다.
아이들을 방에 데려다준 상호는 문 밖에서 핸드폰을 보았다.
지금은 오후 8시.
“다들 씻고 놀아. 10시에 재울 거니까 일찍 씻을수록 많이 노는 거야.”
“쌤은 언제 저희랑 놀아요?”
“씻고 나면 올게. 이걸로 너희들 핸드폰 아무거나 전화해.”
상호는 자신의 핸드폰을 세희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잠금이 걸려있지 않았다. 부대원들 번호는 그냥 외워서 썼기 때문에 연락처에 적힌 것은 학교와 관련한 사람들밖에 없었다. 사진 또한 학교 서류나 아이들을 찍은 것뿐.
세희는 그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연락드릴게요.”
“응. 이따 보자.”
상호는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건흠은 이번에도 방에 없었다. 학생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상호는 그냥 지금 씻기로 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건흠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한숨을 쉬며 넥타이를 풀어 침대에 던졌다.
“아이고, 이제야 보는구만.”
“완전히 지치셨네요.”
“애들이 너무 많아. 들떠서 말도 잘 안 듣고…….”
건흠은 상호를 보며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적으니까 편하긴 하지? 뭐 신입 교사니까 당연한 거지만.”
“내년에는 저도 열몇명쯤 더 받겠죠, 뭐.”
상호는 가방에서 핸드폰들을 꺼내 전원을 켜두었다.
“주 선생님은 애들 핸드폰 걷으셨어요?”
“걷었지.”
“언제 주실 거예요?”
“일찍 줘버리면 핸드폰만 할 거 아냐. 애들끼리 좀 놀으라고 10시에 준다고 했지. 자넨?”
“저는 그냥 제 핸드폰 주고 다 씻고 나면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려고요.”
“방이 하나니까 그렇게 해도 되겠구만. 근데……. 자네 씻은 거 아니야?”
건흠이 고개를 기웃하며 상호의 다리를 가리켰다. 상호는 긴바지 트레이닝복에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러다 무좀 걸려. 조심해.”
“발 밑에 쿠션을 붙여놔야 해서요. 이따 또 걸어다닐 거니까.”
“쯧쯧, 뭐 자네도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다니는 거겠지만…….”
상호는 씩 웃으며 건흠의 측은해하는 눈빛을 흘러넘겼다.
부대원이 아닌 사람과 숙소를 같이 쓴 적이 없어서 이렇게 변명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도 나름 잘 갖다 붙였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자네는 좀 비밀이 많구만. 옥상에서 보여준 것도 그렇고. 눈이랑 다리도 그렇고. 교장선생님이 특히 예뻐하는 걸 보면 전쟁 때문이라고 짐작은 하는데.”
“많이 알고 계시네요.”
“소문도 많더군.”
건흠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학생 때리고 부수고 화낸다고. 그런 소문이 돌던데.”
“아, 그건…….”
상호는 아이들이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애들이 장난치는 겁니다.”
“물론 그게 뜬소문이라는 건 알지. 자네가 그랬으면 교장선생님이 가만 놔뒀겠나. 나도 그런 소문은 안 믿어. 그런데…… 자꾸 누가 악의적으로 소문을 퍼트리는 것 같단 말이야. 낙하산이니, 학생한테 몹쓸 짓을 한다느니…….”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볼 땐 선생들 중에 있는 것 같아.”
들으면 들을수록 한 놈의 이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상호는 모르는 척 어깨를 들썩였다.
“어차피 소문으로 끝나겠죠, 뭐. 실제로 그런 것도 아니고 근거도 없으니까.
딱히 불이익 받는 것도 없고요.”
“기분 나쁘잖아. 나나 설미 선생은 자네가 그런 인간이 아닌 걸 아는데…….”
“사필귀정이라고 하잖습니까.”
그래도 짜증은 났다. 신경쓰기 귀찮은 일을 신경쓰게 만드는 것이.
그 헛소문을 퍼트리는 자가 누군지 알고 싶기도 했다. 정말로 그가 예상하고 있는 인물일까.
“어쨌든 주 선생님만이라도 알아주셔서 다행이죠. 전 그거면 되는데…… 그래도 좀 궁금하긴 하네요. 혹시 누가 또 그러면 대체 누구한테 들었는지 좀 물어보시고 알려 주세요.”
“그러지.”
건흠은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상호는 침대에 드러누우며 생각했다.
‘맘껏 소문 내라지. 증거가 생길 리 없으니까.’
그때 침대에 놓인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뭐야, 벌써 다 씻었어?’
그는 당황하며 아이들의 핸드폰들을 내려다보았다.
전화가 온 핸드폰은 검은색 스마트폰이었다. 화면에는 그의 번호와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쌤♡
상호는 그 이름을 보고 고개를 기웃했다.
‘태화 핸드폰인가 보네. 아니면 지윤인가…….’
그를 쌤이라고 부르는 아이는 그 둘뿐이니까. 상호는 별 생각 없이 핸드폰들을 챙겼다.
‘아, 참. 카드도 가져가야지.’
그래서 가방에서 플레잉 카드도 꺼내어 아이들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앞에 도착한 상호는 문을 두드리며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선생님 왔다.”
“야, 쌤 왔다, 쌤!”
“들어오세요!”
그가 문을 열자마자 면상에 베개가 날아들었다.
‘음. 한 번쯤 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
상호는 침착하게 베개를 잡았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베개로 아이들의 등을 두들겼다. 두꺼운 베개가 가느다란 연검처럼 현란하게 휘어지며 아이들의 빈틈을 공략했다.
“아야! 아야! 항복!”
“쌤! 죄송해요! 꺅!”
“어허, 피해. 피해. 이것도 다 수업이야.”
한바탕 베개싸움을 끝낸 상호는 베개를 이불 위에 던지고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나눠주었다.
“자, 가져가.”
“네.”
지윤이 먼저 자기 핸드폰을 가져갔다. 검은색 스마트폰은 아직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상호는 태화에게 그 검은색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저 이거 아니에요.”
“……그래?”
“제 건 이거요.”
태화는 그의 손에서 분홍색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그럼 이 검은색 스마트폰은 누구 것일까. 의아해하는 상호의 앞에 세희가 다가와 그 검은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제 거예요.”
“그래? 난 쌤이라고 저장되어 있길래…… 태화 건 줄 알았어.”
세희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흠칫하더니, 곧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선생님 핸드폰…… 여기요.”
상호는 그녀가 내민 자신의 핸드폰을 받으며 씩 웃었다.
“세희가 언제 쌤이라고 부르는지 봐야겠다. 기다려지는데.”
“안 기다리셔도 돼요…….”
세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태화가 이불에 앉아 그 위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쌤! 앉아요!”
“근데 너희 다 씻은 거 맞지?”
시계를 보니 8시 30분. 여자 넷이 겨우 30분 만에 샤워를 끝냈을 리 만무했다.
상호는 이불에 앉으며 넷을 둘러보았다. 다들 반팔에 반바지로 편한 옷차림이었다. 세희와 나빛은 뽀송뽀송해 보이는 것이 확실히 씻고 나온 듯했다.
반면에 태화와 지윤은 어째 얼굴에 물만 대충 적신 것 같았다.
“둘이 이리 와 봐.”
그는 태화와 지윤을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둘은 그의 앞에 다가와 앉았다.
“씻었어, 안 씻었어?”
“씻었어예!”
“머리 대 봐.”
상호는 그녀들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애매한데…….’
딱히 나쁜 냄새가 나진 않았다. 꽃향기가 살짝 나긴 하는데 방금 씻었다고 보기엔 향이 너무 약했다.
“진짜 씻었어?”
“네!”
태화와 지윤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는 아이들의 목덜미 냄새를 맡으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히히…….”
“저희 믿으시죠?”
지윤은 엉큼하게 웃었고, 태화는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상호는 세희의 찌푸린 눈살을 보고 진실을 깨달았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로 하고 카드를 꺼내 이불 위에 놓았다.
“자. 그래서 뭐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