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501)

***

버스는 휴게소에서 멈췄다.

화장실을 가고 싶은 아이들은 화장실을 갔고, 출출한 아이들은 간식을 사러나갔다. 상호는 딱히 마려운 것도 없고 배도 안 고파서 버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세희도 안 나가고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버스에 남은 것은 그와 세희 둘뿐이었다.

“세희 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네.”

“이제 몸무게 몇까지 나가?”

“43 찍어보긴 했어요. 지금은 42랑 43 사이에서 왔다갔다해요.”

상호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가서 뭣 좀 먹고 와.”

“아녜요, 괜찮아요…….”

“43은 기본으로 넘겨야지. 45까지만 찍어보자. 그 위로는 안 시킬게.”

“아…….”

세희는 감사해하는 표정과 곤란해하는 표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카드를 받고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른 애들도 다 사줘. 특히 지윤이. 지윤이가 제일 잘 먹으니까……. 그리고 다른 반 애들은 모르게 해. 어느 반 선생님은 사줬는데 어느 반 선생님은 안 사줬네 이런 소리 나오면 안 되니까. 뭔지 알지?”

“네.”

“맛있게 먹고 와.”

“감사합니다.”

세희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

머지않아 설미의 학생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녀들의 손에 들린 먹을거리를 보았다.

“야, 여기 개비싸다. 핫도그가 하나에 5천원이야. 어릴 땐 2천원이었던 것 같은데…….”

“휴게소가 다 그렇지 뭐.”

불평을 하면서도 사기는 산다.

남들 다 사니까 따라 사는 심리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게 연봉을 2억씩 받는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잘 사주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교육적으로도 좋지 않지만, 대부분이 교사보다 돈 많은 집의 아이들이었기에.

돈이 별로 없는 세희와 태화, 지윤이 특이한 경우였다.

얼마 후에 지윤도 버스로 돌아왔다.

“쌤. 쌤 드실 거 사왔어요.”

그녀의 손에는 묘기 수준으로 갖가지 먹을거리들이 들려 있었다. 핫도그, 핫바, 오뎅, 떡볶이 그릇, 알감자와 마른 오징어에 호두과자까지.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너 다 먹어.”

“에이, 드세요오~.”

“남는 건 세희나 줘.”

“세희 알감자 하나 먹고는 배터져 죽을라 하던데요.”

‘사람 맞나?’

상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알감자로 배가 터지려면 임신 몇 개월차 태아의 위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뒤이어 세희와 태화, 나빛도 버스에 올랐다. 그녀들은 손에 하나씩 간식을 들고 있었다. 세희는 아이스크림, 태화는 소세지 떡꼬치, 나빛은 옥수수 버터구이.

상호의 앞에 음식들이 들이밀어졌다.

“드세요, 선생님.”

“왜 다들 그러냐. 나 신경쓰지 말고 너희 먹어.”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세희가 몰래 건네준 체크카드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흘리지 말고 깨끗이 먹어.”

“네~.”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

수련원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산의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현여고의 수학여행은 1학년과 2학년이 함께 가는 대규모 행사였다. 1학년 285명과 2학년 302명, 총 587명의 인원이 머물러야 하는 만큼 수련원의 크기도 상당히 컸다.

그리고 그렇게 인원이 많은 만큼 담임이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소지품 검사는 담임선생님이 해 주세요. 핸드폰도 걷어 주시고.”

강당 앞쪽 단상에서 수련원 직원이 말했다.

상호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핸드폰 줘.”

“꼭 내야 해요?”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핸드폰을 산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잘 때 애들한테 이것저것 배우려고 했는데…….”

“자기 전에 돌려줄게. 지금은 수련원 활동 집중해야 하니까.”

상호는 아이들의 핸드폰을 걷어 주머니에 넣었다.

“가방도 한번 보자.”

역시 제일 위험한 건 태화다. 그는 태화의 트렁크 가방을 잡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상한 거 없지?”

“열어 보세요.”

태화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상호는 그녀의 말대로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열자마자 속옷이 보였다.

그래서 조용히 닫았다.

‘남선생이 검사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상호는 큰 깨달음을 얻으며 가방을 태화에게 돌려주었다.

“믿는다, 태화야.”

“안 믿으셔서 직접 확인해 보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정곡이었지만 상호는 못 들은 척했다.

수련원 직원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검사 다 끝난 반은 방에 짐 옮기고 돌아오겠습니다. 각자 방으로 이동해 주세요. 학생은 3층 4층이고, 교사는 2층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너희 방 어딘지 알지? 몰라도 가서 찾으면 문 앞에 적혀 있을 거야.”

“네.”

“가서 짐 풀고 있어. 올 시간 되면 내가 부르러 갈게.”

“네.”

아이들이 대답하자 상호도 그의 짐을 풀기 위해 교사들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교사들 방은 2인실이었다. 상호는 문 앞에 붙여진 종이를 확인했다. 누가 자신과 같은 방을 쓰는지.

‘건흠 선생님이군.’

다행이었다. 다른 남선생들하고는 친하지를 않아서.

아마 나이가 되는 건흠이 그와 같이 방을 잡겠다고 선생들에게 밀어붙인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건흠은 아직 안 온 듯했다. 상호는 짐을 대충 구석에 놓고 방의 양옆 벽에 붙은 침대들 중 한 쪽에 벌렁 누웠다.

‘11시에 모이랬던가. 10시 20분이니까…… 30분만 쉬다가 애들 데리러 가면 되겠네.’

그런데 주머니에서 뭔가가 거치적거렸다.

방금 걷은 아이들의 핸드폰에 생각이 미친 상호는 핸드폰들을 꺼내어 확인했다.

‘다들 안 껐네. 배터리 아끼려면 꺼놔야겠지?’

그는 제일 먼저 세희의 핸드폰을 잡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세희의 잠금화면은 벚꽃 공원에서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응?”

상호는 당황하며 태화의 핸드폰도 전원을 껐다. 그녀 역시 그와 찍은 벚꽃 사진이었다. 귀에 꽃을 꽂은 버전.

지윤도 마찬가지.

나빛은 아직 설정을 안 했는지 기본 잠금화면 그대로였다.

‘얘들은 누가 보면 뭐라고 말하려고 이런 걸…….’

상호는 전원이 꺼진 핸드폰들을 짐가방에 집어넣으며 한탄했다. 누가 보면 분명히 오해할 텐데. 그게 학생이든, 선생이든.

단체사진을 보여주면 해명할 수 있겠지만, 귓등에 꽃을 꽂은 것은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상호의 바람이었다.

그렇다고 남의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맘대로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오늘내일 사진 많이 찍어 줘야겠다. 다른 사진 쓰라고…….’

그는 한숨을 푹 쉬며 10시 50분이 되기를 기다렸다.

병이고 중독인 것

건흠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간단히 인사하고는 짐만 풀고 바로 학생들을 데리러 나갔다. 아무래도 애들 자는 방이 여러 곳이라 그런 듯했다.

10시 50분이 되자 상호도 슬슬 일어나서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3층의 방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는데, 아무도 나오려는 기미가 없었다.

‘그새 자나?’

그는 고개를 기웃하고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머잖아 세희가 문을 열고 나왔다.

“네, 선생님.”

“강당 가자. 다른 애들은 뭐 하고 있어?”

세희는 말없이 뒤돌아서 방 안을 가리켰다. 상호는 방 안으로 들어서서 세희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벌써 이불 깔고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이게 매일 놀 수 있는 비결인가?’

상호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아이들의 머리맡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두터운 요를 하나만 깔고, 그 위에 셋이 누워 얇지만 폭신한 이불을 덮었다.

세희가 빠져나온 자리만 비어있고 다들 옹기종기 모여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에서 햇빛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방을 좋은 데 잡았다고 생각했다. 볕이 참 잘 드는 것이.

‘확실히…… 한번 누우면 못 일어나게 생겼네.’

“얘들아, 일어나자.”

상호가 쪼그려 앉아서 어깨를 흔들자 한 명씩 살며시 눈을 떴다.

나빛은 벌떡 몸을 일으켰고, 태화는 누운 채로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지윤은 데굴데굴 굴러서 이불을 몸에 감았다.

그리고 비몽사몽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5분만…….”

“지윤아, 일어나야지.”

“5분만요, 아빠…….”

지윤의 어깨를 향하던 상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어렸을 적 꿈을 꾸나.’

그는 고개를 돌려 조용한 목소리로 태화에게 물었다.

“태화야. 싸인펜 가져왔지?”

“헐, 어떻게 알았어요?!”

“뻔하지 뭐. 줘봐.”

상호는 태화에게서 싸인펜을 넘겨받았다.

“수성 맞냐?”

“네.”

“너희는 먼저 강당 가 있어. 가서 설미 선생님 옆에 있으면 돼. 누가 선생님 어디 갔냐고 물어보면 학생 아파서 돌보고 있다고 해.”

“네.”

아이들이 방을 나가자 상호는 싸인펜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10년 가까이 펼쳐본 적 없는 예술혼을 지윤의 얼굴에 꽃피우기 시작했다.

‘눈탱이 밤탱이는 기본인데……. 그래도 여자애한테 심하게 할 수가 없네.’

그는 지윤의 오똑한 코끝에 점을 그리고 양 뺨에 고양이 수염을 그렸다.

넷 중에서 제일 키도 크고 어른스럽게 생긴 지윤이었지만, 곤히 자는 모습은 퍽 귀여웠다.

한 쪽에 세 줄씩. 정성들여 마지막 여섯 번째 줄을 그어나가는데.

갑자기 지윤이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야이 썅간나 가스나……어, 어윽?!”

지윤은 자신의 얼굴에 낙서를 하던 것이 태화가 아니라 상호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식겁하며 뒤로 기었다.

“쌔, 쌤이 왜 여깄습니꺼…… 여깄어요?”

“너희 데려가려고 왔지.”

“다른 애들은요?”

“먼저 보냈어. 네가 잘 안 일어나서.”

“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해요. 그런데 쌤…….”

“응.”

“저 혹시…… 이상한 말 했어요?”

어렴풋이 기억은 하지만 꿈과 구별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 말 안 했는데. 그나저나 너 얼굴 좀 봐라.”

그는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셀카 모드로 지윤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화면을 확인한 지윤이 당황했다.

“……쌔애앰!”

“잘 그리지 않았냐?”

“이게 뭐예요오……!”

지윤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상호는 그쪽으로 걸어가서 지윤이 얼굴을 씻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지윤은 잠시 손을 멈췄다.

“……아뇨.”

“그럼 좋은 꿈?”

“아니요.”

그녀는 세면대 앞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냥 평범한 꿈이요.”

“그럼 걱정할 필요 없지?”

“네.”

기껏 놀러왔는데 그런 꿈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상호도 그래서 그녀에게장난을 친 것이었다.

그는 다시 싸인펜을 들고 슬그머니 지윤에게 다가갔다.

지윤은 고개를 숙이고 세수를 하느라 그가 뒤에 다가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푸아……, 어푸, 어푸…….”

상호는 지윤이 얼굴을 들기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낙서가 다 지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보았다가, 등 뒤에 상호가 와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쌔, 쌤? ……앗!”

상호는 순식간에 지윤의 뺨에 고양이수염을 다시 그려넣었다.

그가 낄낄거리며 깽깽이발로 화장실에서 도망쳐 나가자 지윤이 황당해하며 빽소리쳤다.

“쌔애애애앰! 이게 무신 일입니꺼! 머스마들도 안 할 짓을……!”

“미안, 미안. 어릴 때 생각나서. 낄낄낄…….”

“난 모릅니더! 쌤이 씻겨 주이소!”

지윤이 발을 구르며 아랫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상호는 쓰게 웃으며 화장실로 돌아와 손에 물을 묻혀 지윤의 뺨을 문질렀다.

“미안해.”

“쌤이 그리 웃어삘 줄 몰랐심더. 다른 아들이 들으면 깜짝 놀라 자빠지겠네예.”

지윤이 상호의 손이 닿고 있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상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실실거리며 그녀의 동그란 볼을 씻겨 주었다.

“됐다. 다 지웠다.”

“정말…….”

“그런데 지윤아.”

“네?”

지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호는 코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쌤한테 사투리 안 쓰는 이유가 있어?”

“저, 저 방금 사투리 썼어요?”

지윤이 당황해했다. 아마 흥분하면 의식 없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안 쓰려고 하는데…….”

“뭐가 죄송해? 써도 돼. 누가 촌스럽다고 놀려서 그러는 거야? 다른 애들한텐쓰는 것 같던데.”

“그게, 어른들한텐 버릇없어 보이니까 쓰지 말라고…….”

“누가 그래?”

“중학교 때 선생님이요.”

상호는 잠시 고민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쌤한텐 그런 거 신경쓰지 마. 내가 너보다 완전 어른은 아니잖아.”

“그래도…… 돼요?”

“너는 쌤한테 수플렉스를 먹여 놓고 그런 걸 신경써?”

“아.”

지윤은 뺨을 긁으며 멋쩍은 듯 시선을 피했다.

“그라믄…… 쌤한텐…… 써도 됩니꺼?”

“응.”

“윽수로 으색하네예…….”

“너 맘대로 해. 근데 난 네 사투리가 좋다.”

그 말에 지윤이 웃었다.

상호는 수건으로 지윤의 얼굴을 닦아주고 엄지로 등 뒤의 문 밖을 가리켰다.

“가자. 너무 늦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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