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저녁.
상호는 핸드폰으로 공개 무공을 검색 중이었다. 협회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그가 지금 찾는 것은 성철의 무공이었다. 지윤에게도 심법을 가르쳐주려는 생각이었다.
‘반탄…… 반탄 뭐시기랬는데. 반탄강권공? 이거구나. 버전은…… 형이 배운 건 한참 옛날 것일 텐데.’
심법이 갱신된다고 반드시 좋아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개 심법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는 무공이니만큼 갱신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다. 뭔가 확실히 나아지는 게 있으니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철이 강했던 이유는 그 무공이 강해서가 아니라 몬스터를 많이 잡아서였기도 했고.
‘시기를 보니 형은 A02 버전이고, 최신은 B37…….’
변경점과 협회 소속 고수들의 평론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태화에게서 걸려온 영상통화였다.
‘뭐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어, 태화야.”
[쌤…….]
화면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태화가 나오고 있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얘 이상해요…….]
태화가 핸드폰을 돌려 곁에 있는 세희를 찍었다.
세희는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였다. 상호는 뭔가 잘못됐나 싶어 세희의 안색을 살폈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운기조식이야. 그냥 곁에 있어 줘.”
[그게 아니라…….]
카메라가 좀 더 아래를 비췄다.
세희의 손이 태화의 꼬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쪼물쪼물거리며.
[얘 이래야 집중이 잘된대요. 두 시간째인데 미치겠어요…….]
“잘 빼 봐.”
[저 꼬리 잡히면 힘도 못쓰고 순간이동도 못해요…….]
“아파서 그래?”
[아픈 건 아닌데…….]
“그럼 나중에 세희한테 말해줄게. 꼬리 잡는 거 싫어한다고.”
[꼬리 때문이라기보다는…….]
태화가 죽을상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세 시간씩 옆에 있으려니까 심심해 죽을 것 같아요…….]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너무 애들한테 다 맡겨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쌤이랑 계속 통화나 할까? 너 통화료 나오니까 끊고 내가 걸게.”
[정말요?]
“대신 네가 이야기 꺼내줘야 돼. 쌤 말 길게 못한다.”
[괜찮아요. 쌤. 어제 세희가 뭐했는지 알아요? 칼 길들인답시고 열시 넘도록 기숙사 안 들어와서 사감쌤한테 대판 깨지고…….]
태화는 세희 뒷담으로만 남은 한 시간을 꼬박 채웠다. 상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태화를 세희에게 붙여준 게 정말 잘한 일이 맞는지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얘들 사이가 나쁜 건지, 그냥 그런 건지…….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조례시간. 상호는 교실로 걸어가다가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듣고 반사적으로 발소리를 죽였다.
잘 들어보니 싸우는 건 아니었다.
“왜 내는 못 만지게 카노!”
지윤의 목소리였다. 태화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나 만지게 하는 거 아니거든?”
“근데 와 세희는 만지는데! 니 내 싫나? 마, 함 대도!”
“뭘 대줘? 절대 안 돼.”
“저 바라 인마. 또 세희가 잡는데 가마이 있네. 나빛아. 쟤네 사귀는갑다. 그제?”
“응.”
“뭘 응이야, 바보야! 천세희, 너도 뭐라고 좀 해봐!”
태화가 분통을 터트려도 세희는 말이 없었다.
지윤이 다시 투덜거렸다.
“그래서 와 안 되는데? 말을 해 보라 마. 딱 한 번만 만지뿔자. 으이?”
“안 된다니까!”
“그라믄 세희는 와 되노!”
“얜 익숙해졌으니까 괜찮아.”
“내도 익숙하게 만들어 주께!”
“안 된…….”
태화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세희가 꼬리를 문지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윤이 혀를 끌끌 찼다.
“가시나 저거 무신 옷고름 잡힌 새색시마냥 조신~하게 있네. 둘이 결혼하면 애는 누가 낳노?”
나빛이 웃었다.
“학이 물어다 주겠지.”
“야는 또 뭔 소리고? 어쨌든 내는 오늘 만져봐야겠다카이. 그기 머라고 그리 비싸게 구는지 모르겄네. 딱 대라 인마.”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 이 집 꼬리 잘하네. 말랑말랑하네. 이래서 세희 니가 맨날 만짔나?”
“그냥. 뭔가 안심이 되더라.”
“끄트머리가 맨들맨들하니 만지기 좋다야. 이 좋은 걸 여태 혼자 가져뿟노.
나빛이 니도 와서 만지라.”
“응.”
빨리 구해 줘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교실로 걸어갔다.
그가 교실 문을 열었을 때는, 세희가 만질 때보다 딱 세 배 붉어진 얼굴의 태화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다른 아이들에게 꼬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수학여행
“쌤.”
“응?”
“저희 언제 놀러 가요?”
수업 중에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태화……가 아니라 지윤이었다.
칠판에 글씨를 적던 상호는 뒤로 돌아섰다.
이때다 싶었는지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시험 끝나면 놀러 가자고 했잖아요~.”
“약속했으면서~.”
그는 교탁을 짚으며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너희 내일 수학여행 가는 거 알지?”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이 수학여행이다.
“굳이 따로 놀러가야 할까? 거기 가서도 놀 거고, 갔다오면 피곤할 텐데…….”
“대신 금요일이 어린이날이잖아요.”
“금요일에 가요~.”
“너흰 그렇게 놀면 안 지치냐?”
상호는 혀를 내둘렀다.
놀고 수련하고 놀고 대련하고. 스물세 살 남자인데도 여고생 체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일단은 토요일에 가는 걸로 하자.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너희가 금요일에 쉬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그럴 일 없을걸요.”
지윤이 씩 웃었다.
‘……그럴 것 같긴 한데.’
상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너희 통신문 봤냐? 준비물 다 봤어?”
“네!”
“읊어 봐.”
태화가 손을 번쩍 들었다.
“팩소주! 화투패! 트럼프 카드!”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상호의 손가락에서 지탄이 날아가 태화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아얏!”
“무조건 검사할 거야. 절대 가져오지 마.”
“힝.”
태화는 이마를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윤은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지, 유난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희 가면 뭐 해요?”
“뭐, 협동게임 같은 거 하고. 진로 관련해서 강의 오고. 그런다나 봐.”
“엥, 여행인데…… 관광지 안 가요?”
“여행은 여행이지. 수련원으로 가는 여행.”
“으엑……, 수련회예요?”
그녀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너희 평소에 하는 게 수련인데 더 시키겠냐. 그냥 친구들이랑 가서 놀고 자고 오는 거야. 그러라고 중간평가 직후에 가는 거고.”
“쌤도 같이 가요?”
“같이 가지.”
“그럼 같이 놀아요?”
“그렇겠지.”
그러자 지윤이 씩 웃었다.
“그럼 저희가 쌤 가방에 카드 넣어놓을게요.”
정말 열심히 놀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러라고 가는 거니까. 놀 수 있을 때 확실히 놀아두는 것이 좋았다. 게으른 아이들도 아니니까.
그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 대신 카드게임은 선생님 앞에서만이야.”
“아싸~!”
지윤과 태화가 계획대로 되었다는 듯 하이파이브를 했다.
***
다음 날.
교정에는 견학 때처럼 버스들이 들어와 있었다.
상호의 반은 그때와는 달리 짐도 있고, 사람도 한 명 늘었다. 덕분에 그와 아이들은 설미의 반과 같은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
상호는 아이들이 트렁크에 짐을 실은 것을 확인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설미가 맨 앞자리 창가에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예, 좋은 아침이요.”
“상호 씨, 애들 다 왔어?”
그는 아이들이 어디 앉았는지 확인했다.
다들 설미가 앉은 곳의 뒤쪽에 모여 앉아 있었다. 앞줄 창가에 세희, 그 옆에 나빛. 뒷줄 창가에 지윤, 그 옆에 태화.
넷밖에 없어서 한눈에 확인이 되었다.
“네. 다 왔어요.”
“응, 준비 다 됐다고 보고할게~.”
설미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상호는 그 옆에 앉아 벨트를 맸다.
“다들 벨트 매라.”
“네!”
그의 반 아이들에게 한 말이었는데, 설미의 학생들까지 다같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3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의 우렁찬 대답에 상호는 순간 식겁했다.
‘어우, 깜짝이야. 목소리 엄청 크네…….’
곧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가 학교를 나와 도로에 도착하자마자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쌤, 과자 드실래요?”
지윤이 소리치자 상호는 손을 뒤로 뻗었다.
“조금만 줘 봐.”
“나빛아, 이거 쌤한테.”
곧 그의 손에 과자가 수북이 놓였다.
상호는 손을 앞으로 가져와 설미에게 내밀었다.
“드실래요?”
“응, 이것만 하구.”
설미는 열심히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건 뭐예요?”
“학부모님들한테 출발했다고 문자 보내는 거야. 요즘 이런 거 중요해.”
그 말을 들은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며 몸을 뒤로 돌렸다.
“나빛아. 한 장만 찍자.”
“아, 네.”
나빛은 양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양쪽 볼에 붙이고 방긋 웃었다.
사진을 찍은 상호는 원래대로 돌아앉으며 봉진에게 사진을 보냈다. 비서의 핸드폰 번호가 아니라 며칠 전에 알게 된 봉진의 개인 핸드폰 번호로.
-잘 갔다 오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수학여행 동안 몇 장만 더 부탁하겠네.
-예.
안 그래도 다들 많이 찍어 둘 생각이었다. 수학여행은 자주 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상호는 옆을 돌아보았다가 설미가 아직도 문자를 작성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내용이 열 몇 줄은 되었다.
“뭘 그렇게 길게 써요? 대충 써서 보내지…….”
“안 돼. 이런 거 신경쓰는 부모님들 많다구.”
“그럼 입이나 벌려 봐요.”
“응?”
그는 그녀의 입에 과자를 쏙 넣어 주었다.
그러자 뒤에서 지윤과 태화가 소리쳤다.
“앗! 쌤이 내 과자 다른 선생님한테 줬어!”
“신고해! 부정청탁및금품등수수의금지에관한법률로 신고해!”
뒷자리에서 어떻게 알았을까. 상호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버스 앞쪽에 달린 거울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그와 설미가 앉아 있는 맨 앞자리가 학생들에게 정통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그는 그게 뭐 어떻냐는 식으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별것 아닌 게 맞았다.
“과자 하나 가지고 막 그러지 마라. 직장 상사한테 예쁨 받으려고 주는 거지…….”
“예뻐요?”
“강쌤! 저희 쌤 예뻐요?”
이제는 설미의 학생들까지 가세했다.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건 태화만의 기술이 아닌 모양이었다.
“꺄하~ 분위기 너~무 좋다~. 눈에서 꿀 떨어져~.”
“음~. 강쌤이면 특별히 합격.”
“얘, 얘들이 정말…….”
설미가 얼굴을 붉히며 창가로 몸을 돌렸다.
“상호 씨, 미안해. 우리 애들이 좀 짓궃어…….”
“아뇨,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이들이 단체로 따라하면서 깔깔 웃었다.
“꺄악! 괜찮대! 괜찮대! 강쌤이 임쌤 괜찮대!”
“스윗한 거 봐. 아, 나 정신 나갈 것 같애…….”
태화가 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기 많네. 분명 뒷담 오지게 까놨는데……. 안되겠다. 그냥 나 임신시켰다고 소문낼까…….”
그 말을 들은 상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얘가 날 아주 보내버리려고 하네…….’
입을 열수록 곤란해진다. 그는 아예 입도 귀도 막아 버리고 잠이나 청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