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501)

***

“이게 뭔…….”

봉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태연하게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어머님, 김치가 맛있는데 혹시 더 있으십니까?”

“아, 줄게요.”

유연이 김치를 새로 가져왔다. 봉진이 당황했다.

“자네 진짜로 여기서 살 거야?”

“아니요. 아침만 먹고 가겠습니다.”

상호는 밥을 넘기고 대답했다.

“어머님께서 나빛이 가르치는 거 허락해 주셔서요. 그래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꼭 한 끼 더 먹고 가라 하셔서…… 염치불구하고 신세 좀 졌습니다.”

“그래?”

봉진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연을 보았다.

“허락했어?”

“네.”

유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진심인 것 같아서. 그리고 나빛이 핸드폰 좀 사줘야겠어요.”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봉진에게는 이 상황이 정말로 낯선 모양이었다.

“뭐……. 사주라면 사주지. 오늘 같이 가든가.”

“진짜요?”

나빛이 활짝 웃었다.

상호는 묵묵히 밥을 먹으며, 나빛과 가족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에겐 십 년 가까이 느껴보지 못한 정다운 풍경이었다.

‘눈치를 안 보니까 밥이 훨씬 맛있구만.’

그는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말했다.

“어머님. 한 그릇 더 괜찮겠습니까?”

니 꼬리 쩔더라

결국은 대접 잘 받고 학교로 돌아왔다.

이렇게 나빛의 일은 해결이 됐고. 수학여행까지도 상담을 끝냈다. 봉진은 원래 수학여행까지도 수행원을 보내려 했던 모양이지만, 상호가 설득해서 그러진 않도록 했다.

그는 검과 함께 침대에 널브러졌다.

지금은 오후 한 시.

‘이제 세희 운기조식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려면 둘이 조용히 있을 곳이 필요했다.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세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희야.

답장은 순식간에 도착했다.

-네 선생님

-운기조식 가르쳐 줄게. 네 방으로 갈까, 아니면 선생님 방으로 올래?

-제가 갈게요

-지금 가면 돼요?

-응.

-금방 갈게요

상호는 문자를 확인하고 집을 쓱 둘러보았다.

놓은 게 없어서 딱히 치울 것도 없었다. 다만 방석이 없다는 것은 좀 아쉬웠다. 가부좌 틀 때 놓으면 좋은데.

‘침대에 앉혀야겠네.’

상호는 대충 구겨져 놓인 이불을 평평하게 정리했다.

학생 기숙사에서 교사 숙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곧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그는 허공섭물로 문을 열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가에서 세희가 고개를 숙이고, 태화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쌤~ 놀러왔어용~.”

“태화도 왔어?”

상호는 곤란해하면서 뒤통수를 긁었다. 운기조식할 땐 둘이 나은데.

그러자 태화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만 미워해…….”

“집중해야 되는 수업이라 그래. 들어와. 대신 조용히 해.”

“넹.”

그녀들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왔다.

태화는 전에 와본 적이 있었지만, 세희는 처음이었다. 세희의 눈이 바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상호는 소매를 걷으며 침대를 가리켰다.

“세희는 침대 위에 앉아. 태화는 좀 떨어져 앉고.”

“뭐 하려구요?”

“운기조식.”

태화는 머리맡에 걸터앉았고, 세희는 침대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상호는 세희의 뒤에 자리잡으며 물었다.

“세희 운기조식 할 줄 알지?”

“네.”

중학교 때도 기본 심법으로 운기조식을 하긴 한다. 다만 기본 심법의 운기는 큰 혈맥만 지나며 짧고 간단하게 끝난다. 덕분에 혈도의 명칭도 제대로 외우지 않았다.

하지만 상호가 지금 세희에게 해 주려는 방식은 혈도의 명칭을 외울 필요가 없었다. 위치만 기억하면 된다.

그는 세희의 등에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등에 손 올려도 돼?”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세희의 등에 손을 올렸다. 속옷의 툭 튀어나온 부분이 손바닥에 닿았다. 구태여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손바닥을 콕 누르고 있는 그 감각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모른 척 하면 될 일이었다.

“이제 내 내공을 네 몸에 넣을 거야. 그 다음에 천색창염강기공의 방식대로 혈도를 짚어나갈 거고. 잘 외워 둬.”

“네.”

“들어간다.”

그는 세희의 몸에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마자 세희가 몸을 움찔하며 침음했다.

“으…….”

“아파?”

“뜨겁고…… 욱신거려요.”

상호는 내공의 양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아직도?”

“조금…… 조금 괜찮아졌어요.”

“살살 움직여 볼게.”

“아윽!”

그가 기를 움직이기가 무섭게 세희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아, 아파요, 선생님…….”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타인의 혈맥을 다치지 않게 돌아다니는 것은 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옷 위로 하는 중이라서 더 그렇기도 했다. 혈도는 흐릿하고, 실보다 가느다란 세맥은 아예 느껴지지도 않았다.

“참을 수 있겠어?”

“기억을, 못하겠어요…….”

“뺄까?”

“빼주세요…….”

그는 어쩔 수 없이 내공을 거둬들였다.

세희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울상을 지었다.

“으…….”

“많이 아팠나 보구나.”

상호는 난처해하며 고민에 빠졌다.

사실 다른 내공심법이면 이런 식으로 가르칠 이유가 없었다. 혈도 순서 가르쳐주고 땡이다. 평범한 선생들이 이렇게 한 명 한 명 잡아가며 가르치진 않았다.

그러나 천색창염강기공은 고유 심법이었고, 혈도의 위치와 순서는 상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었다. 그도 혈도의 이름을 전부 외워 둔 건 아니었기에 말로 설명할 수도, 글로 써줄 수도 없었다.

“세희야. 미안한데.”

“네.”

“맨등에 손 올려도 됄까? 맨살에.”

그 말에 세희는 양 소매에서 팔을 빼어 옷의 품 속에 넣었다.

꼬물거리는 그녀의 옷 안쪽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준비됐어요.”

세희는 다시 소매에 팔을 넣고 그를 등져 앉았다.

상호는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속옷 없이 매끄러운 등이 손바닥에 닿았다.

보드라운 살결 아래로 제법 잔근육이 잡혀 있었지만, 그를 놀라게 한 건 몸통의 크기였다. 말라서 그런지 등이 놀랄 만큼 작았다.

뒤에서 태화가 깐죽거렸다.

“저도 벗어 놔요?”

“니가 무예가냐?”

상호는 다시 세희의 혈맥을 짚어주는 데 집중했다. 맨살에 손이 닿으니 혈맥의 크기를 파악하는 게 좀 더 쉬웠다.

‘생각보다 좁네. 살살 해야겠다…….’

수련도 했고 기본 심법도 부지런히 해둔 세희였지만, 상호의 기준에는 아직 못 미쳤다.

그는 내공을 아주 약간 집어넣어 혈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음 편안히 먹고. 아프면 말해.”

“네.”

그는 드디어 세희에게 천색창염강기공의 운기조식을 가르쳐줄 수 있었다.

몸속의 뜨거운 기운은 양은 적지만 강렬해서 어디를 지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희는 머릿속에 그 경로를 새겼다.

“허리 펴고. 호흡 조절해. 내쉬고. 들이마시고.”

그들은 눈을 감고 서로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30분이 넘게 지나자 태화가 심심한지 그의 옆을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녀를 곁눈질하며 한마디 했다.

“건들지 마라.”

“넹.”

그는 이어서 세희에게 말했다.

“이제 네 내공으로 살살 따라와 봐. 앞에서 먼저 갈 테니까.”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먼저 혈맥을 지나가고, 이어서 세희의 내공이 뒤를 따르는데, 태화가 세희의 옆을 기웃거리더니 웃옷 속으로 살짝 손을 집어넣어 브래지어를 꺼냈다.

그녀가 브래지어의 크기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애걔~.”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상호는 세희의 내공이 격하게 뒤틀리는 것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렸다.

“세희야, 진정해, 진정. 그러다 주화입마 온다.”

“으…….”

세희는 간신히 분을 삭였다.

운기는 한참 후에야 끝이 났다. 상호가 손을 떼자마자 온통 땀범벅이 된 세희가 침대에 고꾸라졌다.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가닥가닥 달라붙었다.

그는 손에 흠뻑 묻어난 세희의 땀을 자신의 허벅지에 대충 닦으며 물었다.

“힘들었어?”

“조금……. 그래도 개운한 것 같기도 해요.”

태화는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해 볼래요.”

“네가 해서 뭐 하게? 무공을 쓸 것도 아니고.”

“느낌이 궁금해요.”

“……그럼 앉아 봐.”

“브라 풀어요?”

“아니, 넌 안 풀어도 돼.”

어린 여자 혈맥이 어떤 상태인지는 파악이 끝났다. 태화는 세희보다 훨씬 좁겠지만 큰 혈도로만 몇 번 왕복해줄 테니 상관없었다.

상호는 태화의 등에 손을 얹고 내공을 집어넣었다.

“들어간다. 몸 갑자기 움직이지 마.”

“음…….”

그가 기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태화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왔다갔다 하는 게 기분이 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간질간질하니 오묘한……. 에이, 겨우 이거 가지고 그렇게 힘들다고 난리를 친 거야?”

“넌 훨씬 약하게 받는 거야.”

“에이, 그럼 저도 세희한테 하는 것처럼 해주세요!”

“그럼 너 죽어.”

상호는 단호히 말하며 내공을 거뒀다.

“이제 됐지? 한번 느껴 봤잖아.”

“에이……. 저도 개운할 때까지 해주세요!”

“그건 네 내공으로 운기해야 그렇게 되는 거야. 차라리 운동을 해.”

“에이…….”

태화가 에이 에이 거릴 때마다 세희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상호는 그녀들이 왜 그러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다 세희를 향해 말했다.

“잘 외웠어? 이제 혼자서 할 수 있지?”

“네.”

“한번 보여줘 봐.”

상호는 그녀의 등에 다시 손을 얹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운기를 관찰하기만 했다.

방향은 다 외웠는데, 기가 움직이는 속도가 느렸다. 상호는 손을 떼었다.

“잘하네. 그래도 좀 더 기에 집중해야겠다. 속도가 너무 느리면 효과가 없어.”

“옆에 누가 있어서 그런지 집중이 안 돼요.”

“운기조식은 옆에서 누가 지켜주기도 해. 그냥 옆에 누가 있어도 집중하는 연습을 하는 게 좋아. 마침 태화 있네. 태화야.”

“네?”

“네가 앞으로 세희 운기조식할 때마다 옆에 있어 줘.”

태화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세 시간?”

“네? 세 시간 씩이나 옆에 있으라구요?!”

“그냥 옆에서 뒹굴고 있어도 되니까. 마법서를 읽든, 핸드폰을 하든…… 집중하는 거 도와주고, 누가 문 두드리면 대신 열어주고. 전화 오면 부재중 해주고. 그 정도만 하면 돼.”

“끄응…….”

그녀는 영 맘에 들지 않는지 꿍시렁거리면서도, 이내 마지못해 승낙했다.

“알았어요.”

“고마워. 그럼 이제 끝내자.”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쉬어.”

세희가 태화의 손에서 속옷을 낚아채고는 다시 윗옷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가며 입었다. 상호에겐 그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별안간 태화가 핸드폰을 들어 자기 몸에 가져다대고는 금속탐지기처럼 이곳저곳을 훑었다.

“삐~, 삐~.”

그리고 세희의 몸에 핸드폰을 가져가서는.

“에이~, 에이~.”

“야이씨!”

세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태화에게 달려들었다.

“맞을래? 맞을래?!”

“아 씨바, 땀! 디러디러디러!”

“선생님, 죄송해요. 귀 막아 주세요.”

상호는 군말없이 귀를 막고 돌아섰다.

그래도 싸우는 소리는 손을 뚫고 들어왔다.

“개년아! 니가 크면 얼마나 큰데! 너도 A잖아!”

“아니고요~, 난 B고요~, 니껀 비었고요~.”

“너 죽었어, 진짜!”

“아야, 아야! 항복! 으기이익!”

뭔가가 우두둑하고 꺾이는 살벌한 소리가 났다.

상호는 태화에게 세희의 운기조식 호위를 맡긴 것이 잘한 일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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