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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안방에서 유연이 나왔다. 유연은 거실에 드러누운 상호와 그 옆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봉진을 보고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해 버렸다.
그녀가 나빛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려 했다. 그런데 문고리가 잠겨 있었다.
유연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여보. 열쇠 가져와요.”
“어머님.”
지켜보던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선생이라도 바깥남자가 집에 와 있는데 문을 잠그는 게 잘한 것 아닐까요?”
그 말에 유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말이 백 번 옳았기에.
잠그지 않았다면 또 그걸로 혼냈을 것임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님은 나빛이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곡을 푹푹 찌르는 말이었을까. 유연은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나빛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빛아. 아침 먹자.”
눈이 퉁퉁 부은 나빛이 회색 파자마 차림으로 걸어나왔다.
유연이 밖으로 나오려는 그녀를 멈춰세웠다.
“갈아입고 나와야지.”
하지만 나빛은 억지로 그녀를 뿌리치고 걸어나와 상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힘껏 소리쳤다.
“밥 안 먹어요!”
봉진과 유연이 얼어붙었다.
봉진의 입에서 주전자 김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 나빛이가……. 소리, 소리를 쳤…….”
“너 버릇없이 그럴래?”
유연의 호통에 나빛이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몰라! 몰라몰라몰라! 나도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거예요!”
떼를 쓰며 다리를 구르는 모양이 누군가를 닮았다. 상호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태화 보고 배웠나?’
나빛의 반항은 계속 이어졌다.
“밥도 엄마가 주는 대로! 학교도 엄마가 정해준 대로! 선생님까지 엄마가 정해준 대로 해야 돼요?! 이대로 가면 결혼도 엄마가 정해줄 거잖아요! 나는, 나는…….”
그녀가 숨을 들이키고는 빽 소리쳤다.
“선생님이랑 결혼하고 싶은데에에!”
그 말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말을 한 나빛까지 포함해서.
나빛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말이 헛나와서…….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다는 말…….”
유연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나빛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었……는데…….”
“나, 나빛아. 아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냐. 그리고 선생님은 절대 너희랑…….”
상호는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유연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봉진도 완전히 넋이 나가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짓말…… 나빛이가…… 우리 딸이…….”
상호는 생각을 포기했다.
‘몰라 씨발. 난 누워서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나빛도 변명을 포기했는지, 아예 상호의 옆에 와서 누웠다.
봉진과 유연은 딸과 그 선생이 나란히 배째라를 선보이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
유연도 독했고, 나빛도 독했다.
나빛은 하루종일 상호와 함께 단식투쟁을 했다. 화장실만 가끔 일어나서 갔다 올 뿐이었다. 상호는 굶어 본 적이 많아서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나빛은 당연히 그렇지 못해서 배에서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래도 힘든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유연은 그런 나빛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봉진은 음식을 가져다주며 딸을 회유하고, 상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둘 다 어림도 없었다. 결국 밤이 되자 봉진은 나빛을 한 번 안아주고는 눈을 마주쳤다.
“잠은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응?”
“몰라요.”
“아무리 거실 바닥이라도 선생님이랑 자면 안 돼지. 안으로 들어가. 내일 엄마가 보면 너 집에서 쫓아낼지도 몰라.”
“그럼 기숙사 보내주는 거예요?”
“호적에서 파버릴지도 모른다고…….”
“몰라요.”
나빛은 픽 토라지며 상호에게 가까이 드러누웠다.
이쯤 되니 상호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잠은 들어가서 자. 나빛아.”
“몰라요. 난 이제 내가 선택해서 살 거예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했다.
그는 잠시 몸을 일으켜서 봉진의 앞에 앉았다.
“따님 몸엔 손가락 하나 안 대겠습니다. 들어가 주무십쇼.”
“이 딸 도둑놈 같으니……!”
봉진은 상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는, 한숨을 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거실에 단둘이 남았다. 상호는 슬쩍 나빛을 돌아보았다.
그녀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배 안 고파?”
“고픈데, 괜찮아요. 참을 거예요.”
“지금은 괜찮아.”
상호는 주방까지 기를 뻗어 허공섭물로 사과와 과도를 가져왔다. 지난밤에 집안을 쓱 둘러봐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가 사과를 깎기 시작하자 나빛이 일어나 앉으며 중얼거렸다.
“저희 엄마아빠가 이상한 거죠?”
“글쎄.”
상호는 마음만 먹으면 1초만에 사과를 깎을 수 있었지만, 하루종일 TV만 보다가 손을 움직이니 재미가 있어서 일부러 천천히 깎았다.
“부모 마음은 부모가 되기 전엔 모르지. 나도 아직 부모는 안 되어봐서.”
“그래도 남들하고 다르잖아요. 다른 애들은 핸드폰도 있는데 저만 없고……. 어딜 가든 삼촌들이 따라다니고.”
“그게 네 부모님 나름의 사랑이지. 오늘도 잘 참으시던데. 다른 집이었으면 너도 얻어맞았어.”
“그런 거예요……?”
“내가 그런 식으로 떼 썼으면 우리 어머니는 날 두들겨 패셨을걸.”
그는 사과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나빛의 입에 넣었다.
“누구나 자기 생각대로 산다. 이상한 사람이란 건 사실은 없는 법이야. 법하고 도덕만 잘 지키면 되지.”
나빛은 사과를 오물거리다가 씩 웃었다.
“저도 이제 제 생각대로 살래요.”
“그래. 그게 맞는 거…….”
그가 사과 한 조각을 더 떼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는데, 갑자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리 상호라도 손에 든 사과와 과도를 0.3초만에 사라지게 할 순 없었다.
내공으로 불태워버리면 되겠지만 그러면 불이 보이니까.
문을 연 것은 유연이었다.
유연이 상호와 나빛을 쳐다보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 좀 할까요.”
“예, 어머님.”
그녀가 상호의 앞에 앉았다.
“강 선생님은 왜 제 딸을 가르치려는 건가요?”
상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빛이가 저한테 배우고 싶다고 해서입니다.”
“그게 다인가요?”
“답니다.”
더 이상의 이유는 없다. 만약 나빛이 재능도 없고 예의도 없는 학생이었더라도, 그에게 배우고 싶다고만 하면 끝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연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강 선생님은 혹시 우리 딸애가 맘에 드나요?”
“엄마…….”
옆에서 나빛이 당황해했다.
상호는 그녀의 질문이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무슨 뜻입니까?”
“왜 이렇게 끈질긴가 싶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집착 수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도 원래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저한테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현여고에 찾아오기 전까진 그랬다. 아니, 정확히는 찾아온 후로도 그랬다.
학생들을 직접 받아보기 전까지는 이렇게까지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다하게 될지 몰랐다.
“그런데 직접 애들을 가르치다 보니…… 어느샌가 제 일정을 애들한테 맞추고 있더군요. 삶에 학생들이 들어온 겁니다. 사람이 삶에 집착하는 건 당연하지요. 마음에 드냐고 물으셨습니까? 순수한 뜻으로 물으셨다면, 그렇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 전부 한 명도 빠짐없이 마음에 듭니다.
나보다 아이들이 먼저일 정도로요.”
유연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상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전에 아버님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나빛이한테 집착하냐고.
제 대답은 그대롭니다. 제자가 포기 안 하면 선생도 포기 안 한다고. 그게 제 신조입니다. 제 스승님이 해준 말이기도 하고요.”
가족은 선택할 수 없지만, 스승과 제자는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선택한 인연임에 책임을 갖고 성의를 다해야 한다.
예경이 그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준 말이었다. 들을 때는 흘려넘겼지만, 선생이 되고 나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도 학생을 직접 가르쳐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왜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러면.”
유연의 말투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전투수업이 안전하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건가요, 선생님?”
“이번 달 중순에 공개수업이 있습니다.”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일정을 유연에게 보여주었다.
유연은 그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좀 바쁘시더라도 그때 와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
상호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려던 유연이 손을 미끄러트렸다. 핸드폰이 바닥에 톡 떨어지며 화면이 넘어갔다.
“앗, 죄송합…….”
그녀는 당황하며 핸드폰으로 손을 뻗다가 화면에 띄워진 사진을 보고 멈칫했다.
벚꽃을 배경으로 나빛과 상호가 둘이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건……?”
“아, 그게…….”
상호는 살짝 당황했지만,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에 주저 없이 대답했다.
“반 아이들하고 다같이 벚꽃 구경을 갔었는데, 나빛이가 핸드폰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연은 한참 동안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을.
어릴 때 이후로 본 적이 없는 웃음이었다.
“선생님.”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예.”
“귀하게 키운 딸이에요.”
상호는 손을 내저었다.
“전 그런 말 싫어합니다.”
그의 반에는 귀하게 키워지지 않은 딸이 둘이나 있었다.
“저한텐 다 귀한 학생입니다. 누가 더 귀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그것만은 선을 긋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안전하게, 건강하게 자라서 어디서든 싸울 수 있도록 키우겠다고는 꼭 약속 드리겠습니다.”
“……그런가요.”
유연은 나빛의 사진이 띄워진 핸드폰을 집어들고는 가만히, 하염없이,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았다. 눈에 새기기라도 할 듯이.
그녀는 한참 후에야 상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우리 딸…… 잘 부탁해요.”
상호는 핸드폰을 받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옆에서 나빛이 말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