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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은 주방이 아니라 아예 다른 방에 있었다. 자리엔 네 명이 앉았다.
한쪽엔 상호와 나빛.
한쪽엔 나빛의 부모.
마주앉은 그들의 시선은 상호에게서 단 1초도 떨어지지 않았다.
상호는 식탁을 내려다보며 진땀을 흘렸다.
‘불편해 뒈지겠네, 이래가지고 밥은 먹겠나……. 음식은 또 뭐가 이렇게 많아?’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육해공을 총망라한 산해진미.
그게 불안했다.
너무 불안했다. 김치도 불안하고, 고소한 버터 향기도 불안하고, 매콤짭짤한 사천풍 가재 요리의 마라 향기도 불안했다.
나빛의 어머니가 웃는 것까지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먼저 드세요, 강 선생님.”
나빛을 쏙 빼닮은 부드러운 눈매. 눈가의 주름을 빼면 고등학생 딸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외모.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의 여인이 바로 나빛의 어머니, 서유연이었다.
상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먼저 드시면 따라 먹겠습니다.”
“자, 빨리 먹…….”
봉진이 젓가락을 집으려 하자 유연이 그의 손등을 후려쳤다.
잠깐 동안 매서운 표정으로 봉진을 쏘아보던 그녀는 다시 딸처럼 방긋 웃으며 상호에게 말했다.
“먼저 드세요.”
상호는 유연과 봉진의 눈치를 살폈다. 봉진은 얻어맞은 손등을 문지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상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지? 부담 주는 작전인가?’
“그럼…… 염치불구하고 감사히 먹겠습니다.”
상호가 젓가락을 들자 나빛의 부모도 식사를 시작했고, 나빛도 그 뒤를 따랐다.
그가 반찬 한 점을 먹자마자 나빛이 헤실거렸다.
“맛있죠?”
“응.”
분명 놀라울 정도로 맛있는데, 목이 콱콱 막혀가지고는 한참을 씹어 겨우 넘겼다. 그래도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먹다가 죽을 만큼 맛있어.”
“그렇죠? 저희 어머니 요리 잘 하시죠?”
“응, 정말 잘 하시는…….”
느낌이 싸하다. 상호는 설마 싶어 유연을 바라보았다.
“어머님. 혹시 이거…… 전부 다 어머님이 만드신 겁니까?”
“네.”
“혼자서요?”
“혼자.”
유연이 빙긋 웃었다.
상호는 그대로 굳어 버려서 젓가락을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이래서 씨발 눈칫밥을 싫어하는 건데…….’
주된 요리만 쳐도 열 가지가 넘는다. 자잘한 것들까지 치면 세기도 힘들 정도. 이걸 혼자서 다 만들었다는 것은 점심부터 주방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뜻이다. 봉진에게 전화했던 그 순간부터.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유연의 환심을 살수 있는지. 나빛을 반에 남게 할 수 있는지.
도저히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어서 밥만 먹고 있는데, 드디어 유연이 이야기를 꺼냈다.
“강 선생님.”
“예.”
“제가 입학식에서 봤을 때는 검을 쓰셨던 것 같은데요.”
“……네.”
“왜 나빛이가 선생님 반에 들어가게 된 건가요?”
봉진이 마른침을 삼키고, 나빛이 젓가락을 멈췄다.
모든 시작은 나빛이 부모 몰래 신청서를 썼기 때문이었지만, 상호는 최대한 나빛에게 화살이 돌아가지 않도록 말을 뭉뚱그렸다.
“제가 가르쳐 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성력을 쓰실 수 있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딸아이를 가르치시려 하셨나요?”
상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전투는 신앙인에게도 가르칠 수 있으니까요.”
유연은 그 봉투를 받아 뜯었다.
안에는 나빛의 성적표가 들어 있었다.
“285명 중에 39등이면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충분히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어요. 성력 훈련을 안 하는 것도 아니라서 치유 유형으로 언제든지 진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유연의 미소가 엷어졌다.
그녀는 성적표에 적힌 전투 유형이란 글자를 보고는 아예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우리 딸이 왜 전투 유형으로 가야 하죠?”
“나빛이한테 몬스터를 잡으라고는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어떻게 위험에 빠질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그럼 왜 하필 우리 딸이죠? 다른 신앙인 아이들도 선생님 반에 있나요?”
“그건…….”
상호가 말문이 막히자 나빛이 끼어들었다.
“제가 했어요.”
유연의 눈썹이 꿈틀했다.
“네가 뭘?”
“제가……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어서 선생님한테 신청했어요.”
“엄마아빠가 전날에 상담해 줬잖니. 설마 네 맘대로 바꿨던 거야?”
“네.”
“너…….”
유연은 한숨을 쉬었다.
“방에 들어가 있어.”
“엄마…….”
“어서.”
나빛은 이번에는 봉진을 바라보았다.
“아빠…….”
하지만 봉진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빛은 울상을 지으며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나가기 전에 상호를 흘끗하고는, 코를 훌쩍이며 토라진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나빛이 나가고 나자 봉진이 입을 열었다.
“연이, 그래도 나빛이가 성적도 좋게 나왔다는데 시켜봐도 좋지 않겠어?”
상호는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저희 반 성적표를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저희 반 평균이 24등입니다. 다른 반 평균은 정말 아무리 높아 봤자 50을 못 넘지만…….”
“얼마나 잘 싸우게 시키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안전하게 교육하는지가 중요하다고요. 강 선생님.”
유연의 말투가 싹 바뀌었다. 날카롭고 싸늘하게.
상호는 쩔쩔매며 대화를 더 시도했다.
“맞습니다. 그게 제일 중요하죠. 저도 애들 안전에 제일 신경을…….”
“전투가 안전해요? 말이 돼요?”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내가 싫구나!’
둘의 입장은 평행선과 같았다.
한쪽은 전투를 안 배우면 나중에 위험해진다고 말한다.
한쪽은 전투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 두 논리에는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자신의 논리를 납득시켜야 하지만, 학교 선생은 학부모보다 아래. 너무도 불리한 싸움이었다.
“강 선생님.”
상호는 고개를 들어 유연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제 나빛이 선생님 그만둬 주세요.”
상호의 눈동자가 봉진을 향했다. 봉진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전투는 위험해.”
“……그렇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진 예상했다. 말로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하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상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식탁을 짚었다. 봉진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고, 유연은 만족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일어나는가 싶던 상호가 갑자기 땅바닥에 확 드러누워 버렸다.
봉진이 황당해했다.
“뭐하는 거야?”
“따님 가르치는 거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하시기 전까진 안 나갑니다.”
“이게 무슨 행패야! 빨리 나가게.”
“배째십쇼.”
“경찰 부를 거야!”
“부르십쇼.”
“이제 보니 자네……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구만!”
봉진은 뒷목을 잡으며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영환아!”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 한 명이 달려왔다.
“예, 회장님.”
“이 사람 좀 끌어내. 집 밖까지. 당장.”
영환은 상호의 팔을 잡고 힘껏 끌어올렸다.
그런데 아무리 용을 써도 상호의 몸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며 이 어셋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다이닝룸으로 한 명만 와봐.”
곧 한 명이 더 도착해서 상호를 들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허사였다.
다섯 명이 더 와도, 결국 열 명이 모여도 마찬가지였다.
봉진이 옆에서 닦달을 했다.
“뭐해? 사람 한 명 못 들어?”
“그게…….”
경호원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라 상호가 왜 안 들리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천근추. 내공으로 몸을 누르는 기예.
문제는 그 수준이 너무 고강해서 열 명이서도 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열 명이 덤벼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 내공이 싸움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많은 내공이 한 사람에게 모여 있으면 대체 얼마나 강할지다들 짐작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또 고용주에게 ‘저희가 좆밥이라 못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들은 다시 힘내서 열심히 상호를 들어보려 했지만, 상호는 부동자세로 단 1mm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생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밖에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경호원들이 상호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손만 더 아플 뿐이었다.
봉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유연의 등허리에 손을 얹었다. 밖으로 나가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나가요.”
그녀도 머리뚜껑이 열린 모양이었다.
상호는 유연이 자신과 기싸움을 시작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당황했다. 여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천근추를 쓰지 못했고, 봉진은 그녀를 들다시피 해서 방 밖으로 데려갔다.
그가 방을 나가기 전에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돌아가고, 한 명은 문 앞에서 지켜. 얼마나 오래 가는지 보자고.”
“음식은 치우면 되겠습니까?”
“치워. 치우고 불 꺼버려.”
“예.”
경호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곧 상호는 텅텅 빈 방에 홀로 남게 되었다.
‘무슨 감옥 갇힌 것 같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진짜로 행패를 부릴 순 없으니까.
답답하지만, 나이를 갑절로 먹은 어른들에게 힘자랑을 하기도 싫었다. 유연과 봉진은 상호의 죽은 부모와 딱 비슷한 연배였다.
제일 착한 제자의 부모님이기도 했고.
헌터로서 일반인에게 힘을 쓰는 건 못할 짓이기도 했다. 그러려고 나라 지킨게 아니었다.
힘을 보여주는 건 힘의 논리로 살아가는 헌터들 앞에서일 뿐.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상호는 조심스럽게 문 밖으로 내공을 뻗기 시작했다.
우리 딸 잘 부탁해요
“……자네 아예 여기서 살 건가?”
봉진이 황당해하며 물었지만, 상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거실 바닥에 한껏 늘어져서는 머리를 괸 채로 빈둥거리고 있었다.
‘아침엔 볼 게 없구만.’
리모컨을 들고 드럽게 넓은 TV의 채널을 돌려가며.
그 모습을 본 봉진이 뒷목을 잡았다.
“여기가 자네 집이야?! 방에선 어떻게 나왔나? 어이, 김지건이! 뭐하고 있는 거야?!”
“그 친구 벽이랑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나 봅니다.”
상호는 뻔뻔하게 대답하며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방 앞을 지키던 경호원은 부동자세로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상호가 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허공섭물로 붙잡아 둔 것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일반인에겐 죽어도 힘을 쓰지 않는 상호였지만, 경호원에게는 달랐다. 헌터니까.
‘헌터라면 희생 정신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그는 감자칩을 와삭거리며 기름진 손으로 리모컨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봉진이 손을 덜덜 떨었다.
“제발! 제발! 자네는 집에서도 그러나? 그리고 리모콘 좀 주게! 골프 경기 생방송 중이라고!”
“부자시잖습니까. 안방에 TV가 하나 더 있을 것 같은데요.”
“아내가 드라마를 보고 있어…….”
봉진이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상호는 봉진을 흘끗하고는 다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보니까 좀 잡혀 사시는 것 같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개벽 때 아내가 많이 고생했거든……. 나 다쳤을 때 간호해 주고, 애들도 먹여살리고…….”
“저런.”
그는 봉진이 애들이라고 말한 것에 관심이 갔다.
“나빛이한테 오빠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분가한 겁니까?”
“일 배우느라 바쁘지. 요즘은 나보다 바빠. 그러고 보니 자네 몇 살인가?”
“스물셋입니다.”
“뭐라고? 왜 이렇게 어려?”
봉진은 당황하다가도 입맛을 다셨다.
“하여튼 자네랑 동갑이구만. ……생각해보니 더 말이 안 되네. 자네 말이야, 아버지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배째십쇼. 아니면 따님을 주시던가.”
“나는 자네한테 딸아이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니까! 나는 납득했어! 자네가 맞아! 그런데 아내가 싫대…….”
봉진이 상호의 팔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자네 결혼도 안 해봤을 거 아닌가. 내 얼굴 봐서라도 좀 나가주게…….”
그렇지만 상호는 돌부처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봉진의 손만 허망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진짜로 배 째기 전엔 안 나갑니다.”
“아이고…….”
봉진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집에서 피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철썩같이 믿던 경호원들은 아예 들지도 못하고, 경찰을 부르자니 집에서 젊은 남자를 쫓아내면 어린 딸아이에게 안좋은 기사가 쏟아질까 봐 걱정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배를 째겠네. 그럼 나가줄 텐가? 응? 응?”
“잘 모르겠고 어머님 좀 설득해 주십시오.”
“이게 그게 있어. 아들은 내가 키우고 딸은 아내가 키우기로 했단 말이야. 딸아이 대해서는 워낙 확고해서 그게 쉽지가 않아…….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와 싸우기도 싫단 말일세…….”
상호는 말없이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화면엔 골프 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겁니까?”
“아, 맞아.”
봉진의 낯빛이 밝아졌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상호는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채널을 돌려버렸다.
“이런 재미없는 거 왜 봅니까? 차라리 홈쇼핑을 보겠습니다.”
“……어억!”
봉진은 뒷목을 잡았다.